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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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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18-07-16 09:31

정숙인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이미 중년의 어른임에도 불구하고 목마른 외로움이 불쑥 마음 한 귀퉁이에 들어선다. 창 밖은 초록이 무성한 여름이건만 마음은 홀로 쓸쓸한 잿빛 가을을 맞이한 듯 처량하기 짝이 없다. 세 살 무렵에 연년생인 오빠들을 따라 인근 초등학교로 놀러 갔을 때 그만 길을 잃어 버렸다. 너무나 오줌이 마려웠던 나는 놀이에 정신이 팔려있는 오빠들을 등지고 혼자 집을 찾아 갔다. 걸어도 걸어도 인가는 나타나지 않았고 짧은 걸음으로 이리저리 들녘을 헤매는 세 살 박이 꼬마는 난생 처음 겪는 공포의 도가니 속에 빠져 어쩔 줄 몰랐다. 사람의 통행이 드문 산 길을 몇 시간째 맴도는 아이에게 그 곳은 탈출할 수 없는 모래사막일 뿐이었다. 해가 져서 사위가 점 점 어두워지고 길 위로 시커멓게 내려앉은 산 그림자는 보이는 모든 것들을 더욱 무섭게 만들었고 이미 극한 외로움을 넘어선 아이에게는 오직 처절한 절망만을 안겨다 주었다. 
 
저물어가는 서녘 하늘을 보고 있으려니 어릴 적 길을 잃고 느꼈던 무서운 외로움과는 전혀 다른 외로움이 밥짓는 연기처럼 스멀스멀 가슴 한 귀퉁이로부터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어른이기 때문에 겪는 외로움은 자신을 과거 속 회상의 추억에 잠기게 하고 때로는 현재를 반성하게 하며 그래서 훗날 채색될 자신의 인생 말년을 차갑거나 따뜻하게 만든다. 길을 잃었을 당시는 너무도 어렸던 까닭에 그저 머릿속 가득 생각나는 것은 엄마라는 포근한 존재 하나뿐이었다. 가도가도 끝없는 산길을 계속 걸으면 언젠가는 산모퉁이에서 “아이고 우리 아가!” 하고 금방이라도 숨바꼭질하던 엄마가 뛰쳐 나와 나를 덥석 안아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 엄마가 한시라도 빨리 보고픈 마음에 지쳐 쓰러질 것 같으면서도 한 순간도 움직임을 멈출 수 없었다. 종일토록 굶으며 힘겹게 한 걸음씩 내딛는 와중에도 오로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밥상과 아랫목에 펴놓은 푹신한 이부자리만 온화한 엄마의 얼굴과 함께 허공에 나타났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이제는 어딘가를 아무리 오랜 시간 헤맨다 하여도 그 어디에도 나를 기다려줄 엄마가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살을 열 다섯 배도 훨씬 뛰어넘어 어른으로 살고 있는 지금이 오히려 엄마가 더 그리웁다. 그것은 아마도 어른이 된 이후부터는 내 스스로가 길을 찾고 걸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기에 어쩌면 엄마에게로 향하는 그리운 나만의 투정일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해 겨울이던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차디찬 겨울 바람이 맹렬하게 휘몰아쳐 골목에 제멋대로 쌓인 낙엽들을 한 순간에 날려버리는 것을 지켜보다 가슴 한가운데로 파고드는 외로움에 어쩌지 못하고 참으로 슬펐다. 그 동안 외로움은 소리 없이 독버섯처럼 자라나 언제든 나를 향해 돌진할 태세로 날이 선 채로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있었다. 내가 가진 외로움에 기습을 당한 나는 너무나 아파 한동안 그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 때 불현듯 허기가 극도로 몰려오며 당장에 그립고도 따뜻한 엄마가 보고 싶어졌다. 머나먼 이국 땅 어느 집 앞 골목에서 말이다. 부모의 간섭으로부터 놓여나기를 바라며 완전한 자유와 독립을 꿈꾸던 사춘기 시절로 무조건 되돌아가고 싶었다. 용돈을 타서 떡볶이를 사먹고 허락을 받아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던 시절로 진정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나의 마음이 외치는 소리 저 너머로 엄마는 한 켠에 오두마니 서서 ‘아이고, 엄마가 너 간섭할 때가 마냥 그리운가 보고만, 어째 세상이 만만치 않지야!’ 하며 빈정거리다 말고 한편으론 그런 딸자식이 안쓰러워 얼굴 가득 안타까움을 담아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결코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완전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릴 적 겪었던 힘들었던 경험의 몇 곱절이나 되는 어려운 과정을 뛰어 넘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어른을 흉내 내는 아이들에게 진심 어린 충고와 비판을 할 수 있다. 겉으로는 어른인 척 하지만 진정한 내면은 어른이 아닌 모습으로 한심하게 살아가는 가짜 어른들이 현실에 난무하고 있다. 이들 때문에 상처받는 어린 영혼들이 늘어나는 요즘의 현실이 너무나 슬프지 않을 수 없다. 어른다운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다시금 마음에 동심을 품어야 한다. 몸도 마음도 순진무구한 어린아이로 되돌아갈 수는 없을지라도 이따금 어린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 이미 어른이 된 이상 완전한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이따금 우리가 하늘을 쳐다보며 마음의 빗장을 풀고 여유를 갖는 것처럼 아주 가끔이라도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위안을 주고 받을 수는 있지 않은가. 어느 누군가 단단히 얼어붙은 이기적이고 모순된 마음을 가졌을지라도 동심으로 다가서는 마음 앞에서는 이기심이 눈 녹듯 녹아 없어지리라. 상큼한 바람 한 점이 청아하게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폐부에 달라붙어 숨어있는 이기적인 삭정이를 떼어내고 아홉 살 순수한 마음을 다시 심기라도 하듯 나는 사르르 눈을 감고 깊숙이 그것을 들이마셨다. 파아란 오카나간 호수 위로 드넓은 코발트 빛깔의 여름 하늘이 포근하게 나를 어머니처럼 감싸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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