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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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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18-03-26 13:30

灘川 이종학 / 캐나다 한국문협 고문
캐나다 기러기가 요란하게 울며 돌아온 지도 두 주일 가까이 된다. 봄이 살금살금 오기 시작하는 느낌이 든다. 유난히 겨울이 긴 지역이다. 캐나다 북서부 북극권에 속한 대평원에 자리 잡은 에드몬튼은 거의 여섯 달에 걸쳐서 눈과 혹한이 계속되는지라 3월 지나 4월에도 봄소식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겨우 영상 기온이다 싶어도 북서풍이 불명 체감온도는 영하로 뚝 떨어지곤 한다. 기상청도 일기예보의 정확성에 자신을 갖지 못한다. 5월에도 무서리가 내리고 9월에도 눈발이 펄펄 날린다. 꽃에 향기가 없고 곤충이 번성하지 않는다. 
나는 점심을 먹고 나서야 산책에 나섰다. 오늘은 10˚ C이고 약한 바람에 햇볕도 따스한 편이다. 오래간만에 좀 얇은 점퍼 차림으로 아파트를 나섰다. 아파트 앞 차도를 건너면 바로 산책로가 나선다. 주택가를 누비듯 만들어 놓은 산책로는 거의 왕복 4km에 달한다. 아직도 큰 나무 밑에는 흙먼지를 뒤집어쓴 잔설이 가끔 볼썽사납게 웅크리고 있지만. 뽀송뽀송하게 잘 마른 아스팔트길은 더없이 쾌적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기저기 빙판 지거나 눈 녹은 물이 고여 있곤 했었다. 추위에 찌든 어깨를 한껏 펴고 천천히 걸었다. 나잇값을 하느라고 언제부터인가 걸음이 느려지고 가끔 길가 벤치에 앉아 쉬어가기도 한다. 그래도 허리 디스크를 앓으면서도 매일 거르지 않고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한다.
얼마나 걸었을까. 문득 저기 길가 판자 울타리 아래에 무엇인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처음에는 누가 개를 풀어놓았나 싶었다. 그러나 이내 굴 토끼임을 알아봤다. 앞뒤 다리가 거의 비슷하게 길고 크기는 자이언트 수준이다. 보기 딱하도록 말라서 까칠하다. 혹독하고 긴 겨울을 이기느라 얼마나 죽을 고생을 했겠는가. 끝 간 데 없는 평원 한가운데인 이곳은 주택가에도 굴 토끼가 살고 있다. 어디에다 굴을 파고 사는지 신기하다. 두터운 눈과 어름에 완전히 뒤덮인 땅속에서 정온 체질이 무엇을 먹고 추위를 견디는지 생각만 해도 어깨가 다 써늘해진다. 하긴 북극에도 토끼가 서식한다니 이상할 것도 없다. 
굴 토끼는 나무 울타리 밑 양지바른 곳에 겨우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는 민들레를 뜯어 먹고 있는 듯했다. 겨울이 위세를 잃으면 제일 먼저 얼굴을 내미는 풀이다. 어, 정말 봄이 왔나 보네.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제야 조심스럽게 가까이 있는 나뭇가지를 잡는다. 역시 나무들도 매서운 강추위를 견디느라 보기 민망하게 까칠하다. 하지만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살폈다. 있었다. 분명히 새로운 것이, 대추 씨만 한 형체가 보일 듯 말 듯 푸르무레한 색을 띠고 여기저기 앙증맞게 돋아나는 새순이 있었다. 코에 가까이 대었다가 입술로 가만히 물었다. 나처럼 연만한 늙은이들에게는 새로운 탄생은 무엇이든, 언제나 경이롭다. 봄을 다시 맞는구나, 하는 감동이 잔잔한 물 테처럼 다가온다.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는 인생이기에 계절의 변화를 바라보는 심정은 더없이 신선하다.
굴 토끼의 반대말은 무엇일가? 글쎄……. 끼토굴? 나는 실실 웃으며 아주 조심스럽게 걷는다. 그 동안의 기막혔던 허기를 면하려는 토끼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긴 귀를 척 늘어트리고 좌우 양쪽으로 갈라진 입이 오물거리는 모습이 보일 만큼 가까이 다가갔을 때 또 놀라운 광경에 움칫하고 발길을 멈췄다. 이번에는 집 고양이였다. 까만 얼룩이 진 옷을 입은 큰 강아지만 한 고양이가 담 위에 쪼그리고 앉아서 꾸벅꾸벅 오수를 즐기고 있었다. 식사에 열중하는 굴 토끼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고양이는 사납고 공격성이 강한 육식동물이다. 굴 토끼의 포식을 용인하듯 해바라기에 열중하다니 정말 가관이 아닐 수 없다. 역시 봄이 온 탓일까? 
문인들은 산토끼보다는 고양이와 더불어 봄을 노래하기를 즐기는 편이다. “햇살을 베고 누운 고양이가 다디단 하품을 토해내고 있다.” 문득 어느 수필 한 구절이 떠오른다. 고양이가 봄볕을 제일 먼저 물고 온다는 말도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고양이체통에 제 본성을 버리고 눈앞에 보이는 토끼의 모습을 구경만 하다니 자존심 상하는 노릇이다. 사실 나는 고양이를 싫어하는 편이다. 앙칼진 입과 발톱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긴 그 두드러진 야성(野性)이 마음에 들어서 고양이를 반려동물로 여러 마리 키우는 사람들도 있긴 하다. 시골에 살았을 때는 어쩔 수 없이 고양이를 집에서 길러야 했다. 쥐들이 어찌나 성화를 불리는지 고양이가 아니면 그 행패를 잠재우지 못한다. 그러나 고양이란 놈들이 제 위력을 과시하듯 쥐나 뱀을 물고 방안으로 들어와 장롱 밑으로 들어가는 데는 놀라다 못해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기왕에 고양이 이야기가 나왔으니 재미있는 삽화 한 토막을 소개하고 싶어진다. 내가 캐나다에 이민하기 전의 일이다. 재래시장에서 건어물 전을 하는 친구가 있었다. 가끔 어물전으로 친구를 찾아가면 언제나 고양이 두 마리를 보게 된다. 살이 뒤룩뒤룩 찐 이놈들은 진열해 놓은 건어물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서 열심히 졸고 있다. 한 번은 친구에게 물었다. 고양이 앞에 고기반찬이라는 속담도 있는데 저놈들이 건어물을 먹어 치우면 어쩌려고 저렇게 놔둔단 말인가? 주인은 빙그레 웃는다. 쥐들은 고양이 냄새만 맡아도 어물전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라도 배불리 먹도록 조기 대가리 같은 맛있는 음식을 고양이들에게 진상하면 가게 어물에 눈길도 주지 않는다고 한다. 어물을 탐내는 고양이에게 어물 도둑을 지키게 하다니 기막히게 역설적이었다. 문제는 엉뚱한 데 있었다. 하루는 친구를 찾아갔더니 건어물전이 썰렁하게 비어 있었다. 주인이 집안에 일이 생겨서 부부가 한 이틀간 가게를 비운 사이에 철석같이 믿고 맡겼던 점원이 건어물을 몽땅 싸 들고 도망쳤다며 한숨 묻은 쓴웃음을 날렸다. 건어물 전에는 고양이 두 마리만 댕그라니 앉아 있었다. 
하필이면, 건어물 전 고양이만도 못한 사람을 왜 이 싱그러운 새봄에 들먹인단 말인가! 화사한 기분에 먹칠하는 주책없는 짓이다. 맑고 드넓은 하늘 한복판에 전투기가 일직선으로 비행운을 남기며 빠르게 날아가고 있었다. 봄날 하오의 삼삼한 적막에 귀가 다 멍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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