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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의 나라로 간다5

김해영 시인 haeyoung55@hotmail.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2-09-17 14:56

녹색 우림에 밴 노다지의 꿈




-    캐년 시티에서 쉽 캠프까지

 잘 자고 일어났다. 평정심 덕분일 줄 알았더니 모기 램프 덕분인 듯. 둘러 메지도 못할 만큼 짐을 많이 꾸려 걱정스럽던 팀원의 배낭에서 나온 램프가 텐트 앞에 놓여있다.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 조금 불편해도 묵묵히 따라주는 팀원들과의 남은 일정이 훈훈할 듯.

 7월 23일, 트레일 이틀째 아침은 흐릿하다. 기상예보는 하루 살풋 비(10mm이내), 하루 흐림이었다. 오늘이 살짝 비라면 다행. 칠쿳 패스를 타는 내일은 구름일 테니까. 이슬 송알송알 맺힌 텐트를 걷어 배낭을 꾸려두고 빈 몸으로800m  전방에 있는 캐년 시티 유적지(Canyon City Ruins)를 보러 간다. 강가에 아직 꿈에 빠져 있는 몇 채의 텐트가 있다. 여기라면 강바람이 불어 모기를 피할 수 있었을 텐데.. .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리 해도 늦다.

 이정표가 있는 지점에서 왼쪽, 흔들다리를 건너면 고요한 녹색 수림이 나온다. 입구에 나동그라져 있는 녹슨 오븐과 케이블, 숲속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대형 보일러가 캐년 시티의 번성기를 짐작케 한다. 비록 2년(1898~1898 년)밖에 가지 않았지만 이곳은 24개의 비지니스(호텔,이발소, 살롱, 레스토랑, 우체국, 의료시설,부동산 사무실, 운송회사 두 개)가 몇 블록에 걸쳐 큰 커뮤니티를 형성했다고 한다. 지긋이 눈을 감고 시간의 필름을 되감아본다. 




  흩어진 나무토막들이 일어나 캐빈이 되고 찢어져 나풀거리는 천조각들이 모여 캔버스 텐트가 되면 옛 골드타운이 살아난다. 밤이면 눈빛 이글거리는 사내와 억센 사내의 팔에 안겨 춤추는 무희들의 실루엣이 캔버스 천막에 아른거리고, 날이 새면 짐을 가득 실은 개썰매에 채찍을 휘두르며 얼음호수를 달리는 파이오니아들. 영화 속 장면처럼 휙휙 눈앞을 스쳐간다. 그들은 알았을까? 그 성성한 젊음과 욕망이 푸른 녹을 쓰고 이렇게 나뒹굴 줄을. 먼 훗날, 그 욕망의 흔적을 좇아 조그마한 여인이 이곳을 찾아 헤매일 줄을. 녹색 우림에 알알이 밴 노다지의 꿈을 훑으며 캠프장으로 돌아온다.

 나무뿌리,돌부리 엉긴 몇 미터를 지나면 갑자기 훅 올라채는 길이 나온다. 먼저 출발했던 젊은이 한 쌍을 추월하고 야금야금 올라가는 대목부터 팀원 중 두 사람이 뒤처진다. 녹색 이끼 낀 바위에 기대어 한참을 기다렸다가 “둘씩 움직이자.” 선언을 하고 홀가분하게 내달린다. 물소리가 갈수록 멀어진다. 산중턱을 걷고 있구나 싶은데 트레일이 자갈길로 바뀐다. 지도에 의하면 캐년 시티에서 쉽 캠프까지 지독한 진흙탕 구간이란다.  질퍽거림을 방지하느라 둥근 나무 토막을 박아두거나 자갈돌을 깔아두었는데 걷기가 영 사납다. 녹색 카펫트 길이었으면 참 포근하고 아름다웠을 텐데… . 자연보다 사람의 편리가 우선인 미국인들의 운치없는 면모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산허리를 감고 한참 오르는 성싶더니 어디선가 시원한 물소리가 들린다. 작은 나무다리가 나오고 산턱에서 쏟아지는 폭포가 난간을 적신다. 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오르막길에서 또 한 팀을 앞선다.



 발에 발동기가 달린 것 같다. 적요의 숲을 걸으면 머리는 텅 비고 어깨도  홀가분한데 발만 바쁘다.(아무리 무거운 배낭도 멜 때만 무게를 느낄 뿐 한참 걷다 보면 무게를 잊는다. 그래서 싈 때도 배낭을 내려놓지 않는다.) 누가 추격하는 것도 아니고, 1,2위를 다투는 마라톤도 아닌데 왜 이리 숨가쁘게 달리지? 나도 그 옛날의 스템피더처럼 허황한 꿈을 좇아 내달리는가? 

 레저 중에 산행처럼 정직하고 성실한 여가활동이 없다. 한 치의 요령과 사기가 끼어들 틈이 없다. 흰 구름 걸려있는 까마득한 고갯마루도, 산 너머너머 아득한 산마루도 정직한 한 걸음으로 다다르게 된다. 산행은 참으로 긴 적막과 고독을 홀로 견뎌야 하는 수행의 길이다. 까닭없이 오르고 내리는 길을 절망과 싸우며 가는 명상과 철학의 길이다. 그래서 벅찬 산행을 다녀온 이는 나름 철학자가 된다.

 오르기만 하는 산길은 없다. 삐추룸이 옥색 옷고름이 보이는가 싶더니 강둑에 선다. 게시판에 ‘겨울의 얼음 하이웨이’라 쓰여있다. 겨울철에 얼어있는 물길을 이용해 개썰매로 물건을 수송했다는 설명과 그림이 함께 있다. 바위가 많고 물길이 좁은데 개썰매가 어찌 달렸을까? 궁금해하는 사이 흔들다리를 하나 더 건너고 내리막길, 그러다  폭이 넓은 강가에 이른다.

 텐트를 쳤음 직한 공터가 나오고 그 곁 나무 그루터기에 선착객이 쉬고 있다. 나이 지긋한 노부부 한 쌍이 서로를 챙겨주며 다독이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 인생의 황혼녘에 홀로 아닌 둘이서 이 심산을 찾아 나선 용기가 부럽다. 고운 풍경을 뒤로 하고 한 걸음 옮기면 플레전트 캠프장. 옛사람의 기쁨에 찬 환호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천막집(Warm Hut)과 아웃하우스를 오른쪽으로 보며 오른다. 간혹 갈림길이 나오지만 강가로 내려가는 길을 버리고 산으로 오르는 길을 고른다. 골짜기를 끼고 정다운 오솔길을 따라 오르는지도 모르게 올랐다가 툭 떨어지면서 웬지 퀭해 보이는 바닥에 내려선다. 그곳에 눈사태 주의 게시판이 서있다. 세 군데의 눈사태 구간 중 첫번째. 어쩐지 휑뎅그레하더라. 그리고 갈림길. 왼쪽으로 레인저 스테이션 지붕을 보고 오른쪽 물 자박자박한 길을 따라 쉽 캠프장으로 쏙 들어간다. 성해 보이는 목조건물 밖으로 붉은 망 울타리가 처져있다. 보수 중인 모양. 세 채의 천막집 중 금방 지어 시더향 가득한 새 천막집에 들어선다. 



 우리가 쉽 캠프 첫 입주자다. 젖은 옷을 말리기 위해 벽난로에 불을 지핀다. 다른 팀들이 우리집(?)에 발을 못 붙이게 옷가지와 음식 보따리들을 주욱 늘어 놓는다. 30여 분 지나 뒤팀이 뛰어들어오고 계획한 대로 서양인 하이커들은 문을 열어보곤 다른 쉘터로 든다.  덕분에 편안하게 늦은 점심(오후 3시)을 끓여먹고 가랑비에 젖은 옷가지들을 널어 말린다. 그땐 안락함의 마귀에 홀려 까맣게 잊었다.

비상쉘터를 다른이들과 나누어써야 한다는 것을. 오후 내내 제 집처럼 들어앉아 비를 피하다가 오리엔테이션 시간에야 엉덩이를 떼면서 조금치도 미안함을 못 느끼다가 떠날 적에야 뒤늦게 찾아드는 양심의 가책.



 저녁 7시 30분, 레인저가 와서 칠쿳 트레일의 역사와 자연, 그리고 골드러시 시대에 대해 설명, 사진 및 자료들을 많이 제시해서 참 이해하기 쉽다. 그리고 패스 정보. 새벽에 출발하여 정오 이전에 패스 서밋에 닿을 것. 45 도 경사의 바위지대는 하이킹 스틱을 접고 네 발로 기어가는 게 안전하다. 물을 마시거나 쉴 때 뒤를 돌아보지 말 것. 배낭 무게 때문에 굴러 떨어질 위험이 있다는 말에 모두들 안색이 창백해진다. 아, 악명 높은 칠쿳 패스를 잘 넘어갈 수 있을까? 한기가 훅 끼친다.

 잠자리까지 따라온 한기와 텐트를 톡톡 치는 빗방울 소리, 새벽 3시에 일어나야 하는데. 잡념을 몰아내고 잠이 든 게 12시.


 *쉽 캠프장(Sheep Campsite): 20.4km 지점, 미국에 속해있는 마지막 캠프장. 양 사냥꾼들의 베이스캠프였던 곳. 노다지꾼들이 패스를 넘기 전 험한 날씨를 고르며 머물렀던 곳으로, 16개의 호텔, 14개의 레스토랑,13개의 서플라이 가게,5 명의 의사와 약국, 3 개의 살롱, 2 개의 댄스홀과 세탁소, 한 개의 병원과 목욕탕, 목재소,우체국 등 거주 서비스업 종사자가 무려 6000~8000명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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