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협밴쿠버지부 회원기고/수필
지난가을 어느 일요일, 즐거운 기분으로 교회에 갔다. 날씨도 화창하고 수확의 계절이라 그런지 사람들의 마음도 함께 풍성해 보였다. 교회 입구에는 여러 그루의 코스모스가 활짝 피어 있었다. 캐나다에서는 흔치 않은 코스모스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잠시 동안 고향 생각에 발길을 멈추고 꽃잎을 바라보며 사색(思索)에 잠겨보았다. 그러고 보니 어느덧 고국을 떠나 이곳 밴쿠버에 정착한 지도 훌쩍 20년을 넘어섰다.
누구나 비슷한 감정이겠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은 더욱 절실하게 마음속으로 달려오는 것 같다. 사실 고향이라는 단어는 출생지의 개념도 있겠지만 어릴 적 소중한 추억이 스며있는 공간이면 어디든 고향이라 해도 무방 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아주 오래전, 강원도 산골에서 20대 초반의 나이에 초등학교 2학년 담임으로 근무를 한 적이 있었다. 학교에서 버스를 타는 신작로(新作路)까지의 거리가 150m 정도 되였는데 가을이면 길 양쪽에 여러 가지 색의 코스모스가 활짝 피어 가을바람에 하늘하늘 춤을 추곤 하였다. 또한, 학교 뒤편의 개천을 따라 만들어진 제방(堤防)에도 민들레, 할미꽃, 원추리, 갈대. 버드나무와 이름 모를 여러 들꽃이 흐드러지게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나면 파리를 미끼로 흘림낚시를 자주 했다. 파리를 물 위로 살짝 띄워 흐르는 물을 따라 움직이면 피라미들이 쉴 새 없이 입질했다. 크기도 제법 10cm가 넘었다. 초가을 따스한 햇살의 학교 슬레이트 지붕에 잡은 고기들을 널어놓으면 하루 만에 고들고들 말라 상하지 않게 보관할 수 있어 집에 갈 때 아버님의 주말 밥반찬이나 술안주로 최상의 선물 이였다. 또한, 장마철에 접어들어 큰비가 내린 후 싸리나무로 만든 통발을 논두렁 사이의 도랑에 밤새 놓아두었다가 다음 날 아침에 가보면 붕어, 쏘가리, 미꾸라지, 민물장어가 가득 잡히곤 했다.
그때 내가 가르치던 반의 반장 아이가 지금도 생각이 난다. 그 애는 집이 너무나 가난하여 가을 운동회 때 구입한 검정색 팬츠에 흰 러닝셔츠를 평상복으로 일 년 내내 계속 입고 다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같은 옷을 입고 다니다 보니 셔츠 앞뒤에는 항상 커다란 구멍이 몇 개씩 나 있었다. 그래서 어느 날 그 아이에게 새 팬티와 셔츠를 한 벌 사주었다. 당시 학교 인근 동네에서 하숙하며 주말에는 버스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집에 다녀오곤 했었는데 그 이후 반장 아이는 고맙다는 표시인지는 몰라도 토요일 수업이 끝나고 학교를 나서면 친구들 몇 명과 함께 정류장까지 따라와서는 꾸벅 절을 하면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뽀얀 흙 먼지를 뒤집어쓰고 길가에 늘어선 포플러 가로수의 한적한 시골 길은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학교 주변에 상가라고 해야 구멍가게 하나밖에 없다 보니 수업이 끝나고 나면 마땅히 갈 만한 곳이 없었다. 기껏해야 막걸리 한 사발에 김치 몇 조각이면 족하다. 여가(餘暇)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할 정도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생활이 더 풍족하고 여유로웠던 것 같다. 간혹 육성회장이나 밥술이나 먹는다는 학부형 집에 초대되어 가서 모내기나 벼 타작할 때 밥 한 그릇 대접받는 게 고작 이였다.
한번은 반장 아이의 아버지로부터 자신의 참외밭에 놀러 오라는 연락을 받고 석양이 질 무렵 원두막을 찾았다. 때마침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 원두막으로 올라가 노 오란 참외를 깎아 먹으면서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데 밭 저만치의 제법 큰 수양 버드나무 뒤에서 누군가 이쪽을 훔쳐보고 있는 게 아닌가? 지금 생각해보면, 중학교를 갓 졸업하고 부모님의 농사일을 돕고 있던 반장 아이의 누나가 총각 선생님이 원두막에 놀러 온다는 것을 알고는 호기심으로 설레는 가슴을 두근대며 바라보고 있었던 게 아니었나 하는 오줄없는 생각도 해보았다.
내가 어렸을 적에, 교장으로 근무하시는 아버지를 따라 자주 전학을 다녔다. 고등학교 2학년은 강원도 양구에서 보냈다. 시골학교이다 보니 남녀 공학으로 한 학년에 한 반밖에 없었다. 봄이면 달콤한 아카시아 꽃향기가 운동장은 물론 교실까지 바람을 타고 그윽한 꽃 내음을 안겨주었다. 국어를 가르치셨던 담임 선생님은 재미있게도 성적순으로 자리 배치를 했다. 물론 남자 친구끼리 짝이 될 수도 있지만 내 짝은 여학생이었다. 어쩌다가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농구나 축구를 하고 있으면 그 여학생도 집에 가지 않고 교실 한 모퉁이에서 내가 노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호랑이 지도부 선생님의 눈을 피해 둘이서 가슴을 쓸어 담으며 몰래 극장구경을 갔던 기억도 난다. 그 애의 왼쪽 눈 밑에는 조그마한 혹(惑)이 나 있었는데 유난히 인상적이었다. 푸른 교복에 흰색 카라가 한층 더 청순해 보였던 꿈 많던 여고생 말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추억은 더욱더 나를 금잔디 동산으로 안내해준다. 반장 아이가 여학생이었는데 아주 똑똑하고 귀여웠다. 어느 날 선생님이 마지막 시간에 산수 숙제를 내주면서 답안지를 작성하는 순서대로 집에 가도록 했다. 그 애는 역시 반장답게 제일 먼저 교실 문을 나섰다. 내 자리는 교실창문 바로 옆이었다. 그런데 그 애가 선생님 몰래 정답 쪽지를 창문 밖을 지나서면서 살짝 전해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겁도 났지만, 여학생한테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고 한편으로 철없는 나이였지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지금도 간혹 졸업 사진을 보면서 깊은 상념에 잠기곤 한다. 그 아이는 집이 가난하여 중학교 진학할 형편이 안 되었다. 그래서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시던 담임 선생님께서 3등 안에만 들면 입학금을 대신 납부해 주겠다고 했으나 4등을 하는 바람에 진학을 포기하고 어린 나이에 강원도 철원에서 서울로 운행하는 시외버스 차장으로 일해야만 되는 안쓰러운 사연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지금쯤 내가 가르쳤던 반장 아이도 60을 바라보는 어른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린 소년 김창수로, 그리고 여학생들 또한 나와 같이 노인이 되어 얼굴에는 깊은 주름과 검버섯이 성성하겠지만, 졸업사진의 화사한 소녀의 모습을 내 가슴속에 간직하고자 한다.
살아오면서 부질없는 욕망의 페달을 밟다 보니 세월의 속도가 잔잔한 호수에서 성난 파도로 바뀌고 말았다. 그런데 세월의 소중함이 절실할수록 어릴 적 추억은 저만치서 다가오는 아침 안개처럼 내 몸을 감싼다. 사실 산다는 것 자체가 늦은 밤 막차를 놓치고 아쉬워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사랑의 열매 속에는 슬픈 이별의 씨앗이 함께 자라고 있다는 것도 모르면서 말이다. 아마도 생을 마감하는 순간이 되어서야 최근 유행하는 노랫말의 “바보처럼 살다가 간다고 전해라.” 하면서 떠나겠지……
새해가 밝았다. 더욱이 올해는 내 나이 칠순이 되는 해이다. 지나온 날을 되돌아보면서 부끄럽게 처신하였던 일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다짐해 본다. 그런 의미에서 늦었지만, 멕시코 오지(奧地) 봉사활동도 신년을 맞아 계획하고 있다
나는 오늘 밤도 향토적인 어느 시인의 글을 몇 자 음미(吟味)해보면서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옛날의 금잔디 동산으로, 꿈속에서나마 달려가 본다
마지막엔 돌아가리라
목화 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
고향 가 살다 죽으리
메밀꽃이 하이얗게 피는 촌
조밥과 수수 엿이 맛있는 고을
나뭇짐에 함박꽃을 꺾어오던 총각들
서울 구경이 소원이더니
차를 타보지 못한 채 마을을 지키겠네.
누구나 비슷한 감정이겠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은 더욱 절실하게 마음속으로 달려오는 것 같다. 사실 고향이라는 단어는 출생지의 개념도 있겠지만 어릴 적 소중한 추억이 스며있는 공간이면 어디든 고향이라 해도 무방 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아주 오래전, 강원도 산골에서 20대 초반의 나이에 초등학교 2학년 담임으로 근무를 한 적이 있었다. 학교에서 버스를 타는 신작로(新作路)까지의 거리가 150m 정도 되였는데 가을이면 길 양쪽에 여러 가지 색의 코스모스가 활짝 피어 가을바람에 하늘하늘 춤을 추곤 하였다. 또한, 학교 뒤편의 개천을 따라 만들어진 제방(堤防)에도 민들레, 할미꽃, 원추리, 갈대. 버드나무와 이름 모를 여러 들꽃이 흐드러지게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나면 파리를 미끼로 흘림낚시를 자주 했다. 파리를 물 위로 살짝 띄워 흐르는 물을 따라 움직이면 피라미들이 쉴 새 없이 입질했다. 크기도 제법 10cm가 넘었다. 초가을 따스한 햇살의 학교 슬레이트 지붕에 잡은 고기들을 널어놓으면 하루 만에 고들고들 말라 상하지 않게 보관할 수 있어 집에 갈 때 아버님의 주말 밥반찬이나 술안주로 최상의 선물 이였다. 또한, 장마철에 접어들어 큰비가 내린 후 싸리나무로 만든 통발을 논두렁 사이의 도랑에 밤새 놓아두었다가 다음 날 아침에 가보면 붕어, 쏘가리, 미꾸라지, 민물장어가 가득 잡히곤 했다.
그때 내가 가르치던 반의 반장 아이가 지금도 생각이 난다. 그 애는 집이 너무나 가난하여 가을 운동회 때 구입한 검정색 팬츠에 흰 러닝셔츠를 평상복으로 일 년 내내 계속 입고 다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같은 옷을 입고 다니다 보니 셔츠 앞뒤에는 항상 커다란 구멍이 몇 개씩 나 있었다. 그래서 어느 날 그 아이에게 새 팬티와 셔츠를 한 벌 사주었다. 당시 학교 인근 동네에서 하숙하며 주말에는 버스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집에 다녀오곤 했었는데 그 이후 반장 아이는 고맙다는 표시인지는 몰라도 토요일 수업이 끝나고 학교를 나서면 친구들 몇 명과 함께 정류장까지 따라와서는 꾸벅 절을 하면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뽀얀 흙 먼지를 뒤집어쓰고 길가에 늘어선 포플러 가로수의 한적한 시골 길은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학교 주변에 상가라고 해야 구멍가게 하나밖에 없다 보니 수업이 끝나고 나면 마땅히 갈 만한 곳이 없었다. 기껏해야 막걸리 한 사발에 김치 몇 조각이면 족하다. 여가(餘暇)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할 정도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생활이 더 풍족하고 여유로웠던 것 같다. 간혹 육성회장이나 밥술이나 먹는다는 학부형 집에 초대되어 가서 모내기나 벼 타작할 때 밥 한 그릇 대접받는 게 고작 이였다.
한번은 반장 아이의 아버지로부터 자신의 참외밭에 놀러 오라는 연락을 받고 석양이 질 무렵 원두막을 찾았다. 때마침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 원두막으로 올라가 노 오란 참외를 깎아 먹으면서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데 밭 저만치의 제법 큰 수양 버드나무 뒤에서 누군가 이쪽을 훔쳐보고 있는 게 아닌가? 지금 생각해보면, 중학교를 갓 졸업하고 부모님의 농사일을 돕고 있던 반장 아이의 누나가 총각 선생님이 원두막에 놀러 온다는 것을 알고는 호기심으로 설레는 가슴을 두근대며 바라보고 있었던 게 아니었나 하는 오줄없는 생각도 해보았다.
내가 어렸을 적에, 교장으로 근무하시는 아버지를 따라 자주 전학을 다녔다. 고등학교 2학년은 강원도 양구에서 보냈다. 시골학교이다 보니 남녀 공학으로 한 학년에 한 반밖에 없었다. 봄이면 달콤한 아카시아 꽃향기가 운동장은 물론 교실까지 바람을 타고 그윽한 꽃 내음을 안겨주었다. 국어를 가르치셨던 담임 선생님은 재미있게도 성적순으로 자리 배치를 했다. 물론 남자 친구끼리 짝이 될 수도 있지만 내 짝은 여학생이었다. 어쩌다가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농구나 축구를 하고 있으면 그 여학생도 집에 가지 않고 교실 한 모퉁이에서 내가 노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호랑이 지도부 선생님의 눈을 피해 둘이서 가슴을 쓸어 담으며 몰래 극장구경을 갔던 기억도 난다. 그 애의 왼쪽 눈 밑에는 조그마한 혹(惑)이 나 있었는데 유난히 인상적이었다. 푸른 교복에 흰색 카라가 한층 더 청순해 보였던 꿈 많던 여고생 말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추억은 더욱더 나를 금잔디 동산으로 안내해준다. 반장 아이가 여학생이었는데 아주 똑똑하고 귀여웠다. 어느 날 선생님이 마지막 시간에 산수 숙제를 내주면서 답안지를 작성하는 순서대로 집에 가도록 했다. 그 애는 역시 반장답게 제일 먼저 교실 문을 나섰다. 내 자리는 교실창문 바로 옆이었다. 그런데 그 애가 선생님 몰래 정답 쪽지를 창문 밖을 지나서면서 살짝 전해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겁도 났지만, 여학생한테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고 한편으로 철없는 나이였지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지금도 간혹 졸업 사진을 보면서 깊은 상념에 잠기곤 한다. 그 아이는 집이 가난하여 중학교 진학할 형편이 안 되었다. 그래서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시던 담임 선생님께서 3등 안에만 들면 입학금을 대신 납부해 주겠다고 했으나 4등을 하는 바람에 진학을 포기하고 어린 나이에 강원도 철원에서 서울로 운행하는 시외버스 차장으로 일해야만 되는 안쓰러운 사연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지금쯤 내가 가르쳤던 반장 아이도 60을 바라보는 어른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린 소년 김창수로, 그리고 여학생들 또한 나와 같이 노인이 되어 얼굴에는 깊은 주름과 검버섯이 성성하겠지만, 졸업사진의 화사한 소녀의 모습을 내 가슴속에 간직하고자 한다.
살아오면서 부질없는 욕망의 페달을 밟다 보니 세월의 속도가 잔잔한 호수에서 성난 파도로 바뀌고 말았다. 그런데 세월의 소중함이 절실할수록 어릴 적 추억은 저만치서 다가오는 아침 안개처럼 내 몸을 감싼다. 사실 산다는 것 자체가 늦은 밤 막차를 놓치고 아쉬워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사랑의 열매 속에는 슬픈 이별의 씨앗이 함께 자라고 있다는 것도 모르면서 말이다. 아마도 생을 마감하는 순간이 되어서야 최근 유행하는 노랫말의 “바보처럼 살다가 간다고 전해라.” 하면서 떠나겠지……
새해가 밝았다. 더욱이 올해는 내 나이 칠순이 되는 해이다. 지나온 날을 되돌아보면서 부끄럽게 처신하였던 일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다짐해 본다. 그런 의미에서 늦었지만, 멕시코 오지(奧地) 봉사활동도 신년을 맞아 계획하고 있다
나는 오늘 밤도 향토적인 어느 시인의 글을 몇 자 음미(吟味)해보면서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옛날의 금잔디 동산으로, 꿈속에서나마 달려가 본다
마지막엔 돌아가리라
목화 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
고향 가 살다 죽으리
메밀꽃이 하이얗게 피는 촌
조밥과 수수 엿이 맛있는 고을
나뭇짐에 함박꽃을 꺾어오던 총각들
서울 구경이 소원이더니
차를 타보지 못한 채 마을을 지키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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