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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18-06-25 16:27

이종학 / 캐나다 한국문협 고문 

 
“저기. 밥도둑을 잡아라!”
난데없이 환청이라도 들리는 듯하다. 아니, 열무김치 한 그릇이 밥상에 새로 대령하는 착각이다. 제철음식으로 열무김치의 별미를 능가할 인기 반찬은 없다. 생김새 그대로 입에 착 감기는 감칠맛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이 나이가 되도록 열무김치의 미각을 버리지 못한다. 캐나다에 이민해 사는 지금까지도 새봄의 태양이 떠오르면 열무김치의 환상적인 독특한 맛에 푹 빠지고 만다.
열무는 여린 무, 어린 무라는 말이다. 여린 푸른 잎과 뿌리로 담근 김치라는 뜻으로 한자로는 세청근저(細靑根疽)라 한다. 열무김치의 장점은 야들야들하고 풋풋한 푸른 생명력에 있다. 그래서 특별한 조리법이 따로 필요치 않다. 뿌리째 숭덩숭던 썰어 소금물로 살짝 절였다가 고추와 마늘, 생강, 파 따위 손쉽게 눈에 보이는 것들을 함께 버무려 먹으면 된다. 멸치국물, 밀가루 풀물, 된장 국물과 같은 적당한 국물을 따로 마련하면 더할 나위 없지만, 굳이 번거롭게 만들어 섞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대중음식이요 서민음식이다. 아삭아삭 씹히며 즉석음식의 묘한 맛을 끌어내는 매력은 적절하게 표현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열무김치의 친화력은 가히 경이적이다. 쌀밥은 물론 보리밥이든 조밥이든 가리지 않는다. 물 국수, 냉면과 같은 음식하고도 궁합이 척척 이다. 열무김치를 집어넣고 비비거나 말면 은근히 서로 입맛을 더한다. 밥상을 따로 차리거나 다른 반찬을 늘어놓을 경황이 없다. 양푼이고 왕 대접이고 열무김치만 있으면 구만이다. 어이 시원하다! 어이 만나다! 이런 감탄이 열무김치와 함께 입으로 들어가고 나오기를 거듭한다.
열무김치는 여름 더위를 이기는 납량(納凉) 음식의 최고 주자이다, 그래서 적당한 냉장시설이 없던 시절 열무김치의 보관은 가히 전쟁을 방불케 했다. 열무김치는 담그고 하룻밤만 지나도 쉰내가 나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니 냇가, 우물가나 그늘지고 시원한 곳이면 열무김치 담은 동네 그릇들이 늘어선다. 소위 유산균 발효가 위세를 떨친다. 열무김치 맛도 안 들어 군내부터 피운다는 속담이 그래서 전해온다, 하지만 시어 꼬부라진 열무김치를 일부러 찾아서 먹는 이들도 흔하다. 열무김치는 유산균의 활발한 활동으로 제철음식의 대접을 오히려 더 받는 귀한 음식인지도 모른다,
열무김치 담은 그릇을 들고 방방 뛰는 여인네만큼이나 바쁜 농부들의 처지도 잊어서는 안 된다. 열무는 파종은 물론 뽑을 시기를 넘기면 큰일이다. 밭에 수분도 적당해야 한다. 변덕쟁이 봄 날씨 변화에 민감해야 함은 기본이다. 가물어서 물 줄 적기를 비끼면 야단이다. 열무는 연하고 싱싱함이 생명이다. 열무 뽑을 때를 이삼일만 넘겨도 줄기와 잎이 무성하게 자라는 대신 억세고 거칠어져서 열무김치 특유의 제구실을 못 하고 만다. 적기에 수분이 부족하거나 뽑을 때가 지난 열무는 외양간이나 돼지우리로 가야 한다. 열무의 한 해 농사를 깡그리 망치고 만다. 콩밭열무니, 목화밭열무니 하면서 그늘에서 자란 연한 열무를 찾는다. 하늘의 감로수야 어쩔 수 없지만, 열무 농사는 무조건 부지런해야 한다. 농사 수익도 수익이려니와 기막힌 열무김치 맛의 호사를 한 해 뒤로 미루어야 했다.
이민 초기에 작은 집을 샀는데 뒷마당이 꽤 넓었다. 농사에 이력이 있는 노인장 한 분을 만나서 일일이 지도를 받으며 텃밭 농사를 시작했다. 비닐하우스도 세우고 한편으로는 꽃밭도 만들었다.
그 당시 오십여 평생 농사라고는 처음이었다. 그것도 이국에 와서 비록 텃밭이지만 흙을 만지다니 신기했다. 닭 똥도 얻어다 넣고 모래도 사다 섞은 밭을 뒤집어엎은 뒤 4월 초에 열무 씨를 심었다. 북극권에 속한 이곳은 심술이 나면 5월에도 눈발이 눈을 부릅뜨는 한랭지대다. 비닐하우스 안은 햇볕이 좋으며 섭씨 25도를 오르내리는 불볕은 수분을 빨리 증발하고, 날이 궂고 바람이 불면 영하 권으로 뚝 떨어진다. 그래서 비닐 덮개를 씌웠다 벗겼다 법석을 떨어야 한다.
 이렇게 노심초사 끝에 4월 말 열무 첫 수확의 개가를 올렸다. 난생 초유의 농사 작물이다. 대견하고 뿌듯했다. 이런 방식으로 부지런을 떨면 열무 농사는 3모작까지 가능했다. 이곳 여름은 일교차가 길고 강렬하다. 알맞게 물을 뿌리고 날씨 관리를 잘하면 15일 만에도 열무김치를 맛보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지금이야 한국은 농사가 눈부시게 발전했다. 비닐하우스를 이용하면서 각종 농작물의 연중 재배 수확이 가능하니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외국에서 버벅거리는 외국어로 살아가면서 이 나이를 먹도록 영혼의 핏줄에 스며 흐르는 입맛은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음인지 제철이 되면 열무김치를 찾는다, 이제는 텃밭도 없고 열무 농사를 접은 지 오래다. 그리고 한국식품점에서 열무를 구하기 쉽지 않고 한국 음식점에서도 제 맛 나는 열무김치를 사 먹기 어렵다. 한국인이 많이 사는 미국에도 열무김치 맛은 요란스럽기만 하지 그저 그랬다. 추억은 따사로운 햇살에 녹지만 이제 그 입맛의 열망은 접어야 할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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