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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충이 떼의 습격

박정은 (Kristine Kim)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4-08-15 10:02

한국문인협회 캐나다 밴쿠버 지부 회원작/수필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배운다. 사실 산다는 것 자체가 평생교육원에 등록한 것과 같다. 삶은 여러 방법으로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는데, 그 중 상당히 이해하기 어려운 게 보이는 것 밑으로 전혀 다른 의미의 진실을 숨기고 있는 경우이다. 때론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삶이 지닌 역설을 이해해야만 한다.

앨버타 북쪽에 있는 스몰 타운에서 산지가 벌써 12년이 되어간다. 상당히 오랜 시간 한 곳에서 살다 보니 지난여름엔 십여 년 만에 한 번씩 온다는 송충이 떼의 습격을 받았다. ‘송충이 떼의 습격’이라는 표현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을 만큼 엄청난 군단의 송충이들이 뒤쪽 숲에서 파도처럼 우리 집을 향해 밀려왔다. 숲 하나를 먹어치우는데 걸리는 시간이 고작 2,3일이니, 우리 뒷마당의 나무 몇 그루를 먹는데는 아마 눈 깜짝할 사이면 충분할 것이었다. 하지만 나에겐 꼭 지켜야 할 나무가 있었다. 처음 결혼해서 한국에서 살 당시에 높은 지대에 전세방을 얻었었다. 주택가 골목을 한참 올라야만 집에 갈 수 있었는데, 오르다 너무 지치면 잠시 쉬어 가는 곳이 라일락 향기가 피어오르는 어느 집 담장 아래였다. 그 아래 서서 남편과 난 언젠가 우리도 집을 갖게 되면 이런 향기와 그늘을 나눠주는 라일락을 심자는 약속을 했었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이 집으로 이사하던 첫 날, 우린 뒷마당에 라일락 두 그루를 심었다. 바로 그렇게 심어 키운 라일락이 지금 송충이 떼에 휩쓸려 사라질 판이었다.

남편과 난 송충이 퇴치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송충이에게 물을 쏘아도 보고, 교대로 긴 막대를 들고 나무 지킴이가 되어 나뭇잎을 향해 기어오르는 송충이 행렬을 털어내기도 하고, 나중엔 가위를 들고 잎사귀에 붙은 송충이를 반으로 잘라 죽이는 방법까지 다 써봤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숲을 다 먹어치우고 다른 나무를 찾아 이동하는 송충이 떼로 온 동네와 도로가 까만색으로 변해갔다.

송충이들이 고속 도로 위를 횡단하는 바람에 차들이 미끄러지고, 인근의 모든 숲들이 나뭇잎을 잃어 겨울 숲으로 변했다는 뉴스가 지역 신문을 장식할 뿐 어디에도 송충이 퇴치방법은 없었다. 나중엔 한국식으로 머리를 써서 고춧가루 강을 만들어 나무를 에워싸는 방법까지 써 봤지만,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듯 죽은 송충이를 딛고 끝내 강을 건너는 송충이들을 보며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한국 전쟁 당시 중국군이 인해전술을 썼다면 송충이에겐 충해전술이 있었다. 강물처럼 밀려드는 송충이들로 뒷마당은 결국 잔디밭이 아닌 송충이 바다로 변해갔다.

우리의 가열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끝내 라일락 한 그루가 모든 잎을 잃었고, 고치를 트느라 송충이가 뽑아내는 하얀 거미줄에 에워싸여 유령 나무로 변해갔다. 남은 한 그루라도 지키려 고군분투하는 우리를 보고 이웃집 데이브가 오더니 랩으로 나무의 몸통을 에워싸고, 그 위에 공업용 윤활제를 바르라고 일러줬다. 진짜 송충이는 미끄러운 비닐 위를 기어오르질 못하고 계속 밑으로 떨어졌다. 이런 완벽한 방법이 있었는데 데이브는 왜 자기네 나무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까? 이해할 수 없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래도 우리가 한 그루의 라일락이라도 지켜냈다는 것이었다. 모든 송충이가 고치를 틀고 사라진지 한 달이 지났을 무렵 가지만 앙상하던 숲에 녹색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무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회춘하듯 다시 잎이 나고 있었다. 나무들은 하루가 다르게 푸르러졌고, 내가 지켜낸 라일락보다도 모든 잎을 잃고 말라가던 라일락 나무가 더 푸르고 왕성하게 가지를 뻗어 잎을 내기 시작했다.

그 나무들과 마주하고 앉아있자니 문득 어린 시절 보리밟기 생각이 났다. 보리는 엄동설한에 얼굴을 내민다. 서릿발로 얼부푼 땅을 뚫고 파릇파릇 돋아 난 어린 싹을 밟으라니, 어린 난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었다. 그래야 보리가 더 잘 자란다는 할머니의 말을 그땐 그저 흘려만 들었는데 이제야 그 말의 의미가 뚜렷이 다가왔다. 밟아줄수록 더 튼튼히 자라는 보리처럼, 생명 있는 것들은 시련을 당하면서 더 강해진다. 생명에 위협을 받을 때, 그 생명력은 더 강하고 왕성해지는 것이다.

사람의 세상살이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살면서 겪게 되는 무수한 시련들, 그것들이 꼭 부정하고 싸워야만 할 대상이었을까? 시련과 고난이라는 삶의 조각들도 인생이라는 전체 그림에서 본다면 큰 의미를 지니는 중요한 조각들인 것이다. 그러니 어떤 힘겨운 일이 닥치더라도 그 시련이 지나고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니체의 말을 난 그 뒤론 자주 되뇐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죽지만 않는다면 결코 삶 밖으로 내가 쫓겨날 일은 없는 것이다.

다음에 다시 송충이 떼가 몰려온다면 그땐 싸우지 않으리라. 옆집 데이브가 퇴치법을 알면서도 그냥 내둔 이유를 이젠 알았기 때문이다. 나무를 죽일 것 같았던 송충이가 사실은 나무를 더 강하게 만들고 떠났다. 삶의 많은 난관들은 싸워서 이기는 게 아니라 그냥 지나가도록 허락하고, 그 시간들을 견디는 것만이 유일한 답일 때가 있다. 어떤 이의 말처럼 인생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그저 경험해야 할 신비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잎을 잃고 유령나무가 되어서 그 힘겨운 시간을 견딘 라일락 나무가 올해엔 더 부쩍 크게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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