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최종수정 : 2018-05-30 08:45

박정은 / 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알버타 북쪽의 겨울은 유난히 춥고 길다. 딱 잘라 일 년의 반이 겨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우리 가족이 이곳으로 이사를 온 건 겨울 중에서도 가장 춥다는 1월이었다. 주위를 사방으로 둘러봐도 보이는 건 하얀 눈뿐이었다. 꽁꽁 언 이 땅에도 과연 봄이 오는 걸까? 그런 불안감이 들 때마다 난 이삿짐을 쌀 때 거듭 확인하며 챙겨 온 분홍꽃 꽃씨를 펴봤다.
   우리 가족이 캐나다에 첫발을 내디딘 건 2000년이었다. 땅을 바꾸면 몸살을 앓는 게 어디 나무뿐일까? 당장 살 집을 얻는 것조차 어려웠으니 분명 우리에게도 힘겨운 시작이었다. 정원이 풀로 가득한 외관이 허름한 집을 겨우 얻어낼 수 있었다. 빌린 집을 깨끗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이곳의 렌트 문화에 바짝 긴장한 난 짐을 풀기도 전에 호미부터 사와 정원의 풀을 뽑기 시작했다. 그렇게 풀과의 전쟁을 계속하던 어느 날, 눈에 거슬리는 또 하나의 풀을 발견했다. 부엌 창을 통해 보이는 그 풀은 차고 옥상 위에 버려진 화분 속에서 슬며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분명 한국에서 봤던 풀과 비슷했다. 당장 뽑아버릴까도 싶었지만, 생명을 잉태하지 못한 채 그 화분 속에 갇혀있는 흙의 설움도 크겠다 싶어 꽃을 사다 심어주기 전까지만 그냥 두자며 돌아섰다. 그렇게 미뤄진 일은 결국 그 풀을 한참이나 자라게 만들었고, 그 사이에 초록색이던 풀이 분홍색을 첨가하며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다. 분홍빛으로 치장한 꽃망울들에게 내가 애정을 품기 시작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동안 내 호미에 가슴 조렸을 꽃에 대한 미안함도 미안함이거니와 그 꽃에게 느끼는 어떤 동질감 때문이었다. 그 꽃의 씨앗이 자신의 존재마저 확인시킬 수 없는 낯선 땅으로 날아와 꽃을 피우기까지의 이야기가 먼 훗날 우리 가족의 이야기가 되길 바랐던 것 같다.
   ‘나’라는 씨앗이 이 낯선 땅에 내려와 앉았는데 과연 풀일지 꽃일지? 결국 내 존재를 보이기도 전에 밟히거나 뽑혀버리진 않을지 한없이 두려웠다. 내 존재를 일깨워주지 않는 세상이 싫어서 보이지 않는 둥그런 방어막으로 우리 집 주위를 덮은 채 난 그 안에서만 숨어 살았다. 영어로 말을 걸어오는 세상이 무서워 숨었고, 내 속사정에 무심하기만 한 세상이 섭섭해서 숨었다. 분홍꽃은 그런 내게 찾아 온 친구였다. 넉넉한 자연의 품에서 무리지어 필 곳도 많으련만, 하필 분홍꽃은 그 옹색한 땅에 혼자 내려앉아 내 눈 앞에서 피어났다. 난 아침마다 내가 마실 커피 한잔과 꽃에게 줄 물 한잔을 들고 분홍꽃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분홍꽃은 빨래를 널다가도 또 내가 내쉬는 숨이 방안의 공기를 무겁게 한다고 느낄 때에도 언제나 쉽게 찾아가는 친구가 되었다. 그럴 때마다 분홍꽃은 항상 내게 말했다. “비록 지금은 네가 쓸모없는 풀처럼 보일지라도 네 속엔 거친 땅도, 바람도 이길 강인함이 있다. 그걸 믿고 견뎌라. 그럼 언젠간 네 꽃이 피어날 거다.” 그렇게 분홍꽃의 격려로 하루하루를 버티던 난 그 꽃이 시들까 걱정이 앞섰다. 그래선지 분홍꽃 첫 송이가 바닥에 떨어진 날, 난 굳이 그 원인이 옹색한 땅 때문이라 우기며 그 꽃을 정원으로 옮겨 심는 수선을 피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서툰 운전솜씨가 후진을 하다 그만 분홍꽃 줄기를 부러뜨렸다. 급한 마음에 응급상자를 들고 나왔지만 약을 발라줄 수도 꿰매줄 수도 없었다. 버팀대를 대고 반찬고로 감아주는 것밖엔 별 도리가 없었다. 하루가 다르게 물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난 분홍꽃을 붙잡으려던 나의 집착을 자책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을 주고 지켜보면 꽃망울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꼭 눈물만 같아 함께 울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다 말라버린 줄기가 마지막 힘을 다해 내게 남긴 것을 발견했다. 그건 분명 씨앗이었다. 꺾어진 몸뚱이로도 끝내 생명을 지켜낸 분홍꽃을 보면서 난 숙연해지고 말았다. 그 꽃은 내가 이 땅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난 분홍꽃의 진짜 이름도 몰랐지만 그때부터 그 꽃은 내 인생의 멘토가 되어 이사를 갈 때마다 나와 함께 다녔다. 이 북쪽으로 이사를 올 때도 당연히 챙겨왔는데 첫해는 집을 얻지 못해 그냥 꽃씨를 서랍 안에 묵히고 있었다. 그해 여름, 차로 하이웨이를 달리는데 길섶에 분홍꽃 무리들이 보였다. 분명 나의 분홍꽃이 맞았다. 급하게 친구에게 그 꽃의 이름을 물으니 ‘fireweed'라고 했다. 불풀? 하늘과 땅이 맞닿는 곳까지 정말 제 이름답게 불처럼 번져가는 꽃무리가 실로 장관이었다. 이렇게 당찬 꽃을 그동안 정원 한 귀퉁이에 가둬두고 있었으니 미안함과 감동으로 눈가가 뜨거워졌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난 서둘러 꽃씨를 들고 언덕으로 달려 나갔다. 넌 정원에 갇힐 꽃이 아니다! 이제 자연으로 돌아가 불처럼 번져나가라. 이제부턴 나도 내 정원에 대한 집착을 버리련다. 한국이란 익숙한 정원도 이미 떠나왔고, 밴쿠버란 익숙한 정원도 이젠 잊겠다. 나도 너처럼 그 어디서라도 강하게 뿌리 내리며 꽃을 피우겠다. 앞으로 캐나다에서의 나의 삶은 바로 파이어위드, 널 모방한 삶이 될 거다! 하얀 날개를 단 꽃씨가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날아오르던 날, 나도 그 언덕에서 하나의 꽃씨가 되어 함께 날아올랐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어린 시절 나는 눈을 참 좋아했다. 눈이 오는 날이면 동생과 뛰쳐나가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던 기억이 있다. 코끝과 손끝이 발개져서 집에 들어오면 갑작스레 따뜻해진 공기에 손발이 가려워 피가 맺힐 때까지 긁어 대곤 했다. 그래도 동네 친구들과 함께 눈을 굴려 가며 누가 더 큰 눈사람을 만들지를 겨루는 시간은 더없이 즐겁기만 했던 기억이다.  그 시절 눈이 오면 부모님이 “눈이 오네. 길 얼지...
윤의정
그림자 3 2024.02.05 (월)
한여름 고산의빙하를 감상하고내려오다 길을 잃었다초저녁부터브랜디와 와인을 걸친 산의 양 어깨는더욱 무거워 보였다어둠 속에서 혼자 싸우다 먹칠하다무사히 내려왔다​라면 끓여 허기 채우고산짐승 공포와 습기를 머금었던이슬 친 옷가지며 어두웠던 마음조차따사로운 모닥불에 털어 말렸다빠닥빠닥 말리고 훌훌 날려버렸다진한 커피 한 잔 마시고 선애써 잠을 청했다산 그림자 서늘하다 못해오싹한 밤이었다​날카롭게 흘기던외 눈 달빛...
하태린
봄이 오는 밤 2024.01.29 (월)
조용한 호흡이크게 느껴지는안식의 긴장이무의식의 시간을날 선 칼같이 새롭게 한다대지의 핏줄은이미 봄을 바로 집터 밑까지밀어 오고밤은 내일 터질 성벽을벼르듯 턱 밑까지숨이 차다가느다란 비가적막의 커튼을 드리우고어둠의 너머에새봄의 생기가아가의 숨골 위에새록 인다긴 여정 끝지난 모든 과실은겨울 추위와 얼은 땅거죽아래에서 모두 해체되어 다시준비되었다땅 밑의 수로는물길을 뚫어바로 봄의 축제를 대비했다모든 생명은 이제이해...
김석봉
밴쿠버에서 남들은 거의 다 가보았다는 멕시코 캔쿤 여행은 갑작스럽게 결정이 났다. 막내 딸과 아내 세 식구가 비행기를 탄 것은 작년 12월 11일이었다. 근래 비행기를 타러 공항으로 향할 때는 에어 캐나다 직원 가족으로 자리가 있어야 탈 수 있기 때문에 빈자리가 있으려나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할인 가격으로 사기는 했지만 어쨌든 공짜는 아니다. 공짜가 아니면 당당해진다. 비행기는 이륙 후 기수를 남쪽으로 돌려 콜로라도...
한힘 심현섭
골덴 바지 2024.01.29 (월)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 나는 겨울이면 늘 어깨를 웅크리고 다녔다. 어머니는 내가 키가 크지 않은 이유가 그 때문이라며 자주 나무라셨다. 그게 마음에 걸렸던 지 어느 날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골덴 바지를 한 벌 사오셨다.  바지에 대한 촉감은 허벅지까지 먼저 알아차린다. 병아리 털에 닿은 듯 부드럽고 포근하면서 약간 간지럽기도 했다. 그런데 길이가 길고 품이 컸다. 내 허리춤을 잡아보며 어머니도 다소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정성화
어미 2024.01.29 (월)
처음은 어둠이었다가다음은 점이다가그 다음은 점 점 점 선명해지는눈 코 입 손 그리고 발가락그렇게 생긴 꽃들이 내게 와서나는 저절로 꽃이 되고덩달아 꽃이 되어어미의 이름으로 사는꽃의 나날난얼마나 환하고뜨겁고겁 없이 용감했는지
어미
쏟아지는 모시빛의 햇살아래너는 눈이 부시게도 빛나고 있었지.누군가를 향한 너의 기다림은하얀 여백이 되어가고 있었고지울 수 없는 명징한 약속은까만 상흔이 되어 나부끼고 있었어.고결하게 새겨진 너의 이름은성실한 애달픔을 묵묵히 지우며무심한 시간을 견뎌내고 있었지.하얗게 사무치는 천년의 침묵은한겹 두겹 수피를 벗겨 내었고,영혼을 향한 순백의 기도로 다시 태어났었어.빛과 어둠은 자리를 바꾸어 나갔지만너의 가녀린 뿌리는...
이봉란
황혼의 찬미 2024.01.22 (월)
J 에게,엊그제 이민 온 것 같은데 어언 30년이 훌쩍 지나고 이제는 성숙한 디아스포라의 길을 가고 있는 중이네. 내 인생에도 황혼의 자유가 찾아온 셈일세.자네가 보내 준 ‘황혼의 자유’ 라는 글 속에 보면 나이가 들어가면 노숙해지는 것도 있어 참 좋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글픈 일도 있다네. 오미크론이 지난 이즈음 아는 목사님의 거동이 불편한 모습을 보면서……그렇지만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고, 웃고 싶으면 웃고 내...
이종구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