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구례 '운조루'에서

조정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7-06-24 08:51

한국문협밴쿠버지부 회원기고/수필
봄날 지리산을 향해 달리는 산과 들의 대기 속에는 생명의 에너지가 가득했다. 수목들의 푸르름 사이로 산벚꽃이 뭉게 구름 처럼 피어있고, 산비탈 바위틈에선 연분홍 진달래가 수줍게 고개를 내밀었다. 친구와 차창 밖 풍경에 고향의 봄을 묵묵히 오버랩할 때, 어린 시절의 기억들은 마치 꽃송이처럼 우리 가슴에 새롭게 피어났다.
서울에서 4시간을 달려 도착한 구례 화엄사(신라 진흥왕 5년 창건)에는 국보로 지정된 각황전과 석등, 사 사자삼층석탑 그리고 영산회괘불탱 등 많은 보물이 천년 도량의 질서 잡힌 공간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봄비가 그친 후, 산사에는 마음의 자유자재를 얻은 노 스님의 독경 소리와 삶의 오만과 번뇌를 지우기 위한 불자들의 기도 소리가 대숲에 메아리쳤다. 아쉽게도 천연기념물인 부용매로 불리는 매화꽃은 자취를 감추었고, 붉은 동백꽃 몇 송이가 가지 사이에 숨어 가는 봄을 서러워했다.
화엄사 계곡을 따라 차로 20여 분 오르니 화엄사의 원찰인 연기암이 지리산 노고단 산행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적막과 고요 속에 둘러싸인 관음전 마당에 서니, 왕시루봉 능선과 겹겹이 펼쳐지는 부드러운 산세, 구례 들판을 굽이쳐 흐르는 섬진강이 한눈에 들어왔다. 계곡 물소리와 대숲의 사각거림, 녹음의 물결 위로 나는 새 소리---,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존재한다는 법음이 되어 가까이 들려왔다.
 
구례에는 예를 구한다는 의미의 지명에 어울리는 중요 민속 자료 8호로 지정된 고택이 있다. 조선 영조 52년, 삼수부사를 지낸 유이주가 지은 99칸 한옥 ‘운조루'는 ‘구름 속을 나는 새가 사는 집'의 뜻으로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지리산 덕은천 물줄기가 흘러내려 섬진강을 만나는 ‘구만들' 들머리, 토지면 오미리에 있는 ‘구례 운조루 고택'은 풍요와 부귀가 샘물처럼 마르지 않는다는 ‘금환락지'의 명당에 자리하고 있었다. ‘운조루'는 200여 년 동안, 고문서와 서화 그리고 민속자료 등을 통해 조선 후기 호남 지방 양반가의 생활상을 알리고 나눔의 실천으로 문화 류씨 종가의 선비 정신을 지켜 왔다.
부와 권력, 명성을 갖는 사회 지도층이 사회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한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정신은 이 고택의 곳곳에 스며 있다.
끼니를 거르는 사람들을 배려해 밥 짓는 연기가 밖으로 퍼지지 않게 했던 낮은 굴뚝과 흉년에 굶주린 이웃들을 위해 쌀 3가마니를 담아두던 나무 뒤주가 지금도 중문 간 헛청에 놓여 있다. 특히 뒤주에 쓰인 ‘누구나 마음대로 쌀 뒤주를 열 수 있다.’는 ‘타인능해'의 글귀는 큰 울림을 주고 있었다.
면면히 이어져 온 부의 사회 환원과 의무를 다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은 우리 역사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조선 정조 때, 전 재산을 풀어 아사 직전의 제주 사람들을 살린 김 만덕, 조선의 독립운동과 러시아 항일의병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고 안중근 의사의 거사(이토 히로부미 저격)를 도운 최재형, 집안의 노비를 면천하고 그들에게 전답을 무상으로 분배했으며 한국의 무장 독립운동의 선봉에 섰던 김좌진 장군, 12대에 걸쳐 빈민구제, 임진왜란 참전, 독립운동자금 조달, 대구대학,계림학숙을 설립한 경주 최씨 문중--- .
“재물은 거름과 같아 나누면 세상을 이롭게 하지만 움켜쥐면 썩는다.”는 경주 최씨 시조 최진립의 가르침은, 그의 후손들이 사방 백 리 안에 굶는 사람이 없게 했다고 알려져 왔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은 이 사회 공동체를 형성하는 모든 사람이 실천해야 하는 가치일 것이다. 정치인, 공직자, 기업인들의 사회에 대한 책임과 부의 환원 뿐 아니라 개개인의 경험, 정보와 재능의 나눔은 학술, 문화, 공익단체, 사회 복지시설로 흡수되어 우리 사회를 건전하게 움직이는 동력이 될 것이다.
‘타인능해', 나눔의 실천은 ‘사람이 하늘이다.’라며 인권과 평등을 주장한 ‘인내천'사상의 모태가 아니었을까---.


  우리는 다시 19번 국도를 따라 화개로 향했다. 지리산 산바람을 안고 굽이치는 섬진강 너른 모래밭으로 눈길을 돌렸다. 풋풋한 흙냄새와 눈부신 햇살 속에 만물을 키우는 생명의 기운이 넘쳐 났다.
이제껏 마음자리를 살피며 곁에 있어 준 오랜 친구, 고향을 닮은 구례의 산과 들, 운조루의 옛사람들---. 모든 존재의 인연들이 가깝게 다가와 마음에 평화로움이 번졌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빨리빨리, 천천히 2023.11.27 (월)
   자동판매기 버튼을 눌렀다. 캔 음료가 나오기 전 습관적으로 머리를 숙여 음료수가 나오는 통로로 손을 내밀었다. 조금 기다리니 덜컹하며 내 손에 잡힌 음료가 갈증을 풀어주었다. 자동판매기 앞에서 난 매번 필요 없는 동작을 한다. 커피 자동판매기에서도 버튼을 누른 후 커피가 다 채워지기 전에 손을 먼저 넣어 뜨거운 커피가 손 등에 흘러 데인 적도 있었다. 또 다른 습관은 공공기관 서비스 안내 전화가 연결되었을 때, 안내 내용을...
정효봉
엄마의 힘 2023.11.27 (월)
   하루에도 몇 번을 오가는 거리가 처음 보는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스쳐 지나가는 낯선 이의 모습 속에서, 외국어로 채워진 상가 외벽의 간판을 보며 나는 누구이고, 내가 있는 곳은 어디 인지를 곱씹어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자메뷰(Jamais Vu), 즉 미시감(未視感) 현상을 말하는 걸까? 익숙한 장소가 낯설게 느껴지면 재빨리 눈을 감거나 하늘을 올려다본다.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이국의 정취에 스며들지 못하는 나는 공기 중에...
권은경
오로라 마주하기 2023.11.27 (월)
서막이 열리기 전 객석은 이미 만석반전 매력이 없는 공연은 싫다면서무대의 천정 끝에서 *스윙이 나타났다*오프닝 코러스로 별 똥이 지나간 뒤객석은 발아 되어 변주로 출렁이며수많은 빗살 무늬로 줄을 타는 아리아극한의 무대 위에 광량은 클라이 막스2막 3장 푸른 빛을 되감는 필름처럼오, 그대 다시 보고파 불러본다 *커튼 콜*스윙(Swing)-모든 배역을 소화할 수 있는 배역으로 주 배우의 이동 시 역할을 맡는 배우*오프닝 코러스(Opening Chorus)-서곡이...
이상목
가을날 2023.11.20 (월)
하늘빛 깊어져가로수 이파리 물들어가면심연에 묻힌 것들이명치끝에서 치오른다단풍빛 눈빛이며뒤돌아 선 가랑잎 사람말씨 곱던 그녀랑두레박으로 퍼올리고 싶다다시 만난다면봄날처럼 웃을 수 있을까가을은 촉수를 흔들며 사냥감을 찾고나무 빛깔에 스며들며덜컥 가을의 포로가 되고 만다냄비에선 김치찌개가 보글거리고달님도 창문 안을 기웃거리는데.
임현숙
    케이팝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한 유명인이 성경 강의를 한다고 해서, 유튜브를 통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 강의 시작에 앞서 그 유명인은 자기의 사적인 이야기부터 꺼냈다. 얼마 전 생일날 친구로부터,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너에게.”로 시작되는 생일 카드를 받았다고 했다. 그 카드를 준 친구와는 무명 시절을 같이 보냈었는데, 현재 자기는 크게 성공했지만, 그 친구는 여전히 무명이라고 했다. 그러니 그 친구 눈에는 그가 얼마나...
박정은
어떤 눈물 2023.11.20 (월)
   벌써 14년 전이다. 한 방송사가 47주년 특별 기획이라며 보여주던 다큐멘터리는 참 충격적이었다. 우연히 채널을 돌렸다가 보게 된 프로였는데 지금도 장면들이 눈에 선하다. 지구 온난화로 사냥터를 잃어가는 북극곰의 눈물, 빨리 녹아 사라져버리는 작은 유빙流氷에 갇힌 바다 코끼리, 사라지는 툰드라에서 이동하는 순록 떼의 모습은 결코 아름다운 영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그럴 수도 있겠다 정도로 그리 심각하게 생각지는...
최원현
추수감사절 2023.11.20 (월)
바람에 출렁이는 이삭이하늘 문에 닿아 노크를 하네이제는 두 손 모아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 시간공중에 나는 새도 가만히 내려와바닥에 떨어진 이삭을 쪼네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 재단에잔치를 베푸시는 농부의 손은거룩하기만 하고허수아비도 참새도 즐겁게 춤을 추면서풍년을 노래하는 추수감사절부귀영화도 한낱 바람과 같다고 하나오늘 만은 들꽃처럼 환하게 노래 하려네
유우영
금은달 금은별 2023.11.15 (수)
하아. 은별이는 침대에 털썩 드러누우면서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사 온 집은 말이 좋아서 현대식 한옥이지, 낡은 한옥에 부엌과 화장실만 신식으로 덧지은, 그냥 시골집이었다. 이사를 가지 않으면 밥도 안 먹고 학교도 다니지 않겠다고 강짜를 부리긴 했지만, 이런 깡촌으로 오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방문 너머로 아빠와 통화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그럼, 잘 도착했지. 이삿짐 아저씨들이 다 제자리에 들여놔줘서 정리만...
곽선영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