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은 / 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알버타 북쪽의 겨울은 유난히 춥고 길다. 딱 잘라 일 년의 반이 겨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우리 가족이 이곳으로 이사를 온 건 겨울 중에서도 가장 춥다는 1월이었다. 주위를 사방으로 둘러봐도 보이는 건 하얀 눈뿐이었다. 꽁꽁 언 이 땅에도 과연 봄이 오는 걸까? 그런 불안감이 들 때마다 난 이삿짐을 쌀 때 거듭 확인하며 챙겨 온 분홍꽃 꽃씨를 펴봤다.
우리 가족이 캐나다에 첫발을 내디딘 건 2000년이었다. 땅을 바꾸면 몸살을 앓는 게 어디 나무뿐일까? 당장 살 집을 얻는 것조차 어려웠으니 분명 우리에게도 힘겨운 시작이었다. 정원이 풀로 가득한 외관이 허름한 집을 겨우 얻어낼 수 있었다. 빌린 집을 깨끗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이곳의 렌트 문화에 바짝 긴장한 난 짐을 풀기도 전에 호미부터 사와 정원의 풀을 뽑기 시작했다. 그렇게 풀과의 전쟁을 계속하던 어느 날, 눈에 거슬리는 또 하나의 풀을 발견했다. 부엌 창을 통해 보이는 그 풀은 차고 옥상 위에 버려진 화분 속에서 슬며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분명 한국에서 봤던 풀과 비슷했다. 당장 뽑아버릴까도 싶었지만, 생명을 잉태하지 못한 채 그 화분 속에 갇혀있는 흙의 설움도 크겠다 싶어 꽃을 사다 심어주기 전까지만 그냥 두자며 돌아섰다. 그렇게 미뤄진 일은 결국 그 풀을 한참이나 자라게 만들었고, 그 사이에 초록색이던 풀이 분홍색을 첨가하며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다. 분홍빛으로 치장한 꽃망울들에게 내가 애정을 품기 시작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동안 내 호미에 가슴 조렸을 꽃에 대한 미안함도 미안함이거니와 그 꽃에게 느끼는 어떤 동질감 때문이었다. 그 꽃의 씨앗이 자신의 존재마저 확인시킬 수 없는 낯선 땅으로 날아와 꽃을 피우기까지의 이야기가 먼 훗날 우리 가족의 이야기가 되길 바랐던 것 같다.
‘나’라는 씨앗이 이 낯선 땅에 내려와 앉았는데 과연 풀일지 꽃일지? 결국 내 존재를 보이기도 전에 밟히거나 뽑혀버리진 않을지 한없이 두려웠다. 내 존재를 일깨워주지 않는 세상이 싫어서 보이지 않는 둥그런 방어막으로 우리 집 주위를 덮은 채 난 그 안에서만 숨어 살았다. 영어로 말을 걸어오는 세상이 무서워 숨었고, 내 속사정에 무심하기만 한 세상이 섭섭해서 숨었다. 분홍꽃은 그런 내게 찾아 온 친구였다. 넉넉한 자연의 품에서 무리지어 필 곳도 많으련만, 하필 분홍꽃은 그 옹색한 땅에 혼자 내려앉아 내 눈 앞에서 피어났다. 난 아침마다 내가 마실 커피 한잔과 꽃에게 줄 물 한잔을 들고 분홍꽃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분홍꽃은 빨래를 널다가도 또 내가 내쉬는 숨이 방안의 공기를 무겁게 한다고 느낄 때에도 언제나 쉽게 찾아가는 친구가 되었다. 그럴 때마다 분홍꽃은 항상 내게 말했다. “비록 지금은 네가 쓸모없는 풀처럼 보일지라도 네 속엔 거친 땅도, 바람도 이길 강인함이 있다. 그걸 믿고 견뎌라. 그럼 언젠간 네 꽃이 피어날 거다.” 그렇게 분홍꽃의 격려로 하루하루를 버티던 난 그 꽃이 시들까 걱정이 앞섰다. 그래선지 분홍꽃 첫 송이가 바닥에 떨어진 날, 난 굳이 그 원인이 옹색한 땅 때문이라 우기며 그 꽃을 정원으로 옮겨 심는 수선을 피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서툰 운전솜씨가 후진을 하다 그만 분홍꽃 줄기를 부러뜨렸다. 급한 마음에 응급상자를 들고 나왔지만 약을 발라줄 수도 꿰매줄 수도 없었다. 버팀대를 대고 반찬고로 감아주는 것밖엔 별 도리가 없었다. 하루가 다르게 물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난 분홍꽃을 붙잡으려던 나의 집착을 자책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을 주고 지켜보면 꽃망울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꼭 눈물만 같아 함께 울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다 말라버린 줄기가 마지막 힘을 다해 내게 남긴 것을 발견했다. 그건 분명 씨앗이었다. 꺾어진 몸뚱이로도 끝내 생명을 지켜낸 분홍꽃을 보면서 난 숙연해지고 말았다. 그 꽃은 내가 이 땅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난 분홍꽃의 진짜 이름도 몰랐지만 그때부터 그 꽃은 내 인생의 멘토가 되어 이사를 갈 때마다 나와 함께 다녔다. 이 북쪽으로 이사를 올 때도 당연히 챙겨왔는데 첫해는 집을 얻지 못해 그냥 꽃씨를 서랍 안에 묵히고 있었다. 그해 여름, 차로 하이웨이를 달리는데 길섶에 분홍꽃 무리들이 보였다. 분명 나의 분홍꽃이 맞았다. 급하게 친구에게 그 꽃의 이름을 물으니 ‘fireweed'라고 했다. 불풀? 하늘과 땅이 맞닿는 곳까지 정말 제 이름답게 불처럼 번져가는 꽃무리가 실로 장관이었다. 이렇게 당찬 꽃을 그동안 정원 한 귀퉁이에 가둬두고 있었으니 미안함과 감동으로 눈가가 뜨거워졌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난 서둘러 꽃씨를 들고 언덕으로 달려 나갔다. 넌 정원에 갇힐 꽃이 아니다! 이제 자연으로 돌아가 불처럼 번져나가라. 이제부턴 나도 내 정원에 대한 집착을 버리련다. 한국이란 익숙한 정원도 이미 떠나왔고, 밴쿠버란 익숙한 정원도 이젠 잊겠다. 나도 너처럼 그 어디서라도 강하게 뿌리 내리며 꽃을 피우겠다. 앞으로 캐나다에서의 나의 삶은 바로 파이어위드, 널 모방한 삶이 될 거다! 하얀 날개를 단 꽃씨가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날아오르던 날, 나도 그 언덕에서 하나의 꽃씨가 되어 함께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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