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최종수정 : 2018-01-17 11:11

배꼽

박정은 / 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회원


한국에서 십여 년을 분만실 간호사로 일했었다. 분만 중에는 많은 응급상황이 발생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위급한 게 탯줄 문제이다. 아기는 엄마 뱃속에서 열 달을 한 몸으로 살지만, 사실 둘은 서로 붙어있는 게 아니라 겨우 가느다란 탯줄 하나로 연결돼 있을 뿐이다. 즉, 아기에겐 이 탯줄이 유일한 생명줄인 셈이다. 그런데 이 탯줄이 꼬이거나 눌려 막히게 되면 몇 분 안에 아기의 심장이 멎는, 그런 초응급 상황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 이유는 탯줄 안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아기가 나오자마자 탯줄을 자른 후, 간호사가 하는 일 중에 하나가 바로 이 탯줄을 살피는 일이다. 젤리 같은 미끈미끈한 하얀 보호막에 쌓인 국숫발 같은 두 개의 동맥과 한 개의 정맥을 찾기 위해서다. 아주 드물게는 심장에 문제가 있는 아기에게서 이 혈관 개수가 모자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자세히 탯줄을 살펴보면 정말 단순하게도 이 세 개의 혈관으로만 이뤄져 있다. 엄마는 두 개의 동맥을 통해 아기에게 필요한 영양과 산소를 공급하고, 남은 한 개의 정맥으로 아기의 노폐물을 빼내준다. 이처럼 혈관을 통해 먹을 것을 주고, 동시에 노폐물을 받아내며 엄마는 뱃속에 든 아기를 키운다. 하지만 아기가 태어남과 동시에 탯줄은 잘려지고, 쓸모없어진 혈관은 차츰 퇴화되어 그 흔적만 남게 되는데, 그게 바로 배꼽이다.  
세상에 나온 아기는 이제 스스로 숨을 쉬고 먹고 싼다. 정확히 말하면 아기 몸이 이런 기능을 할 수 있다는 거지 완전 독립체로 살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여전히 부모가 먹이고 똥오줌 가려줘야만 살 수 있다. 이처럼 출생 후에도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탯줄이 연결돼 있다. ‘자기 숟가락 물고 나온다’라는 옛 말이 있다. 자기 먹을 건 알아서 갖고 태어난다는 말인데, 이젠 누구도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 듯 하다. 요즘처럼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는 경쟁력을 갖춘 사람만이 살아남는다. 한마디로 부모의 뒷바라지가 없으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래서 요즘 부모들은 자식들이 경쟁력을 갖추도록 좋은 음식, 환경, 교육, 기회 등등 최고의 것들을 공급하려 다들 동분서주하는 듯하다. 그러다 보니 우리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풍요롭게 자라는 아이들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문제는 많아 보인다. 아이들이 문제가 있을 때마다 많은 부모들은 뭘 덜해줘서 그런가? 혹시 부족한 뒷바라지 탓인가 싶어 전전긍긍해 한다. 사실 공급은 과잉이면 과잉이지 절대 부족한 거 같진 않다. 그럼 원인이 뭘까 생각할 때 다시 원점인 배꼽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자식과 연결된 보이지 않는 탯줄을 살펴볼 시간이다. 아이들은 영양분도 필요하지만 여전히 성장하면서 생기는 노폐물도 빼줘야만 한다. 하나라도 더 주려고 너무 열심히 일만 하느라 혹시 불안, 두려움, 좌절 등 아이들이 겪는 이런 고민들을 들어주고, 그들의 성장통을 어루만져 줄 시간이 없었던 건 아닌지, 그래서 그 찌꺼기가 쌓이고 쌓여 정맥이 꽉 막혀버린 건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얼마 전, 휴가를 마치고 병원에 근무를 나갔는데 평소 친하게 지내던 할머니가 임종간호를 받고 있었다. 황급한 마음에 환자인계를 받자마자 할머니 병실부터 달려갔다. 병실에 들어서 보니 할머니는 가녀린 몸을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 난 조용히 다가가 할머니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다리를 살폈다.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버린 푸르스름한 발이 보였다. 장딴지 근육 아래 있는 정맥이 막혀 더 이상 발로 피가 가질 않았다. 이처럼 혈관이 막히면 그 주위의 조직은 모두 죽어버린다. 괴사가 시작된 종아리 아래를 잘라내야만 살 수 있는데, 할머닌 그런 수술을 견뎌낼 수 없는 상태였다. 싸늘히 식어버린 다리에 이불을 덮어주는 것밖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할머닌 정맥 하나가 막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혈관은 어디든 막히면 죽음을 부른다. 그게 노폐물을 나르는 정맥이라도 마찬가지다. 보통 맥박이 만져지는 건 동맥이지 정맥이 아니다. 심장이 펌프질을 해주니 영양분을 실은 피가 힘차게 달리는 곳이 동맥이다. 그렇게 달려가 다 퍼주고 노폐물을 받아 돌아오는 정맥에선 아무래도 힘이 달려 맥박도 안 만져진다. 그러다 보니 특히 아래쪽에 있는 다리 정맥은 피떡으로 막히기가 쉽다.
부모노릇도 이와 마찬가지인 듯하다. 그냥 본능적으로 자식에게 하나라도 더 주려고 죽을힘을 다하는 게 부모다. 그런데 거기다 힘을 너무 써버린 나머지 막상 노폐물을 빼줘야 할 때는 힘이 달려 소홀해지고 마는 것 같다.
아무리 공급을 잘해도 찌꺼기를 안 빼주면 아이들은 잘 자랄 수가 없다. 신이 인간을 만들 때 모든 혈관을 피부 아래 숨겼으면서 왜 배꼽만 밖으로 빼놨을까? 어쩌면 딱 배꼽처럼 부모노릇을 하라고 신이 인간에게 찍어둔 낙인일지도 모르겠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개똥 통장 2024.02.21 (수)
나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 계좌가 하나 있다. 이 계좌 잔고의 정확한 액수는 사실 계좌주인 나도 잘 모른다. 그 액수를 도통 모르는 점이 실은 매력적인데, 그 이유는 글을 다 읽고 나면 알게 되실 것이다. 수시로 적립이 되는 것만은 확실하며, 이 계좌를 개설한 지는 대략 삼년 정도가 되었다. 오늘부로 만천하에 공개하는 이 비밀 통장은 이름하여 ‘개똥 통장’이라 한다. 누구든지 손쉽게 계좌를 열 수 있다. 그동안 나만 알고(최측근 언니들 몇...
김보배아이
  우리 부부는 아들 하나를 키웠고 손주가 3명 있다. 손주로는 쌍둥이 손녀에게 3년 아래로 손자가 하나 있다. 쌍둥이 손녀는 올해 14살이 되었고 손자는 6월이 되면 11살이 된다. 손녀들은 7학년까지는 학교 공부를 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모르게 지내더니 8학년에 올라가니 심각해진 모습이 보인다. 손자 녀석은 여전히 학교 공부하는 눈치가 전혀 안 보인다. 주간 동안 하루는 방과 후에 아이들을 픽업하는 것은 우리 몫이다. 픽업하면서 손자에게...
김의원
대관령 양 떼 목장에 눈이 내린다영하 13도의 추위 속목장 언덕에 눈이 쌓이고돌풍 바람은 눈보라를 일으키며뿌연 안개를 뿌린다뺨을 때리는 눈보라로 얼굴이 얼얼하다뒤로 돌아서서 바람을 막아보지만앞으로 곤두박질 치고 만다전날 내린 비로 나뭇가지마다물방울이 얼어서 유리 구슬이 트리처럼 달리고세찬 바람에 꺾어진 가지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닌다아래를 보나 위를 보나멀리 보나 가까이 보나 하얀 눈의 세계몸이 휘청 거리게 흔들어 대는...
조순배
  늙은 개와 70 이 넘은 늙은이는 그 성질을 바꾸지 못한다고 한다. 이는 아마도 그들의 사고나 생활 습관이 이미 오랫동안 굳어지면서 그걸 고치기가 매우 힘들다는 이야기 인 듯하다. 필자의 경우도 새벽 2시 경이 되어야 겨우 잠자리에 드는 나쁜 습관을 옆에서 바꾸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마이동풍이다. 마찬가지로 상대가 하는 행동이나 말이 내 마음에 안 들어도 웬만하면 그냥 접고 만다. 특히 정치 이야기나 종교 이야기가 나오면 아무 소리...
정관일
하루를 다독인다 2024.02.12 (월)
하늘에 먹구름 한 점이 맘에 짙게 내린 어스름 같아바람이여 가져가라 했는데바람이 더디 온다고 구름은들먹들먹 울고 있다홀로 쏟는 속 울음이그리 쉬이 강이 되어 흐를 수 없어언젠가 올 바람을 기다리며두 손 모아 축축한 무릎그렁그렁 눈물로 씻는다마음에 창 하나 그려하늘가에 열어 놓고알몸으로 굴러야 했던 하루를바람결 이랑이랑 애절히 묻고가슴 비벼 문지르며썩어라, 아픔도 잘 썩으면꽃으로 피어나리버거웠던 하루를 다독인다
한부연
시인의 뜨락 2024.02.12 (월)
허퉁할 때 들여다보는 비밀의 뜨락이 있다몸집 가녀린 진달래가 머리숱 돋은 반송을 두르고실팍한 일본단풍 뒤 키만 껑충한 설악산 단풍나무 새강아지풀 같은 입술 내민 양버들까지다들 고꾸라질 듯 앞으로 몸을 내밀고 있다볕이 그리운 게다서녘볕이나마 온몸에 받고 싶은 게다고곡 방문길 노시인의 속주머니에 묻어와노수필가의 정성으로 틔운 고향 진달래병든 소설가의 퇴원길에 안겨온 희미한 분홍색 튤립제각기 다른 품, 다른 발길에...
김해영
전나무와 향나무 2024.02.12 (월)
   나무를 잘랐다. 앞마당에서 전나무와 함께 바람막이가 되어주고,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었던 향나무였다. 이사 왔을 때만 해도 둘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해가 지나 서로의 몸체가 불어나면서 향나무 가지가 전나무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향나무와 맞닿은 전나무 부분은 푸른색을 잃으며 죽어가고 있었다. 향나무를 진즉 다듬어 주어 서로의 간격을 마련해 주어야 했다. 나무에 대해 잘 몰랐던 무지함과 게으름의 결과였다....
민정희
광교산 계곡에서 출발해 소리 없이 흘러온 물이 수문 앞에 다다라 소용돌이쳤다. 태양이 서포루(화성 서측 성벽 위 2층 누각) 너머로 뚝 떨어지는 순간, 사나운 포성을 질렀다. 기울어지지 않고 평평하던 물이 일곱 홍예(화성의 북쪽 수문)를 지나 수직 낙하하며 갑자기 격정의 폭포수로 변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실개천보다 크고 일반 하천보다 작은 공간에 소망을 추구하는 사람, 우연의 재회를 꿈꾸는 사람들로 채워졌다. 꿈들이 모여 방주의 천정...
박병호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