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에 결혼 연령이 된 자녀를 둔 부모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자녀들이 눈이 높아서 쉽게 짝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상대방을 두고 눈이 높아서 쉽게 구하지 못한다는 말은 서로가 상대방에 대한 구체적인 배려가 없이 자기 입장에서만 보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키에르케골이라는 덴마크철학자의 비유에 나오는 이야기 이다.
어느 나라의 왕자가 시골로 사냥을 나갔다가 예쁜 시골처녀를 만나 한 눈에 반하게 되어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다. 왕궁으로 돌아온 왕자는 신하를 시켜 처녀에게 정식으로 청혼을 했으나 신분이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결혼을 거절당하고 말았다.
왕자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녀를 아내로 삼을 수 있었지만, 그는 자기가 시골 처녀를 사랑하는 만큼 시골처녀도 자기를 사랑해주기를 바랬다. 왕자의 소원은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라 쌍방 간의 사랑이었다. 자기의 권위와 영광이 아닌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했던 것이다.
시골 처녀에 대한 사랑의 열기를 식히지 못한 왕자는 어느 날 밤 평민의 옷차림으로 왕궁을 떠나 시골 처녀가 사는 마을로 내려가 물레방앗간을 사서 경영하게 되었다.
열심히 방앗간 일을 보며 방아를 찧으러 오는 시골처녀에게 최선을 다해 사랑과 친절을 베푼 나머지 시골처녀의 마음을 움직이게 되었고 마침내 처녀는 물레방앗간 청년의 청혼을 받아드려 결혼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눈높이를 맞출 줄 아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수고와 땀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눈높이를 맞추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가정생활이나 사회생활이나 심지어 교회 생활도 서로 눈높이를 맞추며 살아갈 때 평안과 행복이 있게 된다.
우리 부부에게도 밤중에 아이들을 잠제우기 위해 성경이야기를 해 줄 때가 있었다. 그때 우리는 아이의 수준에 맞춰 기도하고 이야기 해 주어야 했다
하나님이 인간 예수님으로 오신 것도 죄인들을 위해 아이처럼 되어준 사건이다. 그것은 높고 높으신 하나님께서 낮고 낮은 인간에게 눈높이를 맞추어준 사건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눈높이를 맞추어 주신 모습을 간략히 기록하고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참으로 하나님은 겸손한 분이시다. 겸손은 원래 헬라어로 humus, 흙이라는 단어이다. 이는 “땅바닥으로 내려간다.” 는 뜻이다. 반면에 교만은 hu pe re pha nos 라는 말로, “다른 사람들 위에 자신을 올려놓는다.”는 뜻이다.
너무나 대칭적이다. 동등함이 아니라 내려가느냐, 올라서느냐 이다. 이는 서로의 눈높이가 너무나 도 다르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눈높이를 보통 사람들은 제 되로 이해하기가 머무나 힘이 든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가다 보면 이 엄천 난 눈높이를 이해한 사람을 만나볼 수가 있는데 그가 바로 사도바울이다. (고린도후서 9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 당시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자유 하였으나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많은 사람들을 얻고자 함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율법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아래 있는 자들과 같이, 율법이 없는 자들에게는 율법 없는 자 같이,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자와 같이, 여러 사람에게는 여러 모양으로 된 것은 아무쪼록 그 중에 몇몇 사람들이라고 복음에 참여시키고자 함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렇다. 눈높이는 보통사람들에게는 높낮이 조절밖에 할 수 없다. 그리고 언제나 위에서 내려다보는 쪽을 선택하게 되는데 문제가 있게 마련이다.
서로가 다른 눈높이는 상대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되돌아오는 그 반향으로 자신의 존재를 잊고 방황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상대의 눈 속에 내가 담겨있지 않은 한 무엇을 통해서도 나를 확인 할 어떤 방법도 없게 되는 것이다.
좋은 것만 보고 찾는 버릇을 두고 우리는 눈이 높다고 한다. 이 말을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비위에 거슬리거나 불쾌한 감정을 담아서 사용되는 양면성이 있다.
아무튼 ‘눈높이’는 선한 목적으로 잘 사용하면 신앙의 수준을 업그레드시키는 데 실제적인 도움이 된다.
사람은 눈으로 보는 것을 생각하게 되고, 마음에 있는 생각은 그 사람의 행동을 결정하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하게 된다.
눈높이가 이 땅 세상에 고정되어 있으면 세상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신앙의 눈높이가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으면 비록 땅에 발을 딛고 있어도 삶은 영적으로 고상해진다.
'눈높이 신앙'에서 눈높이가 땅이라면 신앙은 자라지 못한다. 땅의 가치를 기준으로 하여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우물 밖의 넓은 세상인 신령한 은혜를 맛볼 수 없는 것이다.
'눈높이 신앙' 내 자신의 눈높이는 어디인가? 당장 나타날 현실의 유익을 좇느냐 아니면 내세의 유익을 좇느냐? 목표에 따라 밖으로 관심이 흩어질 수도 있고 내면으로 모아질 수도 있다.
결과도 썩어질 육체를 위한 열매를 맺을 수도 있고 우선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해지는 길로 나아갈 수도 있다.
지금은 신령한 유익을 위한 삶의 도구로 우리네 신앙의 눈높이가 제대로 맞추어져 있어야 할 때이다.
상대방을 두고 눈이 높아서 쉽게 구하지 못한다는 말은 서로가 상대방에 대한 구체적인 배려가 없이 자기 입장에서만 보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키에르케골이라는 덴마크철학자의 비유에 나오는 이야기 이다.
어느 나라의 왕자가 시골로 사냥을 나갔다가 예쁜 시골처녀를 만나 한 눈에 반하게 되어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다. 왕궁으로 돌아온 왕자는 신하를 시켜 처녀에게 정식으로 청혼을 했으나 신분이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결혼을 거절당하고 말았다.
왕자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녀를 아내로 삼을 수 있었지만, 그는 자기가 시골 처녀를 사랑하는 만큼 시골처녀도 자기를 사랑해주기를 바랬다. 왕자의 소원은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라 쌍방 간의 사랑이었다. 자기의 권위와 영광이 아닌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했던 것이다.
시골 처녀에 대한 사랑의 열기를 식히지 못한 왕자는 어느 날 밤 평민의 옷차림으로 왕궁을 떠나 시골 처녀가 사는 마을로 내려가 물레방앗간을 사서 경영하게 되었다.
열심히 방앗간 일을 보며 방아를 찧으러 오는 시골처녀에게 최선을 다해 사랑과 친절을 베푼 나머지 시골처녀의 마음을 움직이게 되었고 마침내 처녀는 물레방앗간 청년의 청혼을 받아드려 결혼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눈높이를 맞출 줄 아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수고와 땀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눈높이를 맞추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가정생활이나 사회생활이나 심지어 교회 생활도 서로 눈높이를 맞추며 살아갈 때 평안과 행복이 있게 된다.
우리 부부에게도 밤중에 아이들을 잠제우기 위해 성경이야기를 해 줄 때가 있었다. 그때 우리는 아이의 수준에 맞춰 기도하고 이야기 해 주어야 했다
하나님이 인간 예수님으로 오신 것도 죄인들을 위해 아이처럼 되어준 사건이다. 그것은 높고 높으신 하나님께서 낮고 낮은 인간에게 눈높이를 맞추어준 사건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눈높이를 맞추어 주신 모습을 간략히 기록하고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참으로 하나님은 겸손한 분이시다. 겸손은 원래 헬라어로 humus, 흙이라는 단어이다. 이는 “땅바닥으로 내려간다.” 는 뜻이다. 반면에 교만은 hu pe re pha nos 라는 말로, “다른 사람들 위에 자신을 올려놓는다.”는 뜻이다.
너무나 대칭적이다. 동등함이 아니라 내려가느냐, 올라서느냐 이다. 이는 서로의 눈높이가 너무나 도 다르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눈높이를 보통 사람들은 제 되로 이해하기가 머무나 힘이 든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가다 보면 이 엄천 난 눈높이를 이해한 사람을 만나볼 수가 있는데 그가 바로 사도바울이다. (고린도후서 9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 당시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자유 하였으나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많은 사람들을 얻고자 함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율법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아래 있는 자들과 같이, 율법이 없는 자들에게는 율법 없는 자 같이,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자와 같이, 여러 사람에게는 여러 모양으로 된 것은 아무쪼록 그 중에 몇몇 사람들이라고 복음에 참여시키고자 함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렇다. 눈높이는 보통사람들에게는 높낮이 조절밖에 할 수 없다. 그리고 언제나 위에서 내려다보는 쪽을 선택하게 되는데 문제가 있게 마련이다.
서로가 다른 눈높이는 상대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되돌아오는 그 반향으로 자신의 존재를 잊고 방황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상대의 눈 속에 내가 담겨있지 않은 한 무엇을 통해서도 나를 확인 할 어떤 방법도 없게 되는 것이다.
좋은 것만 보고 찾는 버릇을 두고 우리는 눈이 높다고 한다. 이 말을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비위에 거슬리거나 불쾌한 감정을 담아서 사용되는 양면성이 있다.
아무튼 ‘눈높이’는 선한 목적으로 잘 사용하면 신앙의 수준을 업그레드시키는 데 실제적인 도움이 된다.
사람은 눈으로 보는 것을 생각하게 되고, 마음에 있는 생각은 그 사람의 행동을 결정하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하게 된다.
눈높이가 이 땅 세상에 고정되어 있으면 세상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신앙의 눈높이가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으면 비록 땅에 발을 딛고 있어도 삶은 영적으로 고상해진다.
'눈높이 신앙'에서 눈높이가 땅이라면 신앙은 자라지 못한다. 땅의 가치를 기준으로 하여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우물 밖의 넓은 세상인 신령한 은혜를 맛볼 수 없는 것이다.
'눈높이 신앙' 내 자신의 눈높이는 어디인가? 당장 나타날 현실의 유익을 좇느냐 아니면 내세의 유익을 좇느냐? 목표에 따라 밖으로 관심이 흩어질 수도 있고 내면으로 모아질 수도 있다.
결과도 썩어질 육체를 위한 열매를 맺을 수도 있고 우선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해지는 길로 나아갈 수도 있다.
지금은 신령한 유익을 위한 삶의 도구로 우리네 신앙의 눈높이가 제대로 맞추어져 있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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