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 / 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회원
일상의 블랙홀을 벗어나 길을 나서는 일은 나를 비우는 동시에 채우는 일이다. 긴 시간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 눈길을 줄 때면, 번잡한 일상의 산란했던 마음이 어느새 고요해진다. 때론 길동무와 정서적 교감을 갖기도 하고 낯선 여행지에서의 자유로움에 마음이 설레기도 한다. 어느새 여행은 건조하게 되풀이되던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투란도트에게 보이던 칼라프 왕자의 열정이 사라져버린 칠순의 여행객도 그윽한 눈빛으로 은발의 아내를 카메라에 담는다.
빙하기의 얼음층으로 덮여 함부로 가까이할 수 없는 캐나다 록키는 비씨 주 북동쪽에서 알버타 주 내륙까지 1450Km를 내달리며 그 위용을 뽐내고 있다. 슈스왑 호숫가 샐몬 암을 지나 골든에 도착하니 길고 긴 차량 행렬이 트랜스 캐나다 하이웨이에 줄지어 서 있다. 다행히 눈사태로 한동안 통제되었던 도로가 방금 해제되었다고 한다. 골든의 경사진 산과 깊은 계곡을 지나는 로저스 패스는 많은 강설량으로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눈사태로 인한 대륙 횡단 철도의 피해를 막기 위해 산자락에 잇대어 설치한 터널들이 눈에 많이 띈다. 차가 구불구불한 계곡의 내리막길을 저속으로 움직일 땐 깊게 심호흡을 하며 눈을 꼭 감는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 일어날까 불안해 하며, 반복되던 일상의 사소함이 평온한 축복이었음을 깨닫는다. 드디어 늦은 밤, 카나나스키스 리조트(Kananaskis Resort)의 야외 온천에서 긴장을 풀며 남은 일정을 점검해 본다. 다음날, 곤돌라를 타고 밴프의 설퍼산(Sulphur Mt.) 정상에 올랐다. 순백의 캐스캐이드산(Cascade Mt.)봉우리에 걸쳐있는 구름은 수목의 한계선과 빙하의 경계에서 더욱 아름다운 비경으로 다가온다. 2천 5백만 년 전 이 일대의 바다 밑 암석층이 대빙하에 밀려 지각 변화를 겪던 장면을 상상해 본다. 장중한 베토벤 프로메테우스 서곡의 환청 속에 잿빛 하늘과 거대한 암석층이 융기와 침식을 거듭하는 초자연의 혼돈이 그려진다. 멀리 고봉의 위엄을 갖춘 해발 3000m에 가까운 잉글리스말디산(Inglismaldie Mt.), 피치산(Peechee Mt.), 런들산 (Rundle Mt.)들은 난공불락의 흰 성벽처럼 밴프를 둘러싸고 있다. 이 산 저 산에서 “의로운 영혼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신들의 메시지가 저 아랫마을 밴프로 퍼져 나가고 있는 듯하다.
전망대 소극장에서 웅장한 록키의 사계절을 감상하며 언 몸을 녹이고 밴프를 가로지르는 보우강으로 향했다. 1954년 ‘돌아오지 않는 강(River of No Return)'이 촬영된 보우강과 폭포는 꽁꽁 얼어있었다. 그 옛날 인디언의 습격을 받으며 뗏목에 의지해 격류를 타던 케이(Marilyn Monroe)와 매트(Robert Mitchum) 그리고 마크(매트의 아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돌아오지 않는 강이라 불리는 강이 있지요. 때로는 평화롭지만 때로는 사나운 폭풍우가 불기도 해요. 사랑은 그 강물 위의 여행자. 때로는 이리저리 휩쓸리다 영원히 폭풍의 바다로 사라지기도 하지요---”
영화에 흐르는 마리린 먼로의 애절한 노래와는 달리 굴곡진 삶을 이겨내고 사랑을 찾은 두 사람이 지금도 록키 계곡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만 같다. 보우강에서 또 한 편의 영화 ‘One Week’ 의 주인공 벤(Joshua Jackson)을 만난다. 암 말기 죽음의 공포 앞에서 자신의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벤의 고뇌가 아프게 그려진다. 밴프 샤또 페어몽 호텔 발코니에서 벤 등 뒤로 바라 보이던 장엄한 록키와 유유히 흐르던 보우강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해설이 감동으로 기억된다. “여행이 치료보다 더 뜻 있다는 확신은 훌륭한 선택이다. 여행 중에 세상 이치가 확신에 차 와 닿는 순간을 만날 때 그 순간을 흘려보내선 안 된다. 바로 그 순간이 계속되는 힘든 나날의 구명보트 같은 존재가 될 테니까. 만일 당신이 하루, 일주일, 아니 한 달밖에 살 수 없다면,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누구를 만날 것이며 누구에게 당신의 사랑을 전하고 싶은가 그리고 당신은 어떤 소망을 이루고 싶은가...?”
빙판길을 저속으로 달려 요호 국립 공원의 에메랄드 호수에 닿았다. 한 길 넘는 눈 속에 호수는 꽁꽁 얼어있고 숲속 나무들과 높은 산들---, 온 세상이 모두 새하얗다. 흰 웨딩드레스에 밍크 숄을 두른 신부가 신랑의 보살핌을 받으며 실란트로(Cilantro on the Lake) 웨딩 홀을 나서고 있다. 그들은 호숫가에서 순백의 설경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나는 어여쁜 신부와 준수한 신랑의 더없이 행복한 모습을 보며, 그들의 사랑의 맹세를 짐작해 본다. ‘때로 육체에 가해지는 고통은 영혼을 더욱 단련시켜 우리는 고통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두 사람 진심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선하게 대할 것을 굳게 약속합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만들어가는 관계 속에서, 우리는 더 높은 곳으로 자유롭게 비상할 것입니다.’
나는 아름다운 두 사람과 설경을 마음에 담으며, 느린 뒷걸음으로 차를 향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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