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문득 그리워질 시간

조정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7-04-01 09:58

 아침 6시, 300여 명의 승객을 태운 선 윙의 로스 카보스행 비행기는 밴쿠버 공항을 이륙하고 있었다. 표지판의 안전 밸트 사인이 꺼지자, 우울한 겨울 날씨로부터 탈출을 시도한 승객들에게 샴페인을 제공하겠다는 기내 방송이 들려왔다. 비행기 안은 곧 따뜻한 남쪽 나라로 향하는 휴가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크게 웃고 떠드는 사람들, 겨울 옷을 벗는 사람들, 다정한 눈빛을 주고받는 연인들---. 정호승의 시집을 펴든 나는 “그대와 운주사에 갔을 때 왜 나란히 와불 곁에 잠들어 별이 되지 못했는지."라는 싯구에서 동행하는 남편에 대한 배려를 다짐하고 있었다. 서로의 이견을 조율하는 과정이 여행의 필요충분조건이라고 터득한 바 있기에.
 이륙 후 2시간, 온천지가 눈밭인 풍경이 펼쳐질 때 그랜드 캐년 위를 날고 있다는 기내방송이 들렸다. 애리조나 주 북쪽, 443Km 길이의 콜로라도 강이 흐르는 웅장한 그랜드 캐년은 가장 깊은 계곡의 깊이가 1.6Km라는 설명도 이어졌다. 계곡 옆으로 펼쳐지는 붉은 황톳빛의 드넓은 분지는, 바다 수면보다 낮고 두꺼운 소금층으로 이루어진 데스 밸리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4시간의 비행 중 1시간 30여 분을 남겨놓고 비행기는 1,250Km 길이의 멕시코 바하 캘리포니아 상공을 날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캘리포니아 만과 태평양 사이의 바하 캘리포니아 반도는 동쪽에서 서쪽 끝까지의 땅이 한눈에 들어왔다.
 밴쿠버를 떠난 지 4시간, 작은 로스 카보스 공항에 도착하니 섭씨 26도의 건조한 여름 날씨였다. 공항 안은 관광객을 상대로 한 멕시코 사람들의 적극적인 호객 행위로 이들을 뿌리치며 밖으로 나오는 일이 쉽지 않았다. 태평양에서 흑 등 고래 보기, 카보 산 루카스 바다에서 엘 아르코와 바다사자 보기, 해안 사구에서 낙타와 말타기, 바다에서 낚시, 스쿠버 다이빙, 해적선 쇼 관람하기, 25에이커 전용 농장을 갖은 아크레 식당에서 식사하기 등 다양한 여행 상품을 적극적으로 판매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이번 멕시코 여행은 로스 카보스 지역의 작은 마을들을 돌아보기로 했기에 그들의 권유를 주저 없이 뿌리치고 공항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예약된 버스를 타고 산 호세 델 카보에 위치한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도로 주변엔 온통 마른 덤불 사이에 키 큰 선인장들만이 늘어서 있었다. 기후나 토양 조건이 척박한 이 지역은 정부 차원의 관광 산업이 1990년대 부터 시작됐으며, 자연 조건으로는 뜨거운 태양과 바다, 멕시칸의 친절함 그리고 싼 노동력으로 알려져 있다. 드디어 호텔 로비에서 바라본, 야자수가 우거진 풀장 주변의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 그 너머 하얀 모래사장 그리고 넘실대는 푸른 바다는 이곳이 지상 낙원이라는 첫인상을 갖게 했다. 뜨거운 해가 기울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오후, 산 호세 성당 앞 광장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지역 예술가들의 그림, 수공예품, 멕시코 민속춤을 감상하며 이국의 정취에 젖어 있었다. 다음날, 은빛 모래사장 갈대 지붕 밑에 자리를 잡고 주변을 둘러보니, 많은 수영복 차림의 사람들은 썬탠을 즐기며 독서삼매에 빠져 있었다. “책 읽기는 자신이 사는 세상을 진실로 사랑하는 법을 터득하는 일이며, 침묵함으로서 영혼의 본질 속으로 여행할 수 있다.”는 한 시인의 말은 시공의 경계가 없었다. 최근 신문 기사는 2015년 OECD 주최 72개국 10학년 학생들의 읽기 평가(PISA)에서 캐나다 비씨 주 학생들이 1위를 기록한 사실을 보도하며, 캐나다인들의 독서열을 다시 조명한 바 있다.
해 질 무렵, 넓은 모래사장 한쪽에서 간절한 눈빛으로 “올모스트 프리”를 외치던 멕시칸 행상들이 귀갓길에 올랐다. 온종일 노동이 자신의 하루 생계를 감당하지 못하는 허탈함!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한 그들의 쓸쓸한 뒷모습과 절망처럼 밀려오는 파도의 낯선 조화로움 속에는 무거운 삶의 비애가 담겨 있었다.
 
 다음날부터 우리는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으며 카보 산 루카스, 플레이타 그리고 토도스 산토스 지역의 하루 여행길에 올랐다. 카보 산 루카스에선 코르테스 바다로 나가 아름다운 기암괴석인 엘 아르코와 바다 사자 무리를 보았고, 덜컹대는 버스를 타고 도착한 플레이타에선 마리너를 배경으로 한 개성 있는 호텔에서 유쾌한 멕시칸과 함께 사진도 찍었다. 산 호세 델 카보에서 2시간 거리의 토도스 산토스를 가던 날, 우리는 버스 터미널에서 사스칸 주에서 온 캐나다인 부부로 부터 많은 정보를 얻기도 했다. 토도스 산토스를 지나가는 그들은 세계의 수족관으로 불리는 라 파즈에서 20년 동안 겨울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오랜 이웃처럼 특별한 경험을 기꺼이 나누던 두 사람의 부드러운 눈빛은 초행길의 우리를 안심시키기에 충분했다. 작은 마을 토도스 산토스에서 우리는 예술가들의 스튜디오, 역사 박물관, 그릇 가게를 돌아본 후 넓은 선인장 정원이 있는 로스 아도레라는 식당을 찾아갔다. 아름다운 정원을 바라보며 마가리타의 맛을 음미하던 그 시간의 충만함을 어떤 수사로 그릴 수 있을까! 코르테스 주홍빛 노을 속 펠리칸들의 수직 하강, 만월의 밤 바다 위로 뛰어오르던 물고기 떼, 소박한 웃음으로 소통하던 멕시칸들---, 문득 그리워질 기억들이다.
 안일과 휴식이 필요한 시간, 반복되는 일상에서 얻을 수 없는 심리적인 풍요와 내적 사유를 찾아 우리는 길을 떠난다. 그곳에서 얻은 소중한 기억들은 때로 삶을 지탱해 줄 활력이 되기도 하고, 삶에 온기를 더하기도 한다. 나는 내 평범한 일상이 집착이 없는 바람 되어 다시 푸른 바다 위로 날기를 기다리고 있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풍경 속 평온 2024.04.15 (월)
햇빛 가리개 구름은머리에 하이얀 솜털을뒤집어 쓴 산봉우리를살포시 허공을 헤엄친다하늘의 풍경을 그대로 담은바다의 모습은 그지없이 평온하다바다와 산은 저마다의 사연이 있지만그냥 묵묵부답으로 본연의 자태를 취할뿐아무런 댓가를바라지 않는다하늘과 산과 바다를멀리서 지켜보는저 학동은 그지없이유유자적한데저 멀리서 뜬금없이먹구름 하나가비를 몰고오네 
구대호
영원한 이민 2024.04.15 (월)
  “권장로님, 아버지께서 오늘 아침 천국으로 아민을 떠나셨기에 환송 예배를 드립니다.” 친구 딸아이의 멧시지 였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주권 가운데 나의 사랑하는 친구 문장로가 지난주 4월 1일 새벽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님이 계시는 천국으로 금의환향(錦衣還鄕)했다. 그와 나는 오랫동안 신앙의 친구요 교회의 동료로 함께 해 왔다. 그는 과묵하면서도 유머가 많아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말이 별로...
권순욱
밟아라 2024.04.15 (월)
 서울에 사는 영적 동반자가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영화 <사일런스>를 꼭 보라며 청주 상영관까지 알려줍니다. 그때부터 제 머릿속은 영화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래전에 그 영화의 원전인 『침묵』이라는 소설을 감명 깊게 읽고 가끔씩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더니 충북 내 영화관이 똑같이 종영하는 날, 가까스로 진천에 가서 영화를 보았습니다.실화를 바탕으로 한 엔도 슈사쿠의 소설...
반숙자
셀카 증명 시대 2024.04.15 (월)
세상은 변했어기우뚱 거리다 기울어 지다 엎어졌어마음을 나타내려 해도 이제는환적의 경유지를 밝혀야 하고무게의 중량을 홀수선에 남겨야 하는"마음 속으로" 는 사라지고"보시다시피"로 증명 해야 하는 세상마음을 찍을 수 없는 셀카에 의존하는증명사진 유행의 시대, 증명사진 요구의 시대여보시게나자네들과 나 사이에는이심전심의 토양에서우정 이라는 길을 돋우고 다지며믿음을 넓히고 오해를 메우는, 마침내무엇이든 실어 나르는 큰 길모여...
조규남
1.23세. 대학을 마치고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들어간 나의 첫 직장은 강북구 미아동 소재 S여중이었다. 첫 출근 날 아직 군대도 미필인 시절, 솜털이 뽀얀 홍안의 청년이 여중생의 수업을 들어간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리셨는지 교감선생님은 나를 따로 불러 세워 다짐을 하신다.“민 선생, 오늘 수업을 들어가게 되면 무조건 민 선생은 딸이 하나 있는 애 아빠라고 자기 소개를 하시고, 학생들이 딸 이름을 혹시 묻거든 ‘들레’라고 하세요.”라며...
민완기
삼겹살 2024.04.08 (월)
아들이 군대 간다고 둥지를 떠나고문 선생은 중첩된 설움을 곰 삭이며외롭다는 말 대신삼겹살 한 절음 불판에 그슬렸다사방에 튀는 기름 파편을 손등이 접수하며그렇게, 모르는 듯 타들어가고 있다 나무젓가락 사이 낑긴 고기가숨이 붙어 더 살아갈 날을 깨우고 있다참기름장에 발라 입에 넣고떠난 가족을 씹어 그렇게 삼켜 버렸다외로움은 콧날에 상큼하다는 말겨자 한입 넣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혼미한 푸념을 담배 연기처럼 뱉어버리고앉았던...
김경래
팔자를 생각하다 2024.04.08 (월)
 가져가야 할 짐들을 거실 가득히 늘어놓은 채, 남편은 가방에짐을 챙겨 넣고 있다. 그가 짐 싸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가 다시 떠난다는 게 실감 난다. 가방의 지퍼가 고장 났는지 닫히지 않는다고 남편이 말한다. 그를 붙잡고 싶은 내 마음이 염력을부린 듯하다.남편은 파도 치는 바다로 고생하러 가면서도 아내의 눈치를 본다. 뭘 사다 주면 좋겠느냐고 자꾸 묻는다. 대답 대신 고개를 흔드는데 눈물이 또 주책을 부린다. 냉장고 문을 열고...
정성화
봄밤 2024.04.08 (월)
부활절 날 밤겸손히 무릎을 꿇고사람의 발보다개미의 발을 씻긴다연탄재가 버려진달빛 아래저 골목길개미가 걸어간 길이사람이 걸어간 길보다더 아름답다
정호승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집도의는 캐나다에서도 이름 있는 Doctor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남자가 7사람 여자 두 사람이 있다. 수술은 집도의와 보조의가 하겠지만 의대생들이 견학하는 걸 허락했던 것이다.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된듯하다. 수술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광에 호스를 꽂아 소변을 받아내고 양팔 혈관에 주사바늘을 고정시켜 줄이 달려있다코로 호수를 따라 식사대용 영양제가 들어간다. 또 수술한 부위에도 호스를 넣어...
박병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암이 자리 잡은 곳, 그 위치가 어디인가. 그게 중요하다.폐라면 힘 든다. 췌장이라면 수술이 어렵다. 급성으로 여러 군데 전이가 되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하다.내게 온 곳은 목이다. 후두암이라고도 한다. 그 자리는 어떤 곳인가?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부분이다. 거기는 기도(Air way)와 식도가 만나는 곳인데 코와 입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고 또 입에서 식도로 넘어오는 음식이 지난다.또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가...
늘산 박병준
늘산 본인이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암에서 예방될 수 있는 일에 다소나마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암의 발견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다.나는 우연적이라 생각하며 그나마 일찍 발견하였다는데 다행이라 생각한다.산에서 사람을...
늘산 박병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