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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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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18-08-14 17:11

灘川 이종학 / 캐나다 한국문협 고문
“살아 있네!”
   한국의 죽마고우에게 오랜만에 전화통화를 했더니 불쑥 나온 말이다. 그러면서
초등학교(소학교국민학교) 동창들 누구누구는 벌써 떠났고 자기도 미구에 갈 것 같단다.
할망구는 집안 출입을 겨우 할 형편이고 자기는 병원을 이웃집 드나들 듯 하니 늙은 몸이
얼마나 부지하겠느냐고 체념하는 목소리다. ‘100세 인생 노래’는 어쩌려고 죽는시늉을
하느냐고 슬쩍 비틀었더니 악담하면 죄로 간다며 허허 웃는다.
   40여 년 동안 중᠊고교에 복직했던 정말 성실한 교육자인 친구이다. 한눈 판 적이 없었고
언행이 바르고 한결같았다. 그야말로 100세를 노래해도 손색이 없을 친구라서 건강이 좋지
않다니 안타깝다. 인생의 시계는 하나님의 소관이니 누군들 감히 넘보겠느냐 마는 이런
친구가 오래 살아야 이웃에 덕과 보탬이 되지 않겠는가.
   이 친구하고는 잊을 수 없는 삽화 한 도막이 있다. 아주 까마득한 옛날이야기지만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친구는 맑은 금강이 흐르는 나루터 마을에서 자랐다. 헤엄도 잘 치고
나룻배도 가지고 있어서 배 젖는 일이나 낚시질에도 도사에 속한다. 전답이 많은 대농가라서
농사에도 박사 급이었다. 어려서부터 손에 닿으면 못 하는 것 없이 척척 해낸다고 어른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중3 여름 방학이었다.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시원한 강물에 풍덩 뛰어들어가 수영을
즐길 때였다. 밭에 지천으로 매달린 참외와 수박을 잔뜩 따다가 물에 띄워놓고 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천하의 낙원이 따로 없었다. 이렇게 한여름의 더위를 즐기다가 한 순간 나는
까무러치게 놀라서 소리쳤다.
“뱀이다! 뱀이 이쪽으로 오고 있어!” 정말 길이 한 발이나 됨직한 큰 뱀이 무서운 기세로
꾸불꾸불 헤엄쳐 우리들 쪽으로 오고 있었다. 왕 소름이 전신을 휘감았다. 그러자 이 친구는
되레 뱀 쪽으로 가까이 가더니 마침 목에 두르고 있던 수건으로 뱀을 덮으면서 잽싸게
입으로 한번 깨물고는 가까이에 있는 뽕나무 밭으로 휙 내 던지는 것이었다. 땅꾼이 따로
없었다.
   “이럴 때 필요해서 수건을 가지고 다니는 거야.” 친구는 뱀을 물었던 입으로 태연하게
참외를 한 입 물더니 와작와작 맛나게 먹어댔다. 나는 참외고 수박이고, 두근거리는 가슴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이 같은 기절초풍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이튿날 집에
돌아가려고 친구네 뽕나무 밭을 지나가다가 문득 발길을 멈추고 말았다. 어제 친구가
물어뜯다가 던져 버린 바로 그 뱀이 탱탱 부어 널브러져 있고 바로 그 옆에는 까치 한 마리가
또한 금세 터질 듯 부어 죽어 있는 게 아닌가.
   “쯧쯧 뱀이 물려 죽는 바람에 불쌍한 까치가 횡사했구먼. 이것 봐라, 사람이 입에서
나오는 독기가 이렇게 무섭고 독하다고.” 친구의 말에 의하면 사람에게 물려 죽은 뱀을 먹은
까치도 뱀 사체에 남은 사람의 독에 목숨을 잃었다는 설명이었다. 사람에 물린 잇발 자국은
오래 남는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속담이
전해져 오겠느냐고 덧붙였다. 그때 친구는 이미 철이 제대로 들었던 것 같았다.
   체스 노테봄은 자신의 저서 ‘의식(Ritual)’에서 “기억은 마음 내키는 곳에 드러눕는 개와
같다“라고 한 글이 생각난다. 이 삽화는 깊숙이 여투어두었다가 친구가 그리울 때마다
꺼내서 생생하게 재생한다. 70년 가까이 되었음에도 조금도 퇴색하거나 직-직- 실금조차
생긴 적이 없다. 심리학자들의 주장대로 ‘회상 효과’ 탓인지 친구하고 얽힌 삽화는 해를
거듭하지만, 오히려 젊은 시절을 찾아가듯 더욱 또렷해진다. 묻어 있는 고향 내음이 오래
갈수록 짙어 가기 때문이리라. 망향병은 어떤 명약도 효험이 없는 불치병인가 보다.
   과연 나이 들수록 시간(세월)은 빨리 흐르는가? 노인들의 집에 놓인 모래시계는 모래가
점점 빨리 흘러내린다고 여기는가? 노인들은 하루의 길이가 이런 신비한 현상 속에서
그렇게 믿으며 살아왔다고 말하는 심리학자가 많은 것 같다. 나는 이민생활 30년을 미망(迷
妄)의 세월, 부유식물의 세월이라고 서슴없이 비유한다. 삶의 조롱에 수없이 비틀거리며
힘들었다. 그래서 외치기도 한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빗대듯이 나이아 가라! 프랑스의 한
철학자는 “인생 중 어떤 기간의 길이에 대한 느낌은 그 사람 인생의 길이와 관련되어
있다”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나이는 저 혼자 오고 삶은 시간이 지배함은 분명하다.
시계의 시침이 두 바퀴 돌 때마다 하루가 지나고 새로운 날이 복원된다. 돌기를 거듭하는
시계의 생김새는 여일하지만, 그 시계를 들여다보는 사람의 모색에는 조금씩 변화가 온다.
꽃도 제 푼수를 알고 바뀌는 계절을 가늠한다지 않는가,
   “다음에는 전화를 안 받거든 나도 떠난 줄 알어.”
   “듣기 싫어. 꼭 살아 있어야 하네!” 나는 전화에다 대고 친구에게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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