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협밴쿠버지부 회원기고/수필
잿빛 밴쿠버의 겨울을 견디는 일은 혹독한 추위에 겨울잠을 자는 곰과 동병상련의 정을 나누게 한다. 북위 48도 러시아의 하바롭스크와 같은 위도상에 있는 밴쿠버의 겨울밤은 길고도 길다. 칠흑 같은 어둠에 창문을 두들기는 빗소리만 들릴뿐 사방은 너무도 적막하다. 나는 자기 성찰을 하기에 아주 좋은 조건이라고 긍정의 마음을 내며 새해 연하장을 쓰기 시작한다. 서리 꽃이 나뭇가지에 하얗게 핀 겨울 아침 나는 친정 고모님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내 졸시를 곁들인 이메일 연하장에 격려와 사랑을 담은 답이었다. 70 중반의 고모님은 지금도 아득한 내 어린 시절의 시간 속에 살아있다. 내 머리를 빗겨주거나 할머니 잔소리에 역성을 들어주던 그때의 고모 생각은 멀고 먼 기억 속으로 나를 이끌곤 한다.
새벽녘 그루잠 속에서 나는 마법의 피리 소리를 들으며 유년의 기억 속으로 훨훨 날아간다.
따뜻한 등잔 불빛이 문틈으로 새어 나오고 굴뚝에선 저녁밥 짓는 연기가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 우리 집, 논배미에서 잡은 잔 새우를 넣고 끓인 뭇국과 생태 넣은 김장 김치가 놓인 저녁 밥상에서 이야기꽃을 피우는 식구들, 함박눈이 내리는 아침 노란 콩나물시루와 연둣빛 움파에 물을 주는 할머니, 화롯불에 달군 인두로 설빔을 매만지는 손끝 야무진 엄마, 홍시와 콩엿을 언제쯤 먹게 될까 할머니 얼굴과 다락문을 번갈아 쳐다보는 나, 사랑채 마루에 앉아 가오리연을 허공으로 멀리멀리 날리는 삼촌 그리고 고모는 밭이랑에서 매화꽃처럼 환하게 웃으며 냉이를 캐고 있다.
그때의 고모는 혼기를 앞둔 나이로 어여쁘고 상냥했다. 고모의 웃음은 매화의 보드라운 꽃잎에서 그윽한 향기가 퍼지는 듯 했고 눈빛은 봄 햇살 같이 다정했다. 들로 산으로 텃밭 이랑으로 항상 고모 뒤를 졸졸 따라 다니던 나는 어느 날부터 마을 전도사님도 고모 뒤를 따라다니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인사차 서울 청년인 전도사님이 우리 집에 왔을 때 나는 한쪽 구석에서 두 사람이 하는 말을 귀담아듣고 있었다. 고모는 평소보다 상냥했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고 있었다. 고모의 사랑은 점점 산수유 열매처럼 빨갛게 익어가기 시작했고 어느 봄날 고모는 나를 두고 서울로 시집을 가버렸다. 나는 이제 세월 저편 순하고 아리땁던 고모에게 뜨거운 찻잔에 매화꽃을 띄어 그 향기를 전한다.
봄바람 매서운 산비탈에
해맑은 매화꽃으로 피었습니다
다정하고 눈빛 고운
그녀의 찻잔에 내 몸을 녹여
겨우내 숨겨 둔 겹겹의 향기를 꺼내
속 깊은 그녀를 만나기 위해
그녀는 숨을 멈추고
연분홍 산과 들을 두 팔로 안겠지요
꽃 나무 흙 돌 바람
황토밭 이랑에서 하심을 배워
허황한 것을 구하지 않는 그녀지만
여한 없는 사랑만은 아니겠지요
그해 겨울 평화롭고 아름다운 고향에서 소박한 삶을 살았던 식구들이 너무도 그리운 겨울밤이다.
이제 나의 고향은 머나먼 시간 속에 있다. 어느 시인의 말대로 아득히 먼 별에 숨어있는 한 송이 꽃처럼, 믿을 수 없는 기억 속에.
새벽녘 그루잠 속에서 나는 마법의 피리 소리를 들으며 유년의 기억 속으로 훨훨 날아간다.
따뜻한 등잔 불빛이 문틈으로 새어 나오고 굴뚝에선 저녁밥 짓는 연기가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 우리 집, 논배미에서 잡은 잔 새우를 넣고 끓인 뭇국과 생태 넣은 김장 김치가 놓인 저녁 밥상에서 이야기꽃을 피우는 식구들, 함박눈이 내리는 아침 노란 콩나물시루와 연둣빛 움파에 물을 주는 할머니, 화롯불에 달군 인두로 설빔을 매만지는 손끝 야무진 엄마, 홍시와 콩엿을 언제쯤 먹게 될까 할머니 얼굴과 다락문을 번갈아 쳐다보는 나, 사랑채 마루에 앉아 가오리연을 허공으로 멀리멀리 날리는 삼촌 그리고 고모는 밭이랑에서 매화꽃처럼 환하게 웃으며 냉이를 캐고 있다.
그때의 고모는 혼기를 앞둔 나이로 어여쁘고 상냥했다. 고모의 웃음은 매화의 보드라운 꽃잎에서 그윽한 향기가 퍼지는 듯 했고 눈빛은 봄 햇살 같이 다정했다. 들로 산으로 텃밭 이랑으로 항상 고모 뒤를 졸졸 따라 다니던 나는 어느 날부터 마을 전도사님도 고모 뒤를 따라다니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인사차 서울 청년인 전도사님이 우리 집에 왔을 때 나는 한쪽 구석에서 두 사람이 하는 말을 귀담아듣고 있었다. 고모는 평소보다 상냥했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고 있었다. 고모의 사랑은 점점 산수유 열매처럼 빨갛게 익어가기 시작했고 어느 봄날 고모는 나를 두고 서울로 시집을 가버렸다. 나는 이제 세월 저편 순하고 아리땁던 고모에게 뜨거운 찻잔에 매화꽃을 띄어 그 향기를 전한다.
봄바람 매서운 산비탈에
해맑은 매화꽃으로 피었습니다
다정하고 눈빛 고운
그녀의 찻잔에 내 몸을 녹여
겨우내 숨겨 둔 겹겹의 향기를 꺼내
속 깊은 그녀를 만나기 위해
그녀는 숨을 멈추고
연분홍 산과 들을 두 팔로 안겠지요
꽃 나무 흙 돌 바람
황토밭 이랑에서 하심을 배워
허황한 것을 구하지 않는 그녀지만
여한 없는 사랑만은 아니겠지요
그해 겨울 평화롭고 아름다운 고향에서 소박한 삶을 살았던 식구들이 너무도 그리운 겨울밤이다.
이제 나의 고향은 머나먼 시간 속에 있다. 어느 시인의 말대로 아득히 먼 별에 숨어있는 한 송이 꽃처럼, 믿을 수 없는 기억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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