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소 / 캐나다 한국문협 자문위원
어허~ 달구야~’선소리 꾼의 뒤를 따르는 달구 소리 후렴구다.
망자의 집터를 다지던 구성진 소리는 갈잎
갈피마다 파고들더니 이제 잠이 들었다. 아버지의 맏아들이면서 다섯 아이의 아버지로, 더불어 한 여인의 지아비로 쌓아온 삶의 무게를 마침내 툴툴 털어내고, 편히 누운 그를 두고 산에서 내려온다. 잔걸음을 치던 어린
그의 증손자가 격의 없이 팔을 잡아당겨 낯선 등을 더듬을 때, 참나무 마른 가지 끝에서 물빛이
반짝인다. 새로운 계절의 움이 트고 있다.
시아버지의 상사를 남들은 호상이라 한다.
아흔 살을 넘기고도 병원 신세를 지지 않고
‘급성 심정지’로 명을 다하였으니 모두가 큰 복이라 위로한다. 발인하는 아침에는 유달리 차가웠던 날씨가 푹해지고, 살짝 흩뿌리는
눈발까지 춤을 추니 그 어른 좋은 데 가셨음이 틀림없단다. 아무리
더 없는 호상이라 한들 문상객의 담담한
조문이 준비도 없이 갑작스러운 이별을 맞이한
유족의 비통한 심사를 다 헤아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상주와 상제를 위로하며 함께 애쓰는 조문객의 넉넉한 품앗이다. 오랜 우리 장례문화의 정겨운 풍경이다.
산에서 내려오면서 서성이는 생각의 갈피를 잡는다. 시아버지의 카랑카랑하던
목소리를 더 들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발걸음이 무겁다. 시부모를 보낸 며느리의
텅 빈 마음이 부모를 잃은 아들이 느끼는 슬픔의 넓이를 뛰어넘기는
힘들겠지만, 며느리도 아들과 하나같은 상제가 아니던가. 어느새
마음 한 자리에 바람이 일고 그리움이 스멀거린다. 허전하고 헛헛한 가슴은 아들이나 며느리, 누구든 가족이면 당연히 맞닥뜨리는 정서로 누구든지
그러해야 마땅하다.
언젠가, 겉보기에
가족이 아닌 것 같은 어느 집 며느리가 눈에 들어온 적이 있다. 그녀는 시어머니의 영정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 하기는커녕 허리를 굽히지도, 묵례도 하지 않고 그냥 서 있기만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삼우제에서도 온 가족이 절을 하는데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그녀를
보며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늘따라 그 며느리가 자꾸 생각난다. 결혼하고 난 한참 뒤, 그녀가 하나님에 의지한 세월이 그리 길지 않은데,
신심이 얼마나 크고 깊으면 집안 어른의 상례에 반기를 들고 혼자 꼿꼿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걸까. 아니면 종교적으로 초심자라
앞뒤 사려분별을 떠나 맹목적으로 되는지. 과연 친부모의 상례라 해도 친정 식구들과 달리 멀뚱히
막대기처럼 버티고 서 있을 것인지. 그날, 상제가 아니라
문상을 온 조문객보다 못한 행동으로 그녀는 주위를 황당하게 했다.
요즘도 그녀는 자기 시댁에서 손님처럼 행동한다. 종교적인 문제와는 별다른 차원의 사고방식 하나가 그녀 깊숙이 똬리를 틀고 있나 보다. 시집이 그녀의 집이고 시집 식구는 한 가족이라는 공동체 의식이 없으니 자신이 시집의 중심이 되지 못하고 주인이 되지 못한다. 시집이라는 큰 우주를 껴안지 못하고 단지 자기 남편과 자식만이 자기의 중심이고 우주일 뿐인 그녀는 시댁에서 영원히 손님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안타깝고 답답하다. 종교적 신념이나 법을 우리의 전통 관례나 예법과 동등하게 놓지 못한 그녀의 천칭 저울은 한쪽으로 심하게 기울어 있다. 뿔뚝 고집으로 자신의 의지를 쓸데없이 세우는 그녀다. 분명 자기 식구뿐인 그녀의 작은 우주 또한 확장된 식구와 가족 전체를 아우르는 일은 역부족일
터다. 현명한 며느리는 어긋난 아집을 버리고 모두를 끌어안는 포용력을 가진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을 조정하고 알맞은 선택을 하는 여유와 조율의 과정이며, 조율을 위한 타협은 자신을 이겨야 하는 싸움이다. 조율은 격의 없는 속마음을 먼저 열어 보이는 지혜가 필요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부한다. 나는 남을 위한 배려와 양보에 익숙하고 조율을 위한 타협뿐 아니라 타협을 위한 조율에도 능하다고. 집 안팎의 다양한 세상살이에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그에게 그녀가 똑똑히
말할지도 모른다.
“왜 당당하지 못하고, 그렇게 눈치를
보고 사느냐?”
우리는 눈앞 저울의 눈금을 서로 다르게 읽고 새로운 해석을 낳는다. 오랫동안 길든 습성의 차이와 거쳐온 삶의 거리 때문이다. 조율은 사람에 따라 살아가는 길을 밝혀주는 하나의 등불 같은 방편이 될 수 있고, 비굴한 타협의
뒷골목에 굴러다니다 말라버린 밥풀때기가 될 수도 있다.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간격은 각각 살아온 시간만큼 멀고 아득하다. 조율과 눈치, 그 사이의 격은 계절이 변하는 자연의 이치처럼 굳건하다. 우리의 격은 오고 가는 삶과 죽음처럼 단단하다. 나무에
싹이 터지는 소리 들린다. 봄이다.
우리의 격의隔意는 허물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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