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늙어서 사는 맛

김춘희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8-06-04 10:40

김춘희 / 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진정한 친구란 멀리 떨어져 살아도 늘 가까이 사는 사람처럼 가믐에 콩 나듯 전화해도 변치 않는 옛날 그대로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서 원하기만 하면 영상통화를 하거나 문자를 주고받으며 얼마든지 빠르게 소통한다. 그러나 진정한 친구는 요란스레 문자나 영상통화가 아니라도 그저 전화 한통이면 그거로도 족하다.

 친구도 나이를 떡 먹듯이 먹어 치워 80이 휠 씬 넘어갔다. 70 때만해도 늙은 할머니가 뭘 그리 젊은 척하느냐고 늙음을 빈정댔더니 발끈하면서 “난 절대로 안 늙어!” 하더니 얼마 전엔 퇴행성 관절염이 깊게 와서 무릎이 부었다, 손가락이 아프다 하며 좋아하던 그림도 못 그리고 끙끙 앓는다기에 나이들면 ‘안 늙는 재주가 없다“고 한마다 쏘아 주었다. 몸은 그렇게 하나 둘 기계가 망가지듯 망가지지만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편한 노년들이다. 늙어서 좋은 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여행 끝에 공항에서 무거운 짐 가방이 삥빙 돌다가 내 짐이 앞에 도착하여 짐에 손을 대기만 하면 옆에 있던 젊은이들이 잽싸게 도와준다. 나는 그들에게 '고맙다, 젊은이, God bless you!' 하고 감사의 듯을 전한다. 그 뿐인가! 혹 버스를 타거나 하면 차에 오르기 무섭게 젊은이들이 자리를 양보한다.

 절대로 늙지 않는다던 친구가 늙어서 좋다는 말을 했다. 뭔데? 친구 말인 즉, 눈이 잘 보이지 않으니 집안에 먼지 쌓인 게 눈에 띄지 않아 늘 깨끗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좋단다. 나는 일찍이 백내장 수술도 했고 원래 시력은 좋아서 몇 년 전에 친구 집엘 갔는데 화장실 바닥에 머리카락이 여기저기라 친구 몰래 한참을 머리카락 사냥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 친구는 그 때도 자기화장실은 깨끗하다고 생각하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 말인즉 한번은 안경을 끼고 보았더니 온통 먼지투성이라 그제야 청소기를 돌렸다는데 아무튼 안경이라는 물체가 없으면 자기는 깨끗하게 살고 있다고 자부하고 혼자 행복감에 빠져 살 수 있는 것이 우리 노인들이다.   

 귀도 그렇다. 아들 식구들이 위층에 살고 있는데 3살짜리 손녀가 가끔 오밤중에 엄마를 부르며 큰 소리로 운다. 며느리가 하루는 ‘어머니, 애가 울어서 잠 설쳤느냐 묻어 왔지만 청각이 시원찮은 내가 아이의 고함 소리를 들을 까닭이 없다. 위에서 굿을 해도 나는 상관이 없다. 멀리서 들려오는 밤하늘의 별똥 떨어지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내 특기는 잘 자는 것이다. 그러니 귀도 어둡고 해서 위층에 신경 쓸 일이 없다. 그러니 아들 내외도 위층에 살며 아래층 늙은 어머니에 대한 신경은 아주 꺼 버리고 산다. 한국 뉴스를 보다가 한번은 끔찍한 이야기를 들었다. 층간 소음으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늙으면 그런게 아무 문제도 안 되는 일인데 살인까지 하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잘 들리지 않으면 내가 듣고 싶은 소리만 듣고 살면 세상 편하다.

 늙어서 좋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더욱이 캐나다에 살면 말이다. 어느 아들이 한달에 꼬박 꼬박 천여 불 이상의 용돈을 줄까 말이다. 나는 저 소득 노인 연금 해당 선에서 조금 넘을까 말까 해서 억울하게도 저 소득 연금 혜택을 받지 못한다. 그래도 1천 300불 이상이 날짜도 틀리지 않고 월 말이 되면 꼬박 꼬박 내 은행계좌로 들어 온다. 그래서 노인들이 정부가 효자라고 한다. 이민 올 때 캐나다로 온 것은 참으로 잘 한 나라 선택이었다.

 약 한달 가량 여행하고 돌아오니 집 안팎에 온통 꽃 냄새로 덮여 천국을 방불케 했다. 앞 뒤 마당에 서있는 라일락 꽃나무는 이때가 자기들 철이라며 한껏 향기를 내 뿜는다. 향기에 휩쓸려 기절이라도 할 듯 나는 행복감에 젖어 눈을 감았다. 꽃향기가 내 목을 감고 흘러 전신을 감아 내려갔다. 이건 그 아무 철이나 맛 볼 수 있는 감미로움이 아니다. 오로지 지금 이 철에만 맛 볼 수 있는 라일락이 주는 취대의 귀한 선물이다.

 내 나이가 되면 받을 줄도 알아야 살맛이 난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그래서 미국에 사는 우리 조카들은 오랜 만에 만나면 세배들을 하고 세뱃돈은 저희들이 어른에게 바친다. 누가 노년이 살기 힘들다고 했는가? 이렇게 살기 좋은데 말이다. 아이처럼 들리면 듣고 보면 보고 느낌대로 살면 된다. 몸이 망가지는 것은 내가 고목이 되 가고 있다는 징조니 서러울 것도 없다. 늙은이답게 어린아이처럼 살맛만 보고 살면 된다. 친구여, 사는 날까지 기쁘게 살아야하지 않겠는가?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홍안에서 노안으로>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이에 비해 늙어 보이는 사람도 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나이에 비해 어려 보여 난처했던 적도 꽤 있었고, 나이 들어서는 비교적 젊게 보니 마음이 흡족할 때도 있었다.20대 초반 제대 후 복학을 했을 때의 일이다. 경기도 안양시 어느 변두리를 걷고 있었는데, 불량하게 보이는 학생 세 명이 나에게 다가와 돈을 내놓으라고 했다. 한 명은 체격이 작았지만 뒤에 2명은 보통 체격...
이형만 외 2인
<고귀한 분실>  해마다 찬바람이 불어오고 단풍 꽃이 필 때면 우리 곁으로 찾아오는 반가운 손님이 있다. 이 고마운 손님은 산란기가 되어 수많은 어려움과 난관을 헤치고 목적지인 모천까지 무사히 회귀하는 연어들이다. 알을 낳기에 가장 좋은 장소를 찾아 먼 바다에서부터 거센 강줄기를 거슬러 하천 상류 얕은 물가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은 그야말로 눈물겹다. 연어에게 주어진 태생적 생존 본능이라 하더라도 돌아오는 길이 얼마나...
양현석 외 2인
  팔루스는 사진 모임에서 매년 세 네 차례 출사를 가는 곳이다. 팔루스는 미국 아이다호 주 서부 맞닿은 워싱턴주 동부에 위치한 밀밭 곡창지대이다. 구릉과 평원으로 끝없이 펼쳐진 이 곳의 아름다움은 한마디로 표현할 수가 없다. 새싹이 돋는 봄은 출렁이는 물결처럼 갓 태어난 푸른 밀들이 춤을 추고, 여름이 다가오면 노란 유채꽃들과 푸른 밀들이 축제를 벌이고, 가을엔 밀들이 베어진 대지가 마치 전라의 여인처럼 본래 대지의 아름다운...
박광일
그래도 봄은 온다 2024.03.25 (월)
경칩 지나 춘분으로가는 길모롱이 언덕 바지에불현듯 반짝이는보라 빛 고운 웃음소리긴 긴 겨울 잔인한 혹한 속에서그래도 봄은 온다고옹기 종기눈 녹은 양지녘에 모여 앉은여리고 작은 제비꽃 가족반짝이는 보라 빛 비단 실 입에 물고대지 위에 점점이희망이란 단어를 환하게 수 놓고 있다
임완숙
니스에서 3박 4일 2024.03.18 (월)
프롤로그쓰레기와 개똥이 널려 있는 지저분한 도시, 니스Nice의 첫 인상이다.트램 역에서 예약한 호텔로 걸어가는 길은 지중해의 아름다운 도시라는 환상에서 깨어나게 한다. 역 주변엔 노숙자와 개가 퍼 질러 앉아 있거나 누워 있어 개똥과 쓰레기 투성이고, 골목으로 들어갈수록 상황은 심각해 발걸음을 떼 놓을 때마다 주의가 필요하다.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기며 도착한 숙소는 소박하지만 깔끔하고 종업원은 친절하다. 프랑스 말을 알아들을 수는...
강은소
3월의 일기장 2024.03.18 (월)
펼쳐보니뒤척였던 적보다 구겨졌던 적이 더 많았군요먼지 투성이로 처박혔던 것보다 나았다고혼자 위로도 해보지만눈 보라 쳤던 겨울밤에 웅크리던 낱말 들다시 덮을까요?여전히 봄은 멀어 보였죠나무 밑 다람쥐가 조심스레 도토리를 오물거리네요가난한 위장을찌그러졌던 속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듬더군요햇살이푸른 햇살이돌돌 말려 올라간 꼬리에 머무네요잔잔하게 바라봅니다조용히 덮었어요그리고 너덜거리는 일기장을 햇살에...
유장원
오래된 마음 2024.03.15 (금)
1‘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는 푸시킨의 시가 서두에 놓인 기사였다. 퇴근을 앞둔 마지막 교정이었지만, 이미 야근이 계속된 터라 피곤이 몰려왔다. 고골이 푸시킨을 200년에 한번 나올법한 작가라고 치켜세운 부분에서는 집중력을 잃고 교정지 위에 빨간 펜으로 기다란 선을 긋고 말았다. 그러다 나의 관심을 끈 건 뜻밖에도 푸시킨의 아내였다. 푸시킨은 러시아 상류층 사이에서 미인으로 소문났던 나탈리아 니콜라예브나...
고현진
추억 (안녕) 2024.03.08 (금)
  김회자 / 사) 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회원   창가에 앉아  얼마나 많은 추억들이  비 소리에 섞여 흘러가는지    그리움이 강이 되어  가슴을 흔들어 놓고 한 줄기 빛처럼 비추는  지난날의 추억들이 퐁당퐁당 떨어진다   나를 과거로 이끄는  그리고 나를 현재로 되돌린 비의 속삭임이여 안녕.
김회자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