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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14-10-03 11:27

한국문인협회 캐나다 밴쿠버 지부 회원작/수필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나보다 두 살 더 먹은 나의 짝꿍, 김학동이 나에게 묻는다.

“야, 너 우리 반에서 제일 예쁜 여학생이 누군지 아냐?”

“아니.”

나는 그 때까지 이성(異性)을 전혀 몰랐다.  시골 학교라 한 학년에 한 반밖에 없었고 그 절반이 여학생이었지만 나는 누가 예쁜지 관심이 없었다.  

“이런 바보,  제일 예쁜 여학생은 한옥숙, 노순옥, 그리고 신정혜인데 한옥숙은 최정국하고 벌써부터 좋아하고 노순옥이는 나이가 제일 많은데 걔는 내거란 말야.  그러니까 신정혜하고 잘
해 봐.”

나는 눈이 번쩍 띠였다.  짝꿍의 말을 듣고 보니 참말로 그 세 여학생이 제일 예쁘게 보였다.  그 후 나는 그들에게 관심이 많아졌고 특별히 신정혜에게는 무엇인가 끌리는 데가 있었다.  부잣집 맏며느리같이 우아하고 믿음직한 그녀가 점점 더 좋게 느껴졌다.
나는 그때 반장을 하고 있었는데 숫기가 별로 없었다.  내가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후로는 반장노릇 하기가 더 힘들었다.  선생님이 여학생 중 하나를 불러오라고 하면 나는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는 동안 한옥숙은 최정국과 너무 가까워졌다.  시험 볼 때 머리 좋은 최정국이 한옥숙을 조금 도와 준 모양이다.  학생들은 벌떼처럼 덤벼들었다.  그러지 않아도 둘 사이가 너무 가까
워서 질투심이 생겼는데 커닝(cunning)을 다 하다니.  자치회(自治會) 시간이면 아주 신랄하게 비판하고 노는 시간이면 그들을 왕따 시켰다.  최정국은 할 수 없이 서울로 전학을 하고 말았다.  
그 후, 반(班)은 조용했고 남학생과 여학생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김학동이도 마음만 있었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나는 선생님 지시에 따라 가끔씩 학생들 숙제를 검사했는데 신정혜의 숙제는 언제나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여러 번 읽어 보곤 했다.  작은 시골 학교에서 남녀가 매우 유별(有別) 하니 서로 훔쳐보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6학년 초(初)의 일이다.  내 책가방이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몹시 당황했다.  그러나 수선은 떨지 않았다.  몇 시간 후 가방은 다시 제 자리에 와 있었다.  아마도 신정혜가 한 일이라고 짐작했다.  나에게 관심이 있다는 표시로.  내 자신이 그녀에게 관심이 많았으니 그도 내 눈빛에서 무엇인가를 읽었겠지.  말 없는 대화라고나 할까?  공부도 잘하고 적극적인 성격을 가진 그녀가 내가 서울로 이사 간다는 소문을 듣고 나에게 무엇인가를 전하고 싶어서 한 제스처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우리 가족은 내가 6학년 1학기를 마치자마자 서울로 이사했다.  그녀에게 눈인사도 하나 제대로 못 하고 서울로 떠나 온 나는 중학교 입학시험 준비에 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 고등학교 다니면서 한국동란을 치루고 특히 고등학교시절은 고학하면서 정신없이 지냈다.  

가난한 고학생이지만 일류대학교 교복을 입고 뽐내던 시절, 하루는 저녁시간에 서울 문안에서 버스를 타고 우리 집이 있는 영등포로 나오는데 차내에서 그녀를 보고 깜짝 놀랐다.  나는 서
있는 자세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제하면서 앉아 있는 그녀를 슬금슬금 훑어보았다.  건강한 몸매에 둥근 얼굴, 말수는 적지만 언제나 열심히 공부하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던 그녀의 옛 모
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하지만, 어두운 밤, 8년 만에 만나 보는 사람이니 확신을 할 수가 없다.  

버스가 영등포 시장 로터리에 서자 그녀가 내렸다.  내가 내릴 역은 아니지만 나도 허둥지둥따라 내렸다.  그리고 약 20미터쯤 따라가서 그녀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혹시, 신정혜 씨 아니십니까?”
“아닌데요.”  그녀는 어름보다도 더 차갑게 대답하고는 더 빨리 걸어서 달아났다.  몹시 실망했다.  그렇게도 닮은 사람이 있다니.
“미안합니다.”  나는 그 순간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도 보고 싶어 했던 그녀를 만난 환희가 한순간에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그 후 그녀가 영등포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그녀의 조카뻘 되는 사람에게서 들었다.  그러나 영등포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조실부모(早失父母)하고 물려 받은 재산은 너무도 많지만 세 동생을 돌보기 위하여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는 후문(後聞)도 들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씨름선수로도 유명했고 근동(近洞)에서는 유일하게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을 지니고 살았었다.
그렇다면 버스에서 만난 그녀는 진정 신정혜가 아니었을까?  그녀는 왜 나에게 그다지도 차갑게 대하였을까?  내가 입은 교복을 보고 요샛말로 쪽팔리기라도 한 것일까?  만약 그녀가 나의
어려운 가정사정과 고학으로 찌들어진 나의 고달픈 삶을 읽을 수 있었다면 그녀는 도리어 나를 동정하지 않았을까?  

십여 년 전 내가 고국을 방문했을 때 고향에 가서 동창들을 만나고 그녀의 소식을 물었으나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가 서울로 떠나갔다는 것 밖에는.
우리네 인생길에는 참으로 고갯길도 많고 갈림길도 많다.  이러한 고갯길, 갈림길에서 어떠한 결심을 하느냐가 그 사람의 일생을 좌우하는 것이 아닐까?  그녀와 헤어진 지 거의 70년이 된 지금도 왜 그녀의 생각을 문득문득 하게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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