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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드웨이에 서다!

박정은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7-03-25 11:12

한국문협밴쿠버지부 회원기고/수필
 두 딸이 대학에 진학해 도시로 가고 나니 방이 두 개가 비었다. 햇볕이 잘 드는 방을 골라 서재를 만들려고 짐을 옮기는데 방 벽에 딸이 붙여 둔 문구가 보였다. ‘Dream, until your dream comes true. (너의 꿈이 이루어질 때까지 꿈을 꿔라!)’ 딸은 매일 이 문구를 보며 꿈을 꾸었나 보다. 글자가 가려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책장을 배치했다. 딸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엄마인 내게도 꿈이 있으니까.  

     어른이 되어 슬픈 것 중에 하나는 그 누구도 내게 꿈이 뭐냐고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꿈이 뭐냐는 질문을 받던 어린 시절, 그 땐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열린 길 앞에 서 있었다. 잠깐 눈을 감고 반 친구들과 같이 수업을 받던 교실로 돌아가 본다. 선생님이 우리들에게 장래에 무엇이 되고 싶은지 꿈 조사를 하기 시작한다. 많은 아이들이 의사, 간호사, 선생님 등등 평범하고도 괜찮다는 직업에 손을 든다. 그 때 난 배우가 되겠다고 혼자서 손을 들었다. 못생긴데다 숫기도 없던 내가 배우를 하겠다고 손을 들었으니 반 아이들이 책상을 두드리며 웃기 시작한다. 그 조롱 섞인 박장대소에 눌려 겨우 손만 들었지 얼굴이 빨개진 난 고개를 푹 숙이고 만다. 매번 반 친구들이 비웃을 걸 알면서도 고집스레 손을 들었던 이유는 그것이 두려워 손마저 들지 못한다면 무슨 용기로 진짜 현실에서 내 꿈을 찾아갈 수 있겠나 싶어서였다. 연극영화과에 가려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실기시험을 위해 교수에게 개인레슨을 받기로 약속까지 했었다. 하지만 어느 날 새벽, 목이 말라 일어났다가 부모님이 대학 등록금과 교수에게 지불할 레슨비를 걱정하는 소리를 들었다. 가르치다 힘들면 하고 있는 가게라도 팔아 대주고 행상을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부모니까 자식이 하겠다는 걸 밀어주자는 결론을 내는 소리를 듣고, 난 그 다음날로 꿈을 꼬깃꼬깃 접어 버렸다. 그리곤 좀 더 평범하고, 안정되게 돈을 벌어 동생 대학도 좀 가르칠 수 있는 반 여자애들이 흔히 손을 들던 간호사로 인생의 방향을 틀었다. 정확히 말하면 진짜로 꿈을 포기한 건 아니었다. 내 앞에 지름길이 있지만 부모님께 짐이 되니까 이 길로 가지 말고 그냥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내 힘으로 천천히 돌아가자. 그렇게 돌아가기 시작한 내 꿈은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뉴욕 맨해튼에 있는 브로드웨이에 갔다. 연극배우라면 누구나 한번쯤 가보고 싶은 곳이다. 10년 넘게 최장기 공연을 기록하는 ‘오페라의 유령’을 보러 갔다. 간단히 스토리를 전하자면 선천적인 기형으로 태어나 버림받은 소년이 오페라극장으로 흘러 들어와 어둠 속에 숨어 자라게 된다. 하지만 천재적인 음악적 재능을 지닌 그는 위대한 극작가로 성장한다. 크리스틴 또한 어릴 때 고아가 되어 극장에서 배우로 성장한 소녀다. 크리스틴을 어둠 속에 숨어 사랑하게 된 팬텀은 그녀에게 보이스 레슨을 시켜준다. 그러던 어느 날, 크리스틴이 소꿉친구였던 라울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런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팬텀은 여러 일을 벌이지만 끝내 사랑이 실패하고 만다는 이야기이다. 샹들리에가 관객석을 향해 무너져 내리고, 순식간에 무대가 호수로 변하고, 배가 떠다니고, 모든 장면들이 공연장 전체를 환상의 세계로 인도했다. 옛날 대학 때 동아리에서 연극 공연을 할 때는 무대 전환이 아주 어려웠었다. 암전된 상태에서 각 배우들이 무대 소품을 들고 들락날락 그러다 서로 부딪히고 넘어지고. 그런 미개한 방식으로 무대를 바꿨었는데, 쉴 틈 없이 변신하는 무대를 보면서 무대예술의 엄청난 발전에 경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록 배우가 되어 간 브로드웨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연극의 3대 요소인 배우, 희곡, 관객, 그 중 하나인 관객으로라도 참여를 했으니 감사하고 행복했다. 공연이 끝나고 11시가 넘어 길거리에 나왔는데 브로드웨이는 그 명성만큼이나 사람들로 거리가 가득했다. 늦은 밤, 그 붐비는 사람들 속을 걷다가 난 먼 길을 돌고 돌아오는 초라한 행색의 내 꿈과 다시 만났다.

     내 나이 50세, 이젠 누구도 내게 꿈이 뭐냐고 묻지 않는다. 세월이 가면서 얼굴엔 주름이 늘고, 머리엔 흰색이 섞인다. 그래도 내가 안고 사는 꿈만은 늙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젠 나이가 먹어 배우가 어렵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난 내 꿈을 버릴 이유를 찾지 못했다. 난 딸들에게 장래에 뭐가 될지 그들의 꿈을 묻기보다는 지금도 내게 먼저 묻기 바쁘다. “넌 앞으로 뭐가 될래?” 내가 이렇게 물으며 내 꿈을 찾아가듯 딸들 또한 스스로에게 꿈을 물으며 자신의 꿈을 찾아가겠지! 배우가 어렵다면 대본을 직접 쓰자! 그래서 요즘은 16부작 미니시리즈 대본을 쓰고 있다. 오늘도 난 딸이 떠난 빈 방에 앉아 ‘꿈이 이루어질 때까지 꿈을 꾸라!’는 문구를 마주보며 이 미친 꿈을 계속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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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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