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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저강 급행열차

글 박병호 그림 박성현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6-01-22 15:08

한국문협밴쿠버지부 회원기고/동화
 색상도 채도도 없는 시내버스 한 대가 달려와 비둘기호, 무궁화호, 그리고 그 어떤 싸구려 기차도 서지 않는 전동역에 섰습니다. 그날 우리가 차에 타는 순간, 붉은 벽돌의 역사 평지붕에는 밝은 흰색 송이구름이 네 잎 클로버처럼 피어있었습니다. 철로 변 가겟집들도 문 닫은 지가 오래된 죽은 소재지입니다. 문득, 강변역 마을에서 자랐던 엄마가 기차도 서지 않고 강도 없는 곳을 왜 떠나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폐가만큼 늙은 나무에 매달린 대추들이 붉은 심장 꽃으로 보이는 것 외에는 활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지만, 엄마에겐 아빠와의 초년고생이 추억이 되어 버린 곳이랍니다.

“선, 떨리지 않지?” “언니가 있는데 뭘.” 방학 끝 무렵 돌아올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긴 했지만, 우린 어느덧 전의역, 서울역을 거쳐 꿈에 그린 공항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출국절차를 밟아 놓고도 많은 시간이 남아 헐거워진 어깨로 훨훨 날아오르고 싶었습니다. “선, 우리 그 운하 한번 보고 올까?” “언니, 엄마가 절대로 허둥대거나 위험할 행동은 하지 말라고 했지.” 평소에는 동생을 이기고 기어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왔을 텐데 그날은 져 주었습니다. “맞아, 늦어지기라도 하면, 그래 밴쿠버에서 중앙터미널 가는 길과 밴프쯤에서 캔모아에 내려달라고 물어보는 것이나 연습해보자.” 그러나 소풍 전날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듯 영어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숯이 적은 백발의 백인 할아버지와 무성한 은빛 곱슬머리의 백인 할머니가 우리 곁에 다가와 앉았습니다. “어디 가는 길이니?” “아빠한테 가는 길이다. 너는?” 존댓말이 없는 언어로 느리게 말하는 것이 어른 사귀기에는 좋구나 싶었습니다. “밴쿠버 지나 미션에 가는데, 너는?” 선이 서부 캐나다 지도를 꺼내 더듬었으나 찾지 못하자 할아버지가 찾아 주었습니다. “우리는 간다, 캔모아에.”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할아버지의 굵은 손가락은 밴프와 캘거리 사이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아빠가 있나 보다, 거기에.” “응, 산삼을 시험 재배하고 있어, 그곳에서.” “인삼! 알아. 그것이 사람모양인 것을, 자기를 닮았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약초라는 것도.” “캘거리에서 가야겠네?” “아니. 밴쿠버에서 타고 갈 거야.” 왜 멀리 돌아 가냐는 듯 할아버지의 눈이 커진 것을 본 내가 말했습니다. “우리 아빠가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하는 거라고 했거든. 어차피 일찍 도착해서 별도로 다니는 것보다 오가는 길에 가능한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면 그 자체가 여행길이 된다고.”   

“나도 동의한다. 좋아. 늙은 후에는 힘이 들어 쉬운 길로밖에 다닐 수 없으니 젊은 너희는 그렇게 하렴. 그래도 밴쿠버까지는 함께 갈 수 있으니 옆자리가 남아있는지 확인해 봐야겠다.” 그가 일어서려는 순간 내가 한가지 덧붙였습니다. “또, 돌아가는 항공권이 저렴하기도 해. 세상은 너무 공평하지 않아?” “그래, 필시 신이 그렇게 공정한 가격표를 만들어 놓았을 거다. 늙은이는 비싸도 힘 안 들게 다니고, 젊은이는 값싸게 많은 경험을 하도록.”     

할아버지가 어느새 상기된 표정으로 돌아와 말했습니다. “성수기인데도 전염병 때문에 자리가 많이 비어있다고 한다. 빈 자리 잡고 승무원에게 말하면 된다는구나.” 그때서야 경유지가 생각난 내가 할아버지께 고개를 돌리는 순간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니. 선아! 저기 달려오는 저, 엄마 아니야?” “글쎄. 진짜. 엄마네. 엄마!” 선과 엄마는 공항에서 몇 년 만에 만난 연인처럼 서로를 향해 달린 후 연신 포옹을 했습니다.     

엄마는 우리의 자립심을 해치지 않으려고 몰래 와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사히 잘 타는 모습만 보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낯선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모습에 걱정되어 등장했다고 했습니다. 이어 동생이 말했습니다.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때 무릎을 다쳐 한쪽 은 인공이래. 오래 걷지 못한데. 그 전에는 만능 운동선수였다는데. 이후 수영 외에는 해보지 못했대. 하지만 한국을 매우 좋아한대. 우릴 걱정하지는 마 엄마”. 그 순간 할아버지도 엄마에 대해 궁금한 표정이어서 내가 소개하려고 하는데 그가 먼저 꺼냈습니다. “아빠를 보러 가는데. 엄마는 함께 못 가는구나?” “응. 여행경비도 그렇지만 엄마가 우리끼리 가보도록 배려한 거야. 대신 아빠를 잘 설득해서 함께 돌아오기를 원해.

우리 엄마는 가족은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거든.” “너희 아빠는?” “음. 아빠는 반대로 가족은 함께 비행기도 타지 말아야 한다는 거야. 여차해서 다 죽으면 뒷감당은 누가 하느냐고 하시며.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가족이 다 죽은 뒤에 무슨 책임?” “북극곰도 죽으면 상앗빛 가죽을 남기는데 사람은 죽으면 남과 다른 색상이나 채도를 남겨야 한대. 누군가는 죽은 자의 못다 이룬 꿈을 이루고 그에 대한 독특한 이야기를 남겨야 한다는 거야.” 알 듯한 표정으로 변한 할아버지의 모습에 화제를 바꾸어 내가 말했습니다. “깜빡 잊었어. 우리의 항공권은 시애틀 거쳐서 밴쿠버 가는 것을.” “주소와 길을 알려줄게. 만약 캘거리행 완행버스를 놓쳐 대기실에서 밤샘해야 한다면 와서 자고 가.” 엄마는 두 분을 지켜보고 안심이 된 듯했습니다.

“엄마, 두 분이…, 그러니까 자식을 죽인 자를 양자로 삼았던 어떤 분을 기리는 행사에 참가하고 여수 주변을 관광하고 가는 길이래. 그분 알아?” “응, 그 목사님!” “엄마도 아네! 그분에 대해 대화 나눠봐. 몸 섞어 통역해볼게. 좋으신 분들이야. 확실해. 걱정하지 마. 아빠도 잘 설득할게.” 그때까지 시간이 쏜 살처럼 달려갔지만, 그래도 탑승시간은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엄마, 할아버지가 지금까지 자기에게 가장 큰 타격은 한쪽 발을 못 쓰게 만든 한국전쟁이래, 그리고 이번에 오동도에서 휘황찬란한 여수항을 보고 못쓰게 된 한쪽 발이 낳은 결실이 크다는 것을 알고 많이 행복했대. 그래서 한국인을 좋아한대. 자기에게 상처를 준 자와 그 공간을 사랑으로 안아주면 모든 슬픔은 사라지게 된대.” “그래?” “그리고 엄마에게 비행 좌석이 남아있다고 자기 집에 같이 가자고 하는데.” “속옷도, 겉옷도 아무것도 안 가져왔어. 여권과 비자카드는 있다만.” “옷은 할머니가 입던 옷 입고. 먹을 것은 만들어 먹으면 된대. 우리가 바래러 올 때까지 잘 지낼 수 있지?” 우리는 그렇게 거기서 헤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혀 성한 엄마의 마지막 모습이 될 줄은 상상조차 못 한 것이었습니다.



사건은 시애틀에서 선과 내가 대기하고 있던 시각에 발생했습니다. 웨스트코스트 급행열차가 워터프론트역을 출발했습니다. 늦은 오후, 진 파란 하늘 흰 구름을 이고 긴 열차가 미션을 향해 가던 중 바다 끝, 포트무디 굽잇길에서 앞에 오는 화물열차를 보았습니다. 급브레이크를 밟듯 열차가 순간 멈춰서는 통에 몸들이 앞뒤로 크게 진동을 쳤습니다. 그러고는 무슨 일이 있었느냐 싶게 모든 것들이 원상태로 돌아와 있었는데 딱 한 분, 입에서 피를 흘리는 환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바로 우리 엄마였던 것입니다.

바다가 끝나고 강으로 진입하기 직전, 기차가 갑자기 서는 것은 흔한 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어떤 경상자도 발생하지 않아 왔는데, 접싯물에 빠지듯 그 정도의 가벼운 사건에 그런 부상은 처음이라고 합니다. 북한강을 끼고 달리는 경춘 철길을 유난히 좋아했던 엄마가 비슷한 물가를 달리는 이 층 특급열차를 타고 영혼의 잔물결들을 보았나 봅니다. 보면서 꿈에 그리던 남편과의 만남에 흥분이 극에 달해 입 벌리고 혀가 나와 있었다는 추측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아무튼, 한쪽 혀를 깨물어 말을 거의 못합니다, 별명이 ‘방송국 해설가’인 엄마가. 그리고 어깨를 심하게 부딪쳤는지 한쪽 어깨와 팔을 거의 쓰지 못하는데 이상한 점이 그 부분이 바로 오른쪽이라는 것입니다. 창은 왼쪽에 있었는데. 오른손만 써 왔던 엄마는 지금 세수, 먹는 것, 그리고 그 어떤 것도 어설프기만 합니다. 만약 할아버지를 만나기 전의 나였더라면 원망과 비관으로 범벅되어 있을 텐데. 이제는 예전의 내가 아닙니다. 엄마를 아프게 만든 웨스트코스트 급행열차를 미워하기는커녕 혀를 더 깊이 깨물지 않게 한 것에 감사하고 있으니까요.

아빠도 변했습니다. 지금부터는 엄마의 소원대로 하겠다고 엄마 입에 귀를 부치고 한마디라도 더 듣기 위해 필사적입니다. 두 시간 이상 엄마의 해설을 편히 듣지 못하던 아빠가. “허브를 아버지로 삼고 싶다고? 나 말고 그가 사는 곳에서 살고 싶다고?” 허브 할아버지가 강이 내려다보이는 자기 집에서 엄마가 나을 때까지 함께 살자고 하시며 긴 팔로 우리 셋의 어깨를 꼭 안고 넓은 뜰, 가장 높은 언덕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때, 프레이저 강물에서 반사된 흰 구름이 ‘빨간 머리 앤’의 하얀 시다 나무 외벽과 초록 너와 지붕을 닮은 할아버지네 집으로 날아와 뾰족 굴뚝에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저 구름 위 물결을 보면 생각이 짙푸른 블루라군에 빠져버릴 것 같아.” “오! 내 손녀, 괜찮다면 엄마가 나은 후에도 여기 머물 거라, 기차가 멈추지 않는 한. 매일 아침 워터프론트행 급행열차에 꿈을 실어 보내려무나.” 가슴이 벅차오른 나는 이 순간을 선명한 마음 사진기에 담기 위해 지그시 눈을 감았습니다. 그 순간 목화송이 흰 구름이 은빛 글 그림을 달고 굴뚝에서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꿈과 소망은 오가는 기차에, 근심과 걱정은 사라지는 구름에, 건강과 행복은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 (coreits1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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