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달 항아리

정목일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8-07-09 09:48

정목일 / 캐나다 한국문협 고문
  달 항아리를 보면 달빛의 맑은 도취 속에 빠진다. 달빛 속의 미인이나 꽃은 더 어여쁘고 향기롭다. 햇빛은 사물의 분명한 모습을 드러내지만, 달빛은 마음까지 닿아 오는 여운(餘韻)을 준다.
  달 항아리를 보면 불현듯 조선 중엽의 달밤 속에 있는 듯하다. 달은 농경시대에 우주의 중심, 마음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농사일이나 살아가는 일이 달의 주기에 맞춰 이뤄졌다 한국인의 마음속에는 보름달이 떠 있었다. 달은 해보다 유약해 보이지만, 마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햇빛처럼 눈부시지 않고, 한없이 부드러운 세계를 펼쳐낸다.
  달 항아리는 장식이나 꾸밈이 없다 순백의 공간에 달빛의 충만이 있을 뿐이다. 텅 비어 있어서 적막감 속에 그리움이 밀려온다. 한국의 문화는 햇빛 문화라기보다는 달빛 문화가 아닐까. 햇빛 속에 환히 드러낸 당당함의 미학이 아니라, 달빛 속에 물든 은근함과 정갈함의 미학이다. 담백함과 순박함이 마음을 끌어당겨 오래도록 싫증나지 안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18세기 중국은 박자 위에 녹ㆍ황ㆍ백, 삼채(三彩)와 청ㆍ황ㆍ홍ㆍ백ㆍ흑, 오채(五彩)의 화려한 채색 자기를 만들었다. 일본도 섬세하고 정교한 채색 자기를 만들었다. 한국인만은 도자기공예에서 고려 500년간 청색을, 조선 500년간엔 백색을 탐구했다. 세계에서 한국인만이 500년간에 걸쳐 청자와 백자를 만드는 데 모든 심혈과 역량을 쏟았다. 울긋불긋 휘황찬란한 대식(多色)을 외면한 채, 단색(單色)의 추구에 집중해 왔다.
  한국인의 미의식은 바깥으로 드러나는 치레, 장식, 과장, 기교 등의 의식보다는 본질의 탐구, 마음의 정화, 깨달음에 두고 있었다. 청색은 한 점 티끌도 묻지 않은 청정의 하늘, 백색은 고요와 맑음의 달밤을 담아 놓았다. 한국인의 마음은 우주와 영원의 세계에 닿아 있다. 달 항아리엔 화려하고 사치스런 것을 떨쳐 버리고, 영원의 발견과 마음의 정화를 보여 준다. 얼마나 마음에 묻은 때와 얼룩을 씻어 내야 텅 빈 푸른 하늘이 되고, 맑은 달밤이 될 수 있을까.
  조선시대 백자엔 민족의 마음을 담아 놓았다. 태어나서 흰 배내옷을 입고, 죽어서 입는 수의(壽衣)도 흰색이다. 한국인들은 유독 흰색을 선호해 왔다. 동서고금의 모든 장식들이 기교에 빠져들어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면을 드러내지만, 조선 도자기는 단순하고 자연스런 형태 속에 소박하고 정갈한 미를 품어 낸다. 일체의 허식과 과장을 버리고 욕심을 비워 낸 바탕에 여백의 미가 흐른다.
  달 항아리는 달빛을 담아 텅 비어 있는 세계이다. 달빛만 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어디선가 대금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사뿐사뿐 정적을 밟고 임이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비어 있기에 보이는 마음의 세계이다.
달 항아리를 보려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물 1437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국보 제310호 달 항아리를 만날 수 있다. 국보 제309호인 ‘백자대호(白磁大壺)’ (삼성미술관 리움 보관)는 높이 44cm, 몸통 지름 42cm 크기에 구연부가 짧고, 45도 정도 경사진 것으로 보름달처럼 보이나 완전한 원형은 아니다.
  보통 높이가 40cm가 넘는 것을 ‘달 항아리’라 부른다. 몸체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따로 만들어 붙인 다음, 높은 온도의 불 가마에서 굽기 때문에 접합부분이 변형되어 보름달처럼 둥근 형태로 나오는 경우가 드물다.
  달 항아리는 온전한 원형(圓形)이 아니다. 한족을 약간 비뚤어진 곡선이 흘러 들어 더 운치가 있고 여유가 있다. 좌우대칭의 완전한 곡선이 아니라, 흐름이 굽어져서 흐른 모습에서 장인의 손길과 마음까지 즐겁게 만든다. 보름달보다 열 나흘 날 달처럼 어느 곳인가 좀 비어 있는 듯한 모습이 마음이 마음을 끌어당긴다. 만월(滿月)의 완벽이 아닌 미완(未完)이 주는 여운이다. 앞과 뒤, 좌우가 빈틈 없는 원형이 아니어서 더 정겹고 구수하다. 어느 한쪽이 비스듬히 구부러진 데서 진솔한 멋과 소탈한 맛을 느끼게 한다. 빈틈과 여백이 있기에 보는 이가 마음으로 채워 가는 맛을 스스로 알게 해 준다.
  우리 선조들은 달 항아리를 왜 만들었을까. 달 항아리는 어두운 밤에도 마음이 부셔서 황홀해지는 달밤을 맞아들일 수 있다. 달은 말 없는 벗이 되고 대화자가 돼 준다. 우주 와 마주 앉아 오래도록 바라보며 소통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 이보다 더 좋은 벗이 없다. 백색의 텅 빈 공간에 무한의 달빛이 내려와 있다.
  달 항아리는 단순함의 미학, 비움의 아름다움을 지녔다. 볼수록 정감과 그리움이 넘치는 달빛의 세계......달 항아리는 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한국인의 마음과 미학을 담아 놓은 도자기이다.
  달 항아리는 원만하고 안정감이 있다 평화롭고 순박하다 맑고도 고요하며, 점점 깊어지고 환해진다. 지상(地上)과 천상(天上)이 만나고, 찰나와 영원이 만나고 있다. 달 항아리엔 어떤 순간일지라도 때묻지 않고 순박한 삶을 살고자 한 선조들의 심성이 담겨 있다. 바라보면 달처럼 떠올라 무상무념(無想無念)의 세계에 잠길 듯하다. 삶의 발견과 깨달음의 미학을 담아 놓은 그릇이다. 한국인의 영혼과 한국 미의 정화(精華)가 담겨있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어린 시절 나는 눈을 참 좋아했다. 눈이 오는 날이면 동생과 뛰쳐나가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던 기억이 있다. 코끝과 손끝이 발개져서 집에 들어오면 갑작스레 따뜻해진 공기에 손발이 가려워 피가 맺힐 때까지 긁어 대곤 했다. 그래도 동네 친구들과 함께 눈을 굴려 가며 누가 더 큰 눈사람을 만들지를 겨루는 시간은 더없이 즐겁기만 했던 기억이다.  그 시절 눈이 오면 부모님이 “눈이 오네. 길 얼지...
윤의정
그림자 3 2024.02.05 (월)
한여름 고산의빙하를 감상하고내려오다 길을 잃었다초저녁부터브랜디와 와인을 걸친 산의 양 어깨는더욱 무거워 보였다어둠 속에서 혼자 싸우다 먹칠하다무사히 내려왔다​라면 끓여 허기 채우고산짐승 공포와 습기를 머금었던이슬 친 옷가지며 어두웠던 마음조차따사로운 모닥불에 털어 말렸다빠닥빠닥 말리고 훌훌 날려버렸다진한 커피 한 잔 마시고 선애써 잠을 청했다산 그림자 서늘하다 못해오싹한 밤이었다​날카롭게 흘기던외 눈 달빛...
하태린
봄이 오는 밤 2024.01.29 (월)
조용한 호흡이크게 느껴지는안식의 긴장이무의식의 시간을날 선 칼같이 새롭게 한다대지의 핏줄은이미 봄을 바로 집터 밑까지밀어 오고밤은 내일 터질 성벽을벼르듯 턱 밑까지숨이 차다가느다란 비가적막의 커튼을 드리우고어둠의 너머에새봄의 생기가아가의 숨골 위에새록 인다긴 여정 끝지난 모든 과실은겨울 추위와 얼은 땅거죽아래에서 모두 해체되어 다시준비되었다땅 밑의 수로는물길을 뚫어바로 봄의 축제를 대비했다모든 생명은 이제이해...
김석봉
밴쿠버에서 남들은 거의 다 가보았다는 멕시코 캔쿤 여행은 갑작스럽게 결정이 났다. 막내 딸과 아내 세 식구가 비행기를 탄 것은 작년 12월 11일이었다. 근래 비행기를 타러 공항으로 향할 때는 에어 캐나다 직원 가족으로 자리가 있어야 탈 수 있기 때문에 빈자리가 있으려나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할인 가격으로 사기는 했지만 어쨌든 공짜는 아니다. 공짜가 아니면 당당해진다. 비행기는 이륙 후 기수를 남쪽으로 돌려 콜로라도...
한힘 심현섭
골덴 바지 2024.01.29 (월)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 나는 겨울이면 늘 어깨를 웅크리고 다녔다. 어머니는 내가 키가 크지 않은 이유가 그 때문이라며 자주 나무라셨다. 그게 마음에 걸렸던 지 어느 날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골덴 바지를 한 벌 사오셨다.  바지에 대한 촉감은 허벅지까지 먼저 알아차린다. 병아리 털에 닿은 듯 부드럽고 포근하면서 약간 간지럽기도 했다. 그런데 길이가 길고 품이 컸다. 내 허리춤을 잡아보며 어머니도 다소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정성화
어미 2024.01.29 (월)
처음은 어둠이었다가다음은 점이다가그 다음은 점 점 점 선명해지는눈 코 입 손 그리고 발가락그렇게 생긴 꽃들이 내게 와서나는 저절로 꽃이 되고덩달아 꽃이 되어어미의 이름으로 사는꽃의 나날난얼마나 환하고뜨겁고겁 없이 용감했는지
어미
쏟아지는 모시빛의 햇살아래너는 눈이 부시게도 빛나고 있었지.누군가를 향한 너의 기다림은하얀 여백이 되어가고 있었고지울 수 없는 명징한 약속은까만 상흔이 되어 나부끼고 있었어.고결하게 새겨진 너의 이름은성실한 애달픔을 묵묵히 지우며무심한 시간을 견뎌내고 있었지.하얗게 사무치는 천년의 침묵은한겹 두겹 수피를 벗겨 내었고,영혼을 향한 순백의 기도로 다시 태어났었어.빛과 어둠은 자리를 바꾸어 나갔지만너의 가녀린 뿌리는...
이봉란
황혼의 찬미 2024.01.22 (월)
J 에게,엊그제 이민 온 것 같은데 어언 30년이 훌쩍 지나고 이제는 성숙한 디아스포라의 길을 가고 있는 중이네. 내 인생에도 황혼의 자유가 찾아온 셈일세.자네가 보내 준 ‘황혼의 자유’ 라는 글 속에 보면 나이가 들어가면 노숙해지는 것도 있어 참 좋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글픈 일도 있다네. 오미크론이 지난 이즈음 아는 목사님의 거동이 불편한 모습을 보면서……그렇지만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고, 웃고 싶으면 웃고 내...
이종구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