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최종수정 : 2018-02-05 10:01

박병호 / 한국문입협회 밴쿠버지부
그날 밤 집에 돌아온 청마는 우연의 일치 치고는 기막힌 일치라고 생각했다. 이사벨이 3개 국어를 말하는데 모두가 그가 꿈에 그리던 언어였기 때문이었다. 덴마크어, 영어, 그리고 그린란드어. 그의 아내는 남편에게 좋은 친구가 생겼다는 자체는 환영했으나 걱정거리 하나는 남겨두었다. 그녀가 자기 자리를 위협할 사람이 아니라는 남편의 암시는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한 감정표현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남편의 태도는  완전한 위안이 될 수 없었다. "아무튼 당신이 수십 년 내 남자친구들도 존중해 주었기 때문에 나도 보답은 해야지? 이사벨이 당신의 좋은 친구가 되면 좋겠어. 나는 음성으로 내면을 보는 안목이 있으니 언제 나와 전화 한통 할 수 있게 해줘. 여느 사람들처럼 잡채 좋아하면 집에 한번 초대하고." 짐작은 했지만 아내가 생각보다 더 쉽게 반응한 것에 대해 큰 기쁨은 아닐지라도 자신과 이사벨의 그린란드 왕국건설이 순탄하게 이루어질 것 같았다.
 
그날 밤 이사벨의 남편은 아내가 걸어오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두 가지가 아닌 일치가 한 번에 터진 다는 것이 우연이야? 동양인들은 영리해서 우연으로 짜 맞춰 접근 했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고." "나에게 당신이 조심하라 마라 말할 자격이나 있어요?" 청마처럼 당신이 나에게 그렇게 긴 말을 웃음 자아내게 하며 해준 적 있었냐고. 나는 그가 설령 짜 맞춘 우연으로 나에게 목적을 갖고 접근했다 할지라도 그를 믿을 거야. 웃음을 되찾게 해 주었으니. 기획적 만남이었다면 그 노력까지 더 감사할 거야. 내가 사랑에 빠진다 해도 그를 원망하지 마. 당신이 나와 이혼은 안 할 거라면, 그래도 법적인 부인인 나의 몸과 마음이 점점 상해지는 것보다 상한 몸과 마음을 치료해주는 이를 껴안아야 하지 않을까? 내가 당신이라면 한 번 초대해서 감사의 와인이라도 부딪쳐야 한다고 했을거야." 둘의 관계는 여전히 그린란드의 큰 빙산처럼 냉랭했다.
 
청마의 영어가 부쩍 늘어 영어가 사전에 몸을 얼어붙게 하진 않았다. 덴마크어를 가르쳐 달라고 말 할 수 있는 날도 언젠가는 올 거라고 생각했다. 이사벨은 그를 만날 시간이 기다려졌다. 다시 부족한 철분을 채울 식이요법을 시작했다. 같은 한국인이자 나이든 남성인 둘이 어쩌면 그렇게 차이가 나는지 궁금했다. "인준은 정말 내 영어를 형편없게 생각했을까? 자신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선생 탓으로 돌린 것이 그의 성격 때문일까?" 사실 자신보다 열 살도 더 들어 보이는 인준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좋은 학생으로 생각했던 이사벨이었다. 살 빼려는 생각을 던져버리고 청마가 말한 보름달이 되고 싶었다. 한국이란 나라에 왕조가 재 탄생한다면 둥글고 큰 보름달같은 왕비가 되고 싶었다.
 
어렸을 때 아버지를 돕느라 손에 밧줄의 힘을 견디어 낸 자국이 더 이상 상처가 아니었다. 바다를 물려받은 것처럼 다가왔다. 그린란드 땅에 대한 그리움은 얼음 땅이 꽃과 야채와 과일로 뒤 덮인 생산의 땅으로 변신해 기대가치가 더해져 왔다. 원래의 그녀처럼 항상 젊고 명랑한 여인으로 돌아온 듯 했다. 남편을 끌고 빙하가 보이는 둔덕으로 올라가고 싶었다. 노아의 방주 같은 크고 튼튼한 배를 타고 그린란드로 가고 싶었다. 그러나 남편 캔에게 그린란드 독립이야기를 해 본적이 없었다.
 
이사벨은 덴마크보다 캐나다를 좋아했었다. "아니야 이젠."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혼자말했다. "난 이제 떠날 수 있어 재수 있는 학생을 만났으니까. 25년 동안 쓸만한 놈 하나 낚지 못했는데 이제야 낚았어. 노인과 바다의 늙은 산티아고가 낚은 청새치보다 더 대물임이 분명해, 게다가 이놈은 상어에게 뜯겨 먹히지도 않을 거야. 그를 낚지 못했다면 내 꿈을 실현시킬 생각도 못했어." 부슬부슬 비 오는 날 수업이 끝나고 퇴근길에 둘은 이사벨의 차에서 만났다. 이후에도 집이 같은 방향이라 비 오는 밤 간혹 집에까지 바래다 주는 그녀의 호의를 그가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다. 조수석에 앉은 청마에게 이사벨이 벤쿠버 집 값 폭등을 비판하며 말을 걸었다.
 
"지난 3년 동안 집 값이 얼마나 올랐는지 잘 알지요?" 그녀가 살고 싶었던 넓은 정원과 닭을 키울 정원이 있는 단독주택을 이젠 절대로 살수가 없게 된 것은 정부 탓이었다. "맞아, 보수의 탈을 쓴 신민당 정부 탓이야. 빌어먹을. 리치몬드와 칠리왁을 30분만에 주파하는 고속전철하나 만들면 집값 폭등은 끝이 날 텐데." 그것으로도 안잡히면  칠리왁역, 랭리역에 신도시 하나씩 만들면 되고." 청마가 거들었다.
 
빗길을 조심해서 운전했으나 차는 벌서 퀸 엘리자벳 공원을 지나고 있었다. " 잘 아는 스시집이 근처에 있는데 먹고 갈까요?" 이사벨이 청마를 돌아보며 눈을 꿈쩍했다. "예, 그래요." 청마는 잠시도 쉬지 않고 이사벨에게 말을 걸었다. 언젠가 빙하가 떠다니는 바닷가 테라스에서 빙하수로 만든 맥주를 한잔 하고 싶어요. 이사벨과 캔과 아내 수빈과. 그리고 내가 기른 닭이 달려 다니며 낳은 그린란드 청란과 연어로 오므라이스를 만들고 싶어요. 물론 우리가 재배한 콜리플라워, 그린란드 초절임 고래고기도 함께 곁들고 싶습니다."  "좋지요!" 이사벨이 발그레한 얼굴로 환호했다.
 
다음해 여름 그날은 원래 여름이라 해도 하루에도 열두 번도 더 바뀌는 변화 무쌍한 파미르고원 같은 바다가 당분간 며칠은 환한 햇살의 화창한 날씨를 예고하고 있었다. 날씨만큼이나 화사한 두 얼굴, 변화 무쌍한 한 얼굴, 그리고 어둠이 짙게 드리운 또 한 얼굴로 구성된 그들 넷이 뱃길을 나서기 위해 와 있는 이 곳은 누나부트 준주 주도 이칼루이트였다. 동쪽으로 항해해서 그린란드 수도 누크로 가기 위해서였다. 캔이 여전히 불만이 남아있었지만 대세에 따라가지 않으려면 그가 그렇게 싫어하는 이혼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마지 못해 따르고 있었다.
 
바다가 보이는 한 주점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바람이 북동쪽에서 불어올 때면 정어리 공장에서 암모니아 냄새가 풍겨왔다. 테라스에는 햇볕이 잘 들어 기분이 좋았다."이사벨," 청마가 불렀다. 그녀는 맥주잔을 든 채 옛날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가서 그린란드에서 먹을 정어리랑 식품들 좀 구해 올까요?" 청마가 제안했다. "아니야, 당신은 캔과 함께 여기 있어요. 수빈과 내가 갔다 올게요." 이사벨은 햇볕에 적당히 그을린 얼굴을 들더니 자신만만해 하며 말했다. 부자연스럽게 자애로운 모습을 띠고 청마와 캔을 연신 번갈아 쳐다보며 두 남자의 분위기를 살피는듯했다.
 
이사벨과 청마는 언제고 희망과 자신감을 버린 적이 없었다. 오래지 않아 바람이 미풍으로 바뀌었다. 희망과 자신감이 더욱 넘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둘은 조류가 이대로만 유지 된다면 내일은 출항 할 수 있겠다 싶었다. 바람이 동풍으로 바뀌면 단박에 누크까지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까지 온 것도 쉽지 않은 길이었다. 수빈이는 자신이 운전하지 않은 모든 탈 것에 대해 멀미를 해왔고 캔은 틈만 있으면 투덜댔다. 육중한 몸이 차문에라도 슬쩍 부딪치기만 해도 "퍽.퍽." 하며 욕인지 뭣인지 모르는 짧은 된소리를 쏟아냈다. 커누를 타기에는 캔의 몸이 너무 육중해서 일행은 모터달린 소형 보트를 타는 것으로 바꾸었다. 커누는 사실 이사벨의 오랜 로망이었었다. 그녀는 선조들이 아이슬란드에서 커누를 타고 뉴펀들랜드로 왔다는 할머니의 말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사벨과 수빈이 배가 표류했을 경우를 대비해서 몇 주일도 더 넘게 먹을 량의 식품과 식수를 사왔다. "쉰 살이 넘은 늙은 탐험대를 하늘이 도와 주지 않을 수도 없을 거야. 이렇게 바람이 잠잠해진 것 보면." 캔과 청마를 보자마자 이사벨이 여전히 오묘한 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게다가 청마를 봐서도 그래. 그가 원래 좀 특이하게 하늘이 사랑한 사람이니까." 수빈이 청마가 어려서 죽다 살아난 이야기가 두 가지나 된다며 거들었다. "참 우린 정말 큰 파도나 상어의 공격도 이겨 낼 만큼 힘이 남아 있다고." 청마가 캔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때려눕히듯이 으시댔다. "아마 그럴 거야. 그리고 캔도 알고 보면 사실 여러 응급상황에 대처하는 요령도 알고 있어." 이사벨이 캔을 추켜 세우듯 말했다. "짐들을 내가 배로 나르지요." 기분이 좋아진 캔이 말했다. "함께 합시다. 그리고 투망을 가지고 정어리를 잡으로 갑시다!" 청마가 캔을 따라서며 말했다.
 
청마와 캔은 배에서 고기잡는 도구를 집어 들었다. 청마는 배안에서 단단히 꼰 낚싯줄이 들어 있는 나무 궤짝과 창 달린 작은 작살과 낡은 투망 한 자루를 집어 들었다. 배의 아래쪽에 내려간 캔은 미끼가 들어있는 통과 작은 몽둥이를 가지고 나왔다. 그 몽둥이는 혹시나 생각보다 큰 물고기가 걸려들었을 때 날 뛰는 고기의 힘을 빼기 위해 기절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바닷가로 한참 걸어 갈색 통나무집으로 올라가서 열린 문으로 들어갔다. 둘은 우선 몽둥이와 작살을 이누이트족의 액세서리들이 걸린 벽 한쪽에 기대어 놓고, 다른 도구들을 그 밑에 놓아 두었다. 작살과 몽둥이는 그 통나무집의 천정 높이만큼 높았다. 길다기보다 통나무집의 천정이 낮은 집이었다.
 
통나무집은 '슈거색'이라고 부르는 통나무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집이었다. 이누이트족이 단풍나무의 수액을 모아 끓이는 설탕 통나무집이었다. 아궁이와 가까운 어느 한 면의 중간 아래 부분은 좀 심하게 바래서 까만 색을 띄고 있었다. 방에는 침대 하나와 테이블 하나 그리고 의자 하나가 덜렁 놓여 있었다. 그리고 땅바닥에는 장작을 아궁이에 집어 넣어 불을 피워 음식을 만들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뭐 좀 먹고 싶지요? 코리안 전통스시와 주먹밥이 있고 김치 팬케익이 있어요." 수빈이 말했다. "여기 식초에 절인 청어요리 하링과 올리브절임 그리고 피자가 있어요." 이사벨이 꺼내며 말했다. "여기도 있네요." 닭 앞가슴살 통조림과 마른 알버타 쇠고기 육포를 꺼내면서 캔이 말했다. "이건 스뫼레브뢰 호밀빵 샌드위치예요. 그린란드에 살려면 이 맛 정도는 미리 길들여야 할 거예요." 언제 준비해 뒀는지 청마가 꺼내며 말했다.
 
"둘은 여기 있어요. 청어든 정어리든 며칠 먹을 분량만 잡아서 얼음에 채워 놓은 다음 바로 돌아올게요." 캔과 청마가 문을 열고 나갔다. "돌아오면 우리 둘이 무슨 재미있는 얘기를 나눴는지 들려줄게요." 이사벨이 두 남자의 등뒤에 대고 말했다. 그리고 한참 후 돌아왔을 때 두 여자는 하나의 의자에 함께 앉은 채로 잠들어 있었다. 이미 해도 진 후 였다. 청마는 자기의 체온을 나누어 주려는 듯 자기 검은 털옷을 벗어 수빈의 몸에 둘러 주었다. 그것을 본 캔도 묵은 가죽 옷을 벗었으나 이사벨의 몸이 아니라 어깨에 던지듯   감싸 주었다.
 
늙어 처져가는 어깨임이 분명한데도 아직 튼튼한 여성으로 착각하고 있는 여자, 척박하고 강풍이 내리는 그린란드에 새 나라를 세우겠다는 여자가 밉다가도 남자로서의 여자에 대한 일말의 보호본능 같은 게 남아 있었다. 머리를 떨구고 잠들어 있는 뒤 목덜미는 아직 희고 탱탱해 보였지만 아랫배에 나온 뱃살은 그녀의 나이를 속일 수 없었다. 두 남자는 각자의 부인 옆에서 좀 떨어져 자리를 잡았다. 고기 잡을 때는 여름 밤이 좀 춥기는 했어도 한기를 느끼지 않았으나 금새 몸을 녹이는 잠에 빠져 들었다. "캔, 청마, 이제 그만 일어나세요." 이사벨이 두 남자의 한쪽 어깨씩 양쪽 어깨 위에 손을 올려 놓으며 깨웠다. 캔은 눈을 뜨고도 먼 꿈나라에서 현실로 되돌아 오느라고, 청마는 마음의 눈은 떴으나 떠지지 않는 육체의 눈으로 인해 한참이나 걸렸다. <3>편에 계속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개똥 통장 2024.02.21 (수)
나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 계좌가 하나 있다. 이 계좌 잔고의 정확한 액수는 사실 계좌주인 나도 잘 모른다. 그 액수를 도통 모르는 점이 실은 매력적인데, 그 이유는 글을 다 읽고 나면 알게 되실 것이다. 수시로 적립이 되는 것만은 확실하며, 이 계좌를 개설한 지는 대략 삼년 정도가 되었다. 오늘부로 만천하에 공개하는 이 비밀 통장은 이름하여 ‘개똥 통장’이라 한다. 누구든지 손쉽게 계좌를 열 수 있다. 그동안 나만 알고(최측근 언니들 몇...
김보배아이
  우리 부부는 아들 하나를 키웠고 손주가 3명 있다. 손주로는 쌍둥이 손녀에게 3년 아래로 손자가 하나 있다. 쌍둥이 손녀는 올해 14살이 되었고 손자는 6월이 되면 11살이 된다. 손녀들은 7학년까지는 학교 공부를 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모르게 지내더니 8학년에 올라가니 심각해진 모습이 보인다. 손자 녀석은 여전히 학교 공부하는 눈치가 전혀 안 보인다. 주간 동안 하루는 방과 후에 아이들을 픽업하는 것은 우리 몫이다. 픽업하면서 손자에게...
김의원
대관령 양 떼 목장에 눈이 내린다영하 13도의 추위 속목장 언덕에 눈이 쌓이고돌풍 바람은 눈보라를 일으키며뿌연 안개를 뿌린다뺨을 때리는 눈보라로 얼굴이 얼얼하다뒤로 돌아서서 바람을 막아보지만앞으로 곤두박질 치고 만다전날 내린 비로 나뭇가지마다물방울이 얼어서 유리 구슬이 트리처럼 달리고세찬 바람에 꺾어진 가지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닌다아래를 보나 위를 보나멀리 보나 가까이 보나 하얀 눈의 세계몸이 휘청 거리게 흔들어 대는...
조순배
  늙은 개와 70 이 넘은 늙은이는 그 성질을 바꾸지 못한다고 한다. 이는 아마도 그들의 사고나 생활 습관이 이미 오랫동안 굳어지면서 그걸 고치기가 매우 힘들다는 이야기 인 듯하다. 필자의 경우도 새벽 2시 경이 되어야 겨우 잠자리에 드는 나쁜 습관을 옆에서 바꾸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마이동풍이다. 마찬가지로 상대가 하는 행동이나 말이 내 마음에 안 들어도 웬만하면 그냥 접고 만다. 특히 정치 이야기나 종교 이야기가 나오면 아무 소리...
정관일
하루를 다독인다 2024.02.12 (월)
하늘에 먹구름 한 점이 맘에 짙게 내린 어스름 같아바람이여 가져가라 했는데바람이 더디 온다고 구름은들먹들먹 울고 있다홀로 쏟는 속 울음이그리 쉬이 강이 되어 흐를 수 없어언젠가 올 바람을 기다리며두 손 모아 축축한 무릎그렁그렁 눈물로 씻는다마음에 창 하나 그려하늘가에 열어 놓고알몸으로 굴러야 했던 하루를바람결 이랑이랑 애절히 묻고가슴 비벼 문지르며썩어라, 아픔도 잘 썩으면꽃으로 피어나리버거웠던 하루를 다독인다
한부연
시인의 뜨락 2024.02.12 (월)
허퉁할 때 들여다보는 비밀의 뜨락이 있다몸집 가녀린 진달래가 머리숱 돋은 반송을 두르고실팍한 일본단풍 뒤 키만 껑충한 설악산 단풍나무 새강아지풀 같은 입술 내민 양버들까지다들 고꾸라질 듯 앞으로 몸을 내밀고 있다볕이 그리운 게다서녘볕이나마 온몸에 받고 싶은 게다고곡 방문길 노시인의 속주머니에 묻어와노수필가의 정성으로 틔운 고향 진달래병든 소설가의 퇴원길에 안겨온 희미한 분홍색 튤립제각기 다른 품, 다른 발길에...
김해영
전나무와 향나무 2024.02.12 (월)
   나무를 잘랐다. 앞마당에서 전나무와 함께 바람막이가 되어주고,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었던 향나무였다. 이사 왔을 때만 해도 둘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해가 지나 서로의 몸체가 불어나면서 향나무 가지가 전나무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향나무와 맞닿은 전나무 부분은 푸른색을 잃으며 죽어가고 있었다. 향나무를 진즉 다듬어 주어 서로의 간격을 마련해 주어야 했다. 나무에 대해 잘 몰랐던 무지함과 게으름의 결과였다....
민정희
광교산 계곡에서 출발해 소리 없이 흘러온 물이 수문 앞에 다다라 소용돌이쳤다. 태양이 서포루(화성 서측 성벽 위 2층 누각) 너머로 뚝 떨어지는 순간, 사나운 포성을 질렀다. 기울어지지 않고 평평하던 물이 일곱 홍예(화성의 북쪽 수문)를 지나 수직 낙하하며 갑자기 격정의 폭포수로 변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실개천보다 크고 일반 하천보다 작은 공간에 소망을 추구하는 사람, 우연의 재회를 꿈꾸는 사람들로 채워졌다. 꿈들이 모여 방주의 천정...
박병호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