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겨울 록키가 전하는 말

조정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8-03-26 13:54

조정 / 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회원
일상의 블랙홀을 벗어나 길을 나서는 일은 나를 비우는 동시에 채우는 일이다. 긴 시간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 눈길을 줄 때면, 번잡한 일상의 산란했던 마음이 어느새 고요해진다. 때론 길동무와 정서적 교감을 갖기도 하고 낯선 여행지에서의 자유로움에 마음이 설레기도 한다. 어느새 여행은 건조하게 되풀이되던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투란도트에게 보이던 칼라프 왕자의 열정이 사라져버린 칠순의 여행객도 그윽한 눈빛으로 은발의 아내를 카메라에 담는다.

 빙하기의 얼음층으로 덮여 함부로 가까이할 수 없는 캐나다 록키는 비씨 주 북동쪽에서 알버타 주 내륙까지 1450Km를 내달리며 그 위용을 뽐내고 있다. 슈스왑 호숫가 샐몬 암을 지나 골든에 도착하니 길고 긴 차량 행렬이 트랜스 캐나다 하이웨이에 줄지어 서 있다. 다행히 눈사태로 한동안 통제되었던 도로가 방금 해제되었다고 한다. 골든의 경사진 산과 깊은 계곡을 지나는 로저스 패스는 많은 강설량으로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눈사태로 인한 대륙 횡단 철도의 피해를 막기 위해 산자락에 잇대어 설치한 터널들이 눈에 많이 띈다. 차가 구불구불한 계곡의 내리막길을 저속으로 움직일 땐 깊게 심호흡을 하며 눈을 꼭 감는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 일어날까 불안해 하며, 반복되던 일상의 사소함이 평온한 축복이었음을 깨닫는다. 드디어 늦은 밤, 카나나스키스 리조트(Kananaskis Resort)의 야외 온천에서 긴장을 풀며 남은 일정을 점검해 본다. 다음날, 곤돌라를 타고 밴프의 설퍼산(Sulphur Mt.) 정상에 올랐다. 순백의 캐스캐이드산(Cascade Mt.)봉우리에 걸쳐있는 구름은 수목의 한계선과 빙하의 경계에서 더욱 아름다운 비경으로 다가온다. 2천 5백만 년 전 이 일대의 바다 밑 암석층이 대빙하에 밀려 지각 변화를 겪던 장면을 상상해 본다. 장중한 베토벤 프로메테우스 서곡의 환청 속에 잿빛 하늘과 거대한 암석층이 융기와 침식을 거듭하는 초자연의 혼돈이 그려진다. 멀리 고봉의 위엄을 갖춘 해발 3000m에 가까운 잉글리스말디산(Inglismaldie Mt.), 피치산(Peechee Mt.), 런들산 (Rundle Mt.)들은 난공불락의 흰 성벽처럼 밴프를 둘러싸고 있다. 이 산 저 산에서 “의로운 영혼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신들의 메시지가 저 아랫마을 밴프로 퍼져 나가고 있는 듯하다. 

 전망대 소극장에서 웅장한 록키의 사계절을 감상하며 언 몸을 녹이고 밴프를 가로지르는 보우강으로 향했다. 1954년 ‘돌아오지 않는 강(River of No Return)'이 촬영된 보우강과 폭포는 꽁꽁 얼어있었다. 그 옛날 인디언의 습격을 받으며 뗏목에 의지해 격류를 타던 케이(Marilyn Monroe)와 매트(Robert Mitchum) 그리고 마크(매트의 아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돌아오지 않는 강이라 불리는 강이 있지요. 때로는 평화롭지만 때로는 사나운 폭풍우가 불기도 해요. 사랑은 그 강물 위의 여행자. 때로는 이리저리 휩쓸리다 영원히 폭풍의 바다로 사라지기도 하지요---” 

영화에 흐르는 마리린 먼로의 애절한 노래와는 달리 굴곡진 삶을 이겨내고 사랑을 찾은 두 사람이 지금도 록키 계곡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만 같다. 보우강에서 또 한 편의 영화 ‘One Week’ 의 주인공 벤(Joshua Jackson)을 만난다. 암 말기 죽음의 공포 앞에서 자신의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벤의 고뇌가 아프게 그려진다. 밴프 샤또 페어몽 호텔 발코니에서 벤 등 뒤로 바라 보이던 장엄한 록키와 유유히 흐르던 보우강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해설이 감동으로 기억된다. “여행이 치료보다 더 뜻 있다는 확신은 훌륭한 선택이다. 여행 중에 세상 이치가 확신에 차 와 닿는 순간을 만날 때 그 순간을 흘려보내선 안 된다. 바로 그 순간이 계속되는 힘든 나날의 구명보트 같은 존재가 될 테니까. 만일 당신이 하루, 일주일, 아니 한 달밖에 살 수 없다면,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누구를 만날 것이며 누구에게 당신의 사랑을 전하고 싶은가 그리고 당신은 어떤 소망을 이루고 싶은가...?”

 빙판길을 저속으로 달려 요호 국립 공원의 에메랄드 호수에 닿았다. 한 길 넘는 눈 속에 호수는 꽁꽁 얼어있고 숲속 나무들과 높은 산들---, 온 세상이 모두 새하얗다. 흰 웨딩드레스에 밍크 숄을 두른 신부가 신랑의 보살핌을 받으며 실란트로(Cilantro on the Lake) 웨딩 홀을 나서고 있다. 그들은 호숫가에서 순백의 설경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나는 어여쁜 신부와 준수한 신랑의 더없이 행복한 모습을 보며, 그들의 사랑의 맹세를 짐작해 본다. ‘때로 육체에 가해지는 고통은 영혼을 더욱 단련시켜 우리는 고통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두 사람 진심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선하게 대할 것을 굳게 약속합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만들어가는 관계 속에서, 우리는 더 높은 곳으로 자유롭게 비상할 것입니다.’

나는 아름다운 두 사람과 설경을 마음에 담으며, 느린 뒷걸음으로 차를 향해 걸었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낙타 세 마리 2024.03.08 (금)
박정은 / 사) 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회원 복권이 윷놀이 상품으로 걸렸다. 구정을 맞아 주유소에서 일하는 한국인 직원들과 모여 윷놀이를 하는데, 남편이 복권을 상품으로 건 거였다. 주유소에서 복권을 팔기만 했지, 난 한 번도 복권을 사본 적이 없었다. 딱히 복권에 욕심은 없었지만, 그래도 기왕에 하는 윷놀이 열심히 해보지 싶었다. 열성껏 윷을 던진 결과 결국 몇 장의 복권이 손에 들어왔고, 난 그걸...
박정은
그리움 2024.03.08 (금)
최민자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전지를 갈아 끼워도 가지 않는 손목시계처럼 그는 그렇게 그녀라는 길 위에 멈추어 있다. 그녀와 관련된 기억들이 그에게는 여전히 아프고 쓰리다. 이별의 모서리는 언제나 날카로워 돌아볼 때마다 마음이 베이지만 그녀라는 모퉁이를 통과하지 않고 우회하는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다. 진한 눈썹, 둥근 이마, 상큼하면서도 허스키한 탄산수 음색이 생각나 아직도 심장이 쿵, 떨어져 내린다 하였다....
최민자
밤의 날개 2024.03.08 (금)
이영춘 / 캐나다 한국문협 수석고문고요가 조용히 날개를 펼칩니다팔랑이는 이파리처럼, 이파리의 날개처럼신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산비둘기들이 마을로 내려옵니다내려와 잠드는 내 집 처마 끝에달빛을 비춰줍니다고요의 숨소리가 들립니다달빛도 긴 그림자의 그늘을 접고나뭇가지에 어깨를 걸치고 앉아고요가 잠든 집을 지켜줍니다 고요가 조용히 일어나 잠들려는 나를살짝 깨웁니다눈뜬 별들의 바다가 깊습니다나도 살짝...
이영춘
송년엽서 2024.03.04 (월)
1년의 폭은 365미터비껴 간 10년, 또 10년 우리 까마득히 멀어져보이지도 들리지도 눈을 감아요깊숙이 자목련 한 그루씩 심어요 먼 날자색 빛 노을 물드는 저녁 바다 이편에서바다 저편에서 목련 꽃비만후두둑 후두둑
백철현
2024년으로 끝자리 숫자 하나가 바뀌며 엄청나게 쏟아지던 카톡의 홍수가 사라질 무렵에 나는 재미있는 톡 하나를 받았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새해 덕담으로 주고받는 톡이 아닌 새롭게 단장한 문인협회 산문 분과의 새 방장님이 쏘아 올린 첫 신호탄으로 그것은 푸른 용의 꿈틀거림처럼 잔잔하던 방안을 뒤흔들어 놓았다. ‘어린 왕자’의 여우 같은 존재가 되려고 한다는 신세대 방장님의 기발한 인사말과 함께 산문 방 한정 초미니 백일장을...
줄리아 헤븐 김
김밥 한 줄 2024.03.04 (월)
김밥 한 줄은 말줄임표(……)간단명료하다. 설명이나 사족을 붙이지 않는다. 말의 울림이다. 침묵으로 감정을 억누르고 있다. 함부로 말할 수 없어 가슴 속에서만 숨 띄는 함축언어이다.김밥 한 줄은 가장 간소한 한 끼이다. 30초 만에 차려진다. 김 한 장을 펴고 밥을 담은 다음 준비해둔 당근, 부친계란, 볶은 햄, 우엉, 시금치. 단무지를 넣고 말아 올리면 된다. 은박지를 깐 접시 위에 놓인 검은 김밥 한 줄….김밥 토막들은 대열을 벗어나지 않고...
정목일
새해 소원 2024.03.04 (월)
인생은 세월 따라 흐른다천천히 지나도 지나고 보니그 세월은 순간이었다인생은 머물지 않지만지나간 시간과 함께한소중했던 순간힘 겨워했던 시간모두 추억의 공간에 곱게 새겨져내 인생의 그림자가 되었다 많이 아쉽기도 했던 기억들함께 했던 즐거움의 흔적들같이 했던 시간 속의 기쁨들때론 야속하기도 한 아픔의 그 세월여러분을 만나서 여러분과 함께해서참 멋지고 행복한 좋은 시간이었다진심으로 고맙고 감사하다 2024년 또 다른 나의...
나영표
습작의 고뇌 2024.02.26 (월)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는다진통 끝에 나의 자궁에서 나온 글이 걸음마를 배운다안아달라고 칭얼댄다나에게 말을 걸어온다그 글에 옷을 입혀 세상 밖으로 보내본다지나가는 이들이 내 글을 보며 눈살을 찌푸린다잘 맞지 않는 옷을 입었다고 뒷얘기로 쑥덕거린다한 대 때리고 도망간다내 글이 운다내 마음이 차였다자랑스럽게 내보낸 나의 글은 그 흔한 목걸이 하나 없이누군가 길거리에 내던져 버린 옷을 걸쳐 입고 있었다그 글은 시체처럼 길거리...
김영선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