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협밴쿠버지부 회원기고/수필
올해는 예년에 비해 조금 늦게 단풍이 들었지만, 유난히 더 선명하고 깨끗하게 물든 단풍을 볼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그런데 온갖 색채로 세상을 물들여 아름답게 만드는 단풍에도 자연에 순응하는 법칙이 숨어 있다고 한다.
모든 생물체는 주변 환경에 본능적으로 반응하는데, 온대 낙엽수림은 봄에 싹이 돋고, 여름에는 짙은 녹색으로 변하며, 가을에는 그 잎이 단풍으로 물들고, 겨울에는 낙엽이 지는 등 계절에 따라 변화를 거듭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특히 요즘처럼 각양각색으로 채색 된 가을의 낙엽수림은 한껏 매력 발산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알고 보면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는 나무의 몸부림이라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가을이 되면 나뭇잎 속의 엽록소가 분해되면서 안토사이안이 만들어 지는데, 그 과정에서 나뭇잎은 다양한 색으로 변하게 되고, 우리는 이것을 단풍이 든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식물의 종류마다 단풍 빛깔이 다른 것은 홍색소와 공존하고 있는 엽록소나 노란색, 갈색의 색소 성분이 양적으로 다르기 때문인데, 재미있는 사실은 가뭄이 길수록, 기온이 급강하 할수록, 일교차가 심할수록 단풍의 색은 선명하고 짙어진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내 인생도 이젠 여름의 끝자락에서 가을로 들어가는 문턱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직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나의 겉모습이다. 아침에 일어나 세면을 하고 거울을 볼 때면, 그 안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점점 더 선명하게 보기 시작한다. 새까맣던 머리카락은 어느새 옆 머리를 시작으로 희게 물들어 가고 있고, 유난히 좁던 이마는 이제 훤칠한 정도를 넘어, 시원할 만큼 넓어지고 있다. 허리띠 구멍 수는 점점 늘어나고, 바지 길이는 짧아진다. 한 때는 중후함을 동경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좀 더 젊어 보이는 게 좋지 않을까?” 중얼거리게 된다.
생각하는 내용도, 방법도 달라졌다. “아닌데!” 라고 생각하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던 내가, 이제는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을 한다.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발이 먼저 앞서던 내가, “꼭 해야만 하는 일일까?” 머뭇거리게 된다. 꿈과 비전을 위해서라면 앞 뒤 가리지 않고, 위험부담을 무릅쓰며 도전하던 내가, 이제는 안전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이 정도면 여름나무라고 우기기에는 너무 지나친 욕심 아닐까 싶다.
가을이 되면 자연스럽게 낮의 길이가 짧아지고, 태양 빛은 약해지고, 기온이 내려가게 된다. 낙엽수는 그 변화를 감지하고 앱시스산이라는 호르몬을 발산하는데, 이 호르몬의 영향으로 잎자루와 가지가 붙어 있는 부분에 떨켜라는 특별한 조직이 생겨나서 잎이 떨어지는 현상을 우리는 “낙엽이 진다”고 말한다고 한다.
요즘, 고만고만했던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 가는 세월이라도 붙잡고 싶은 생각이 들곤 한다. 결혼할 생각으로 들떠 있는 아이, 앞으로의 꿈을 찾아 고민하는 아이, 십대를 마지막으로 보내며 막연한 자유를 그리워하는 아이, 부모보다 또래 친구들이 소중해지기 시작하는 아이… 마치 나무에 떨켜가 생겨서 나뭇잎이 가지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그렇게 부모로부터 아이들도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이런 변화를 감지하기 시작하면서 “어느새 이렇게 되었는가?” 아쉬움이 앞선다. 어쩌면 떠나갈 준비를 하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가을의 스산함을, 아니, 다가올 겨울의 황량함을 미리 예감하기라도 하듯, 나는 떨어지는 낙엽과 어느새 하나가 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 가을에 자연의 순리를 따라 사는 나무에게서 큰 이치를 발견하기 때문일 것이다.
낙엽수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은행나무나 단풍나무 같은 낙엽수는 늦가을에 떨켜를 만들어 일제히 잎을 자발적으로 떨어뜨리는 반면, 밤나무나 떡갈나무는 떨켜를 만들 줄 모르기 때문에 겨울이 되어 잎이 갈색으로 변하고 바싹 마를 때까지 가지에 붙어 있다가, 겨울의 강풍에 어쩔 수 없이 조금씩 나무에서 떨어져 나가는 종류이다. 난 떨켜를 만드는 나무이고 싶다.
떨어질 낙엽 아쉬워 떨켜를 만들지 않는다 한들, 겨울에 불어오는 강풍조차 견딜 수 있을까? 어차피 말라서 떨어지는 것이 낙엽의 운명인 것을… 멀어져 가는 것들 아쉬워 움켜잡으려고 한들, 제 발로 걸어나가는 것 조차 막을 수 있을까? 그것이 조물주의 섭리인 것을…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에 나오는 담쟁이 덩굴도 잎에 떨켜를 만들지 않는 식물이라는데, 결국에는 다 떨어져버리지 않았던가!
자연에 순응하는 나무는 결국 떨켜를 만들어 적극적으로 환경에 반응하면서, 떨어지는 낙엽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앞으로 다가올 겨울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하며, 여름 내내 수고한 열매가 무르익을 수 있도록 필요 없는 에너지를 절약하는 자기 희생을 통해서, 한층 더 성숙한 봄을 맞이하기 위해서 겨울을 준비하는 것이다.
결국 가을 단풍은 다가올 “봄”을 위한 "수고"와 "희생"의 또 다른 이름인 셈이었다.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쉬워하는 가을이기 보다는, 내년의 봄, 다음세대를 위하여 나는 오늘도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을 읊조려 본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Rainer Maria Rilke, 1875.12-1926.12)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실존주의 시인으로, 20세기 최고의 독일 시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모든 생물체는 주변 환경에 본능적으로 반응하는데, 온대 낙엽수림은 봄에 싹이 돋고, 여름에는 짙은 녹색으로 변하며, 가을에는 그 잎이 단풍으로 물들고, 겨울에는 낙엽이 지는 등 계절에 따라 변화를 거듭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특히 요즘처럼 각양각색으로 채색 된 가을의 낙엽수림은 한껏 매력 발산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알고 보면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는 나무의 몸부림이라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가을이 되면 나뭇잎 속의 엽록소가 분해되면서 안토사이안이 만들어 지는데, 그 과정에서 나뭇잎은 다양한 색으로 변하게 되고, 우리는 이것을 단풍이 든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식물의 종류마다 단풍 빛깔이 다른 것은 홍색소와 공존하고 있는 엽록소나 노란색, 갈색의 색소 성분이 양적으로 다르기 때문인데, 재미있는 사실은 가뭄이 길수록, 기온이 급강하 할수록, 일교차가 심할수록 단풍의 색은 선명하고 짙어진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내 인생도 이젠 여름의 끝자락에서 가을로 들어가는 문턱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직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나의 겉모습이다. 아침에 일어나 세면을 하고 거울을 볼 때면, 그 안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점점 더 선명하게 보기 시작한다. 새까맣던 머리카락은 어느새 옆 머리를 시작으로 희게 물들어 가고 있고, 유난히 좁던 이마는 이제 훤칠한 정도를 넘어, 시원할 만큼 넓어지고 있다. 허리띠 구멍 수는 점점 늘어나고, 바지 길이는 짧아진다. 한 때는 중후함을 동경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좀 더 젊어 보이는 게 좋지 않을까?” 중얼거리게 된다.
생각하는 내용도, 방법도 달라졌다. “아닌데!” 라고 생각하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던 내가, 이제는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을 한다.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발이 먼저 앞서던 내가, “꼭 해야만 하는 일일까?” 머뭇거리게 된다. 꿈과 비전을 위해서라면 앞 뒤 가리지 않고, 위험부담을 무릅쓰며 도전하던 내가, 이제는 안전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이 정도면 여름나무라고 우기기에는 너무 지나친 욕심 아닐까 싶다.
가을이 되면 자연스럽게 낮의 길이가 짧아지고, 태양 빛은 약해지고, 기온이 내려가게 된다. 낙엽수는 그 변화를 감지하고 앱시스산이라는 호르몬을 발산하는데, 이 호르몬의 영향으로 잎자루와 가지가 붙어 있는 부분에 떨켜라는 특별한 조직이 생겨나서 잎이 떨어지는 현상을 우리는 “낙엽이 진다”고 말한다고 한다.
요즘, 고만고만했던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 가는 세월이라도 붙잡고 싶은 생각이 들곤 한다. 결혼할 생각으로 들떠 있는 아이, 앞으로의 꿈을 찾아 고민하는 아이, 십대를 마지막으로 보내며 막연한 자유를 그리워하는 아이, 부모보다 또래 친구들이 소중해지기 시작하는 아이… 마치 나무에 떨켜가 생겨서 나뭇잎이 가지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그렇게 부모로부터 아이들도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이런 변화를 감지하기 시작하면서 “어느새 이렇게 되었는가?” 아쉬움이 앞선다. 어쩌면 떠나갈 준비를 하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가을의 스산함을, 아니, 다가올 겨울의 황량함을 미리 예감하기라도 하듯, 나는 떨어지는 낙엽과 어느새 하나가 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 가을에 자연의 순리를 따라 사는 나무에게서 큰 이치를 발견하기 때문일 것이다.
낙엽수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은행나무나 단풍나무 같은 낙엽수는 늦가을에 떨켜를 만들어 일제히 잎을 자발적으로 떨어뜨리는 반면, 밤나무나 떡갈나무는 떨켜를 만들 줄 모르기 때문에 겨울이 되어 잎이 갈색으로 변하고 바싹 마를 때까지 가지에 붙어 있다가, 겨울의 강풍에 어쩔 수 없이 조금씩 나무에서 떨어져 나가는 종류이다. 난 떨켜를 만드는 나무이고 싶다.
떨어질 낙엽 아쉬워 떨켜를 만들지 않는다 한들, 겨울에 불어오는 강풍조차 견딜 수 있을까? 어차피 말라서 떨어지는 것이 낙엽의 운명인 것을… 멀어져 가는 것들 아쉬워 움켜잡으려고 한들, 제 발로 걸어나가는 것 조차 막을 수 있을까? 그것이 조물주의 섭리인 것을…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에 나오는 담쟁이 덩굴도 잎에 떨켜를 만들지 않는 식물이라는데, 결국에는 다 떨어져버리지 않았던가!
자연에 순응하는 나무는 결국 떨켜를 만들어 적극적으로 환경에 반응하면서, 떨어지는 낙엽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앞으로 다가올 겨울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하며, 여름 내내 수고한 열매가 무르익을 수 있도록 필요 없는 에너지를 절약하는 자기 희생을 통해서, 한층 더 성숙한 봄을 맞이하기 위해서 겨울을 준비하는 것이다.
결국 가을 단풍은 다가올 “봄”을 위한 "수고"와 "희생"의 또 다른 이름인 셈이었다.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쉬워하는 가을이기 보다는, 내년의 봄, 다음세대를 위하여 나는 오늘도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을 읊조려 본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Rainer Maria Rilke, 1875.12-1926.12)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실존주의 시인으로, 20세기 최고의 독일 시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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