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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17-04-22 09:51

한국문협밴쿠버지부 회원기고/수필
그는 지하 주차장에서 처음으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9년 전 단독 주택에 살다 집 관리가 힘들어 아파트로 이사를 오고 난 뒤 며칠 안 되어서였다. 그는 이미 90이 넘은 노인이었다. 그는 당신의 주차 공간 옆에 주차하고 내리는 나를 유심히 쳐다봤다. 지팡이를 짚지는 않았지만, 걸음걸이는 결코 빠른 편이 아니었다. 그는 생면부지인 내게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자기 이름과 거주하는 호수를 먼저 말하였다. 두 번째 만나던 날 그는 내게 언제 한 번 같이 식사를 하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그와 처음으로 중국식 뷔페식당에서 식사하게 됐다. 식당에서 그는 종업원이건 주인이건 가리지 않고 꽤 긴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그들의 표정에서 얼른 다른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식당 주인은 그를 박사님이라고 불렀다. 그 후 그와 한 달에 한두 번 같이 식사를 하고, 같은 동 윗층에 살던 그의 집에도 종종 들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대화 속에 자연스럽게 그의 삶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는 1930년대 중국 난징에서 의과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그때 일본군의 침략으로 영국군 트럭을 타고 충칭으로 피난을 갔다고 했다. 그 후 영국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고 싱가포르로 가서 의사로서 모기 퇴치 운동을 펼쳤다며 그 당시의 빛바랜 전단을 보여 주었다. 또, 리콴유 수상의 독재에 맞서 정치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 개업의이던 그는 가족의 신변에 위협을 겪고 캐나다에 난민으로 왔다고 했다. 의사가 되고 캐나다에 오기 전까지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자동차 일주를 포함해 수많은 해외여행을 다녔다고 했다. 그는 특히 배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가서 거기서 유럽까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소련을 여행한 이야기를 자주 했다. 냉전이 한창인 1960년대 후반 일본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닿은 이후 그는 줄곤 KGB 요원에 의해 감시를 받았다고 했다. 당시 국제 정세로 보아 KGB가 첩자가 아닌가 의심할 만도 했다. 그는 크렘린 궁전 근처 호텔에서 단돈 1달러에 호텔 뷔페를 즐겼다며 40년도 더 된 식당 영수증을 종종 자랑삼아 내게 보여줬다.

그는 인도네시아 여행 길에서 같은 푸젠성 출신으로 현지에서 호텔을 경영하던 집안의 딸을 만나 결혼했다. 하지만, 캐나다에 온 후 몇 년이 안 돼 심장병을 앓던 아내를 잃고 30년 넘게 혼자 살아왔다. 그에게는 딸과 아들이 하나씩 있었다. 그러나, 딸도 10여 년 전에 암으로 먼저 보냈다. 그는 캐나다에 온 이후 부동산 중개인으로 일했다. 그러면서 낡은 집터를 딸에게 사 주어 집을 짓게 했다. 그래서, 딸 집의 한 층은 그의 물건이 있는 그의 공간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그가 딸도 없는 그 집에 가는 일은 일요 예배를 같이 보고 점심을 같이 먹는 일요일 몇 시간뿐이었다. 그를 닮아서인지 정치인이 된 아들과는 뜻이 맞지 않는다며 별로 왕래를 하지 않았다.

그것이었다, 그가 그렇게 면식이 있는 사람이건 나처럼 주차 공간이 붙어서 처음 보는 이웃이건 반갑게 이야기를 먼저 건네는 이유! 그는 외로웠다. 마시는 물의 양과 시간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모든 타인과의 만남도 일지로 적어 놓는 꼼꼼한 그는 대화를 나눌 상대가 필요했다. 그의 아파트는 침대와 소파를 빼고는 과거 의학 잡지부터 소소한 개인적 추억이 담긴 물건들로 꽉 차 있었다. 그는 내게 확실히 과거를 사는 노신사의 인상을 주었다.

아무튼, 혼자 사는 그의 집에 종종 들렸다. 그래서 그와 몇 시간씩 담화도 했고 먼지 가득한 바닥과 집안 곳곳을 청소도 해 주고 전구 교체 등 간단한 수리도 해 주었다. 미국에도 그의 차를 내가 운전해 몇 차례 그가 좋아하는 뷔페를 즐기러 갔다. 아흔이 넘었지만, 집에서는 시리얼과 식료품점에서 사 온 간편식만으로 식사하기 때문인지 그의 식욕은 젊은이만큼 왕성했다. 그래서 가끔 아내가 한국 전통 음식을 하면 그와 같이 나눠 먹기도 했다.

그렇게 4년을 그와 친구처럼 지냈는데 어느 날 그가 신발도 못 신고 급히 우리 집에 내려왔다. 그는 누가 돈과 운전면허, 그리고 차 열쇠를 집어 갔다고 했다. 그래서 그와 같이 ICBC에 가서 운전면허를 재교부받고 은행에도 가서 돈도 찾을 수 있게 도왔다. 그런데, 몇 주가 지나지 않아 똑같은 상황이 재현됐다. 다시 운전면허를 받고 은행도 갔다. 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니 손자가 와서 그렇게 하는 것이란다. 그러니, 경찰에 신고할 수도 없고. 95세를 넘긴 그가 운전하는 게 위험하다고 못 하게 하고 그를 시니어 홈에 거주하게 하려는 것 같았다. 그는 그것이 못마땅했다. 그는 내게 도움을 청했지만, 그의 안전이 달려 있고 그의 가족 일이기에 섣불리 개입할 수 없었다. 그 후 몇 주 지나지 않아 집 전화와 휴대 전화 둘 다 통화가 되지 않았고 그의 집 현관문을 두드려도 더는 응답이 없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아들 식구들이 그를 아파트에서 모셔나갔다고 아파트 관리인이 말했다. 그리고는 그와의 연락이 끊어지고 말았다.

지금 그가 살아있다면 우리 나이로 100세이다. 걸음이 느리지만 아무 지병도 없다며 약을 한 가지도 복용하지 않는다던 그였다. 매일 밤 영어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하고, 다시 영어로 번역하며 뇌기능을 유지하던 그였다. 내가 이민 왔던 초기에 옆집의 일흔을 넘긴 노부가 성심껏 친구처럼 캐나다 생활에 서툰 나를 도와주고 서로 방문해 이야기를 나눴던 것처럼 95세의 그도 나를 손아랫사람이 아니라 친구로 대해 주었다. 그분들과의 교류를 통해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주와 친구처럼 지내듯이 나이 차이가 크게 나더라도 서로 이해하고 위안이 되는 친구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체감했다.

나의 100세 친구인 그는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비록 이제는 연락할 길이 없지만, 그가 건강하고 행복한 여생을 보내길 소망한다. 몇 시간이고 살갑게 얘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이들을 많이 만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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