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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일곱 번째 이야기 – 르네상스 시대의 저작권

이정운 변호사 piercejlee@hotmail.com 글쓴이의 다른 글 보기

   

최종수정 : 2012-07-23 20:55

흔히 르네상스라고 하면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같은 이탈리아의 미술가를 떠올립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15, 16세기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였던 피렌체에서 활동했다는 것인데요. 당시 피렌체, 밀라노, 로마, 베네치아 같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는 유럽 미술의 중심지였습니다. 


르네상스가 이들 도시국가에서 꽃을 피운 데는 경제적인 이유가 있었는데요. 당시 이곳들은 유럽과 동양을 잇는 무역의 거점으로 큰 호황을 누리고 있었고, 이 호황 속에 탄생한 많은 부유한 상인이 예술로 눈을 돌리면서 르네상스란 불씨에 연료를 제공했던 것이지요. 


이러한 유럽미술의 부흥기를 틈타 큰 부를 축적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복제 전문가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 (Marcantonio Raimondi) 였습니다. 라이몬디는 15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동판화가로 미술가로서의 역량은 크게 인정받지 못했지만, 거장의 작품을 모방하는 데만은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재능을 바탕으로 돈을 버는데 남다른 재주를 가지고 있었지요. 


라이몬디의 초기 작품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ürer) 의 목판화를 모각 (模刻) 한 것인데요. 독일 르네상스의 아버지로 불리는 뒤러는 라이몬디보다 고작 10살 남짓 많았지만 탁월한 실력으로 20대에 이미 큰 유명세를 치르고 있었습니다. 특히 그의 섬세하고 생동감 넘치는 목판 화첩은 유럽 곳곳에서 큰 인기를 끌었지요. 


1506년 무렵 베네치아 (Venice, 베니스) 에 머물던 라이몬디는 뒤러의 목판화집을 접하고 크게 감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의 남다른 사업적 안목을 발휘해 뒤러의 작품을 대규모로 모각하기 시작하는데요. 신기에 가까운 뒤러의 목판 실력을 재현하기 위해 동판을 대신 사용하긴 했지만, 결과물은 원본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했고, 라이몬디는 짭짤한 이익을 거두었습니다. 


저작권의 개념이 희미했던 당시 거장의 작품을 모사하는 일은 흔했습니다. 하지만 라이몬디의 행동은 당시 기준으로 봐도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았는데요. 특히 그는 알파벳 A 안에 D가 들어간 뒤러의 고유문양까지 그대로 베껴 사는 사람이 위작임을 알 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판화의 특성상 위작의 수가 어마어마했다는 것도 큰 문제였지요. 


이러한 사실을 접한 뒤러는 크게 분노하였고 베네치아 법원에서 라이몬디를 고소하였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라이몬디에게 뒤러의 고유문양을 베끼지만 않는다면 그의 작품을 계속 모방해도 좋다는 판결을 내렸는데요. 현대적인 저작권의 개념이 확립되기 무려 200년 전 법원이 표절에 얼마나 관대했는지 잘 보여주는 유명한 판례라 할 수 있습니다. 


법적 책임면제고지: 이 글은 법률 조언이 아니며 저자는 이 글에 대한 일체의 법적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법률 조언이 필요하신 분은 변호사를 찾으십시오. 



*작가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칼럼 연재를 중단합니다. 그동안 이 칼럼을 사랑해주신 모든 분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정운 변호사의 풀어쓴 캐나다법 이야기
칼럼니스트: 이정운 변호사
  • UBC 로스쿨 졸업
  • UBC 경제학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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