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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한 번째 이야기 – 교과서 논쟁

이정운 변호사 piercejlee@hotmail.com 글쓴이의 다른 글 보기

   

최종수정 : 2012-06-10 17:30

얼마 전 한국의 일부 과학교과서에서 진화론이 삭제된 것이 미국 네티즌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학교에서 진화론 또는 창조론을 얼마나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에 관한 논쟁은 흔한 것입니다. 미국만 하더라도 이러한 주제에 관한 유명한 판례가 수십 개가 넘지요. 그러니 한국에서 일고 있는 논쟁이 조금 때늦은 감이 있다 하더라도 크게 조롱거리가 될 이유는 없을 듯합니다. 


진화론 교육에 관한 유명한 판례로 1968년 미국 연방대법원이 판결한 Epperson v. Arkansas 가 있습니다. 


당시 아칸소 주에는 정부의 지원을 받는 모든 교육기관에서 인간이 다른 하등 동물 (lower order of animals) 에서 진화했다는 내용을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이 있었는데요. 만약 이 법을 어기면 벌금을 물어야 할 뿐 아니라 실직도 각오해야 했습니다. 


1928년에 제정된 이 법이 문제가 된 것은 근 40년이 지난 후였는데요. 아칸소 주의 주도 (州都) 인 리틀 락 (Little Rock) 에 위치한 Little Rock Central High School에서 인간의 진화론이 담긴 생물교과서를 채택하기로 한 것이지요. 이러한 학교의 결정은 당시 생물을 가르치던 수잔 에퍼슨 (Susan Epperson) 선생님을 큰 곤경에 빠트렸는데요. 만약 그녀가 새 교과서로 수업한다면 아칸소 주법을 어겨 해고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민에 빠진 에퍼슨 선생님은 결국 법원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새 교과서로 수업해도 주 정부가 그녀를 해고할 수 없다는 법원의 명령 (injunction) 을 신청한 것이지요. 이러한 그녀의 시도는 진화론 교육에 대한 확실한 법적 해석을 원하던 많은 단체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화제를 불러일으킨 재판은 항소에 항소를 거쳐 미국 대법원까지 가게 되었고 대법원은 진화론 교육을 규제한 아칸소 법은 위헌이라고 결정하고 에퍼슨 선생님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한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미국 대법원이 결코 진화론이 창조론보다 옳다는 판단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법원이 아칸소 법을 위헌이라고 판결한 이유는 미국 헌법 수정 제 1조의 국교금지조항 (Establishment Clause of the First Amendment) 때문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였습니다. 영국의 국교는 성공회이기 때문에 그 이외의 종교를 믿는 사람은 많은 탄압을 받았고 이들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을 찾았습니다. 국교에 대한 심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던 이들은 독립을 선택하면서 국교 없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각별히 노력했는데 이러한 노력의 산물이 바로 국교금지조항인 것입니다. 


이 조항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국교를 정하거나 특정종교를 우대 또는 차별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이 전체 인구의 80%에 달하는 미국이 아직 국교가 없는 이유이지요. 


미국 대법원은 진화론 또는 창조론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학교에서 진화론 교육을 규제하는 이유가 오로지 특정종교의 믿음에 어긋나기 때문이라면 그 종교를 우대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밝히며 이는 헌법에 명시된 국교금지원칙에 어긋난다고 판결했습니다. 



*법적 책임면제고지: 이 글은 법률 조언이 아니며 저자는 이 글에 대한 일체의 법적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법률 조언이 필요하신 분은 변호사를 찾으십시오. 



이정운 변호사의 풀어쓴 캐나다법 이야기
칼럼니스트: 이정운 변호사
  • UBC 로스쿨 졸업
  • UBC 경제학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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