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마흔여덟 번째 이야기 – 발등에 놓인 차 바퀴

이정운 변호사 piercejlee@hotmail.com 글쓴이의 다른 글 보기

   

최종수정 : 2012-03-11 14:56

지난 두 칼럼에서 범죄를 구성하는 요소인 액터스 레우스 (actus reus, 범죄적 행위)와 멘즈 레아 (mens rea, 범의, 犯意)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액터스 레우스와 멘즈 레아는 각각 범죄를 구성하는 육체적인 요소와 정신적인 요소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는데요. 이 두 요소를 연결하는 것이 바로 컨커런스 (concurrence) 즉 “동시성”입니다. 


일반적으로 범죄가 성립되려면 범의와 범죄적 행위가 동시에 존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범죄 성립 여부를 놓고 열띤 논쟁이 시작되는데요. 대표적인 예로 1968년 영국 1심 법원(Queens Bench)에서 있었던 Fagan v. Metropolitan Police Commissioner라는 재판이 있습니다. 


이 재판은 아주 사소한 사건 때문에 시작되었는데요. 1967년 8월 31일 런던에서 운전 중이던 페이건(Fagan) 씨는 차를 돌리기 위해 도로 위에서 후진을 했습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경찰관 모리스(Morris)가 페이건 씨의 차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몇 가지 질문을 하기 위해 페이건 씨에게 길가로 차를 옮기라고 지시했지요. 


페이건 씨는 지시대로 길가에 차를 세웠는데 보도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한 모리스 경찰관은 차를 길가에 좀 더 바짝 붙이라고 지시했습니다. 페이건 씨는 시키는 대로 하기 위해서 후진을 했고 이때 페이건 씨의 차 뒷바퀴에 모리스 경찰관의 발이 깔리고 말았습니다. 

 
모리스 경찰관은 자신의 발이 밟혔다고 소리를 질렀고 차를 치우라고 했지만 무언가 기분이 불쾌해진 페이건 씨는 모리스 경찰관에게 욕 한마디를 던지고 시동을 꺼버렸습니다. 발이 깔린 모리스 경찰관은 계속 소리를 질렀고 한참이 지나서 페이건 씨는 마지못해 시동을 걸고 차를 움직여 주었습니다. 


공무 집행 중인 경찰관을 폭행했다는 심각한 죄로 기소된 페이건 씨는 자신이 모리스 경찰관 발 위로 차를 후진했을 때에는 모리스 경찰관에게 해를 입히려는 의도가 없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모리스 경찰관을 골탕먹이기 위해 차를 빼주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때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범의는 있을지언정 범죄적 행위는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범죄적 행위와 범의가 모두 존재했지만 동시에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범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이러한 페이건 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요. 이유는 페이건 씨의 범죄적 행위가 모리스 경찰관 발을 밟은 순간 끝났다고 판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욕을 하고, 차에 시동을 끄고, 한참 있다 마지못해 차를 치워준 모든 행위가 범죄적 행위이기 때문에 모리스 경찰관에게 해를 입히려는 범의가 나중에 생겼다 하더라도 “동시성” 문제는 없다는 것이지요.


사소한 감정싸움에서 비롯된 이 사건은 오늘날 대부분 형법 교과서에 빠짐없이 소개되는 유명한 판례가 되었습니다. 



*법적 책임면제고지: 이 글은 법률 조언이 아니며 저자는 이 글에 대한 일체의 법적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법률 조언이 필요하신 분은 변호사를 찾으십시오. 



이정운 변호사의 풀어쓴 캐나다법 이야기
칼럼니스트: 이정운 변호사
  • UBC 로스쿨 졸업
  • UBC 경제학 졸업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