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할아버지의 보물 상자

손박래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4-11-07 10:17

한국문인협회 캐나다 밴쿠버 지부 회원작/수필
시간이 모이면 세월이고 세월을 쪼개면 시간이다. 과거를 뒤돌아 볼 때도 있고 미래를 머릿속에 그려보기도 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미래보다 과거를 돌아보면서 세월을 가늠해본다. 특히 가을이 짙어지고 첫 추위가 올 때쯤이면 문득 문득 머릿속에 인이 박힌 것처럼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 중에 어린 시절 할아버지 방 귀퉁이에 보물단지처럼 애지중지 다뤄졌었던 상자가 맨 먼저다.

할아버지 방은 굉장히 단조롭다. 우선 방문을 열면 일 년 열두 달 항상 깔려 있는 하얀 풀 먹인 광목담요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오른쪽 벽에는 옷걸이용 대나무가 가로질러 있고 그 위에는 외출용 한복 한 벌이 걸려있다. 천장 가까이 있는 선반에는 망건과 같은 가벼운 물건들이 얹혀있다. 담뱃대와 놋쇠 재떨이도 중요한 구성인자다. 그리고 찬바람이 불면 가을에 수확한 고구마 두어 포대도 숨을 쉬고 있다. 첫눈에 볼 수는 없지만 찬찬히 보면 또 하나의 물건이 있다. 구석진 곳에 뭔가에 덮여있어서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이게 의문의 그 상자. 우린 그걸 보물 상자라 부른다.

오랜 세월 동안, 어른이 되면 한동네에 분가해 살았던 집성촌이라서 4촌, 6촌들이 많았다. 학교가 파하면 누구 할 것 없이 할아버지댁에 모였다. 우선 집이 넓고 먹을게 많았다. 봄엔 딸기를, 여름엔 참외도 먹을 수 있었다. 좀 더 지나면 옥수수랑 고구마도 맛 볼 수 있었다. 큰어머니의 인심도 후했다. 무엇보다 우리가 그곳에 간 이유는 할아버지의 말벗이 되기 위해서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연세가 들어 농사일에서 손 떼고 하루하루를 무료하게 보내고 게셨다. 그 당시 시골에서 노인이 집에서 할 일이란 게 한정 돼 있었다. 닭 모이주기, 소 여물 준비하기, 마당 쓸기, 간혹 텃밭에 거름 얹기 정도였다. 그래서 그런지 어린 손자들이 모여들면 무척 반겼다.

우리가 궁금해 하던 그 상자를 열 때도 있다. 종이를 물에 풀어 만든 그 상자는 꼬맹이가 앉아도 될 정도로 튼튼하다. 내용물은 더 견고하리라 모두 생각한다. 우선 들깨를 섞은 조청을 한 숟갈씩 주신다. 웬만한 정성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게 조청인데 그 귀한 걸 먹는다는게 보통 호사가 아니다.

그다음 코스는 제리다. 이빨 약한 할아버지를 위해 항상 말랑한 과자류가 준비 돼 있었다. 이것도 우리 몫이다. 사실 할아버지는 단걸 별로 안 좋아하신다. 누군가 주면 그냥 그 상자에 채곡채곡 쌓아 두신다.

계절상품인 홍시도 간혹 있다. 이건 시간을 놓치면 식초가 되기 때문에 퍼뜩 소화시켜야 된다는 걸 당신도 잘 알고 계신다. 이걸 우리에게 주시면서 정작 할아버지는 마냥 쳐다만 보신다. 그리고 놀다 지쳐서 쓰러져 할아버지방에 길게 뻗어 잔다. 북풍한파가 몰아쳐도 할아버지방은 쩔쩔 끓는다. 문풍지가 바람 타는 소리가 들려도 방바닥은 맨발로 서 있기 힘들 정도다.

소죽솥이 할아버지 방 아궁이에 걸쳐 있고, 군불용으로 또 짚단 너댓 개를 불길 저 안쪽으로 집어 넣는다. 방바닥이 너무 뜨거워 윗목을 찾아 뱅글뱅글 돌다가 그 중요한 상자를 차기도 한다. 그러나 단 한번도 할아버지 허락 없이는 그 상자를 열어 본적이 없다. 새벽녘에는 모두 할아버지 담요 밑자락에 옹기종기 모여 든다.

어느듯 불기가 그리워지는 초겨울이 왔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사람은 모두 자기만이 간직한 따뜻한 기억이 있으리라 본다. 나는 할아버지방의 그 상자를 생각하면 좀 덜 추운 것 같기도 하다. 정작 받은 걸 돌려 드려야 하는데 당사자는 먼 길을 떠나 버렸다. 훗날 손주가 생기면 할아버지 역할은 어느 정도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끝>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나무들 침묵하다 2023.03.06 (월)
나무 하늘의 교신 뻗은 가지로 한다나무 내민 손 새들을 훔친다나무 저 미친 나무들 제 그늘로 주리를 튼다나무 우듬지에 새 둥지를 흔든다나무 나이에 걸맞은 높이와 넓이로 자라 생성하는 둥근 것 들을 맺는다나무 제 그늘 사람이 즐겨 찾게 한다나무 해와 달과 그림자 놀이한다나무 바람과 이야기를 나눈다나무들 이 많은 사단을 벌여놓고도누가 물으면 그저 침묵침묵이다.
김회자
미나리와 파김치 2023.03.06 (월)
상반된 이미지의 미나리와 파김치는 둘 다 나를 지칭하는 말이다.집에 있을 땐 파김치가 되어 축 늘어져 있다가 문밖을 나서기만 하면 바로 즉시 생기가 돌며 파릇파릇한 미나리가 된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다. 그런데 이 별명을 지어준 사람이 친구가 아닌 울 엄마이다. 그래서 친구들 사이에선 딸의 신체적, 정신적 특징을 정확히 간파하신 훌륭한 어머니로 꽤 인기 있는 우리들의 엄마로 통했다. 감기와 몸살로 이틀 앓고 있으면 울 엄마는 삼 일째...
예함 줄리아헤븐 김
기적 같은 인연들 2023.03.06 (월)
   50살 생일 선물로 줄 멋진 센터피스 꽃 장식을 골라 들고 득의 만만한 얼굴로 계산대로 오던 손님이 갑자기 발길을 멈춰 섰다.근래에 나온 활짝 핀 하얀 서양난 세 그루가 예쁘게 심겨진 화분에 멈춘 시선을 떼지 못하고 환성을 질렀다. 들고 있던 센터피스를 제 자리로 가져다 돌려 놓고, 그 서양난을 들고 왔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인조 서양난이고 값은 두 배나 비싼데 괜찮겠냐고 하니 왜 이렇게 예쁜 꽃을 가짜라 하냐며 장난치지 말라고...
이은세
선운사에서 2023.03.06 (월)
억겁의 세월을 담고침묵하고 있는 검은 초록 연못천 년의 혼으로 켜켜이 쌓은 겸손한 토담 숨쉬기도 바쁜 속세의 삶풍경 소리 잠시 놓아두고 가라 하네포근히 안아주는 어머니 품 같은 선운사근사한 詩語 하나 건져갈 것 없나 하는 이기심에탁한 머리 식히고 가라는 자애로운 부처의 미소도 외면한 채동백꽃과 꽃 무릇 때 맞춰 오지 못한 것이 못 내 아쉬워경내를 건성으로 돌며 고색 찬란한 사찰 분위기를 두 눈에 넣기만 바쁘다설 자란...
김만영
나는 클래식 문외한이다. 평생 즐겨 들은 클래식은 바흐의 무반주 첼로 곡과 비발디의 사계 정도를 꼽을 수 있다. 하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따로 들려주고 어느 계절이냐고 묻는다면 ? ….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과 합창 교향곡은 구분하지만, 베토벤의 곡과 모차르트의 곡은 가르지 못하는 귀를 가졌다. 이렇게 듣는 귀가 없는 사람을 “막귀”라고 한다. “클알못”은 ‘클래식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일컫는 신조어다. 클래식 듣기에 입문한...
김보배아이
어젯밤엔 싸늘한 별 속을 장님처럼 더듬거렸고 오늘 밤은 텅 빈 굴 속에 석순처럼 서 있습니다 내일 밤은 모릅니다 쫀득한 세상이불 속두 다리 뻗고 코나 골고 있을지 딱딱한 궤짝 속 팔다리 꽁꽁 묶인 채 솜뭉치 악물고 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백철현
   거대한 돈의 위력을 등에 업고 세상의 부조리는 날로 커지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우리 삶의 고유한 영역까지 파고들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기나 한 건지 의문을 품게 한다. 그런데도 마이클 샌델 교수는 그의 저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에서 여전히 우리의 삶과 사회 속에는 돈으로 가치를 측정하고 거래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며 그것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옳은 말이지만 사랑도 우정도 돈이 있어야 표현할 수...
권은경
세상에 내린 눈물 2023.02.27 (월)
눈물은 슬픔이요 사랑이라눈물은 감사요 용서라눈물은 빛이요 생명이라눈물은 가슴이요 바다라세상 욕심 하늘을 찔러거짓 속임 빗발쳐울분과 분노의 고열로불신과 절망이 목을 죄검은 세력 헤집는 세상어둠은 슬픔에 얼룩져눈물의 강가를 출렁이더라이제 금저 만치용서의 바다에 내려사랑의 바람 타고감사의 노를 저어생명의 눈물로 헹궈시든 세상을 건져 내가슴의 바다에 눈부셔 가리라
백혜순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