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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일곱 번째 이야기 – 형평법

이정운 변호사 piercejlee@hotmail.com 글쓴이의 다른 글 보기

   

최종수정 : 2011-12-10 22:02

영미법에는 equity 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한국말로는 “형평법”이라 합니다. 형평법은 코먼로 (common law, 컬럼 3회 참고) 와 자주 비교됩니다. 둘 다 중세 영국에서 발전했지만 형평법의 발전과정은 유난히 흥미롭습니다.

 

원래 영국에는 형평법이 없었습니다. 오직 코먼로만 있었지요. 법원의 판사들은 자신들의 법적 지식과 기존의 판례를 바탕으로 판결을 했습니다. 그런데 간혹 판사가 너무 낡은 판례를 적용하거나 지나치게 법률에만 의지한 나머지 비현실적인 판결을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럴 때 당사자들은 종종 왕에게 직접 판결의 부당함을 호소했는데요. 당시만해도 왕은 절대권력의 소유자로 어떤 판결도 뒤집을 수 있었던 거지요. 하지만 이런 일이 잦아지자 왕은 더 이상 직접 호소를 들어줄 수 없었고 자신의 고문들에게 이 일을 맡기게 됩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Court of Chancery” 즉 “형평법 법원”입니다.

 

초기 형평법 판사들은 법률교육을 거의 받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왕의 고문이었기 때문에 신학, 역사, 고전문학 등에 조회가 깊었지요. 이들은 법률지식이 부족한 만큼 법에 얽매이기보다는 융통성 있는 판결을 했습니다. 

 

이들이 내린 판결의 특징은 단순한 손해배상보다는 무엇을 하거나 하지 말라는 명령, 즉 이행명령 (specific performance) 또는 금지 명령 (injunction) 을 자주 내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소를 훔쳐간 사람에게 소 값을 배상하라고 하기 보다는 소를 돌려주라고 하였던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날에도 이러한 종류의 명령을 “equitable remedy” 즉 “형평법 상 구제”라고 합니다.

 

형평법 법원이 일반 법원의 판결을 자주 번복하자 두 법원 사이의 긴장도 점점 팽팽해졌는데요. 예를 들어 일반 법원의 가장 높은 자리에 있던 에드워드 콕 (Edward Coke) 판사는 자주 형평법 법원에서 법정 모독죄로 감금된 사람을 풀어주라는 명령을 내려 형평법 법원 판사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습니다.

 

형평법 법원과 일반 법원의 힘겨루기가 극에 달했던 건 1615년에 있었던 “Earl of Oxford’s Case” 라고 알려진 재판 때였습니다. 이 재판에서 콕 판사가 내린 판결이 잘못되었다며 형평법 법원이 금지명령을 내렸던 것이지요. 결국 두 법원의 힘겨루기 때문에 재판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는데 이 다툼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은 바로 다름아닌 영국이 낳은 유명한 철학가 프랜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 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의 법무장관 (Attorney General) 이던 베이컨은 형법법과 코먼로가 어긋날 경우 형평법이 앞선다는 원칙을 확고히 했습니다.

 

초기 형평법 법원은 법률교육을 받지 않은 판사들이 판결을 했지만 점차 법률가들이 그 자리를 맡게 되었고 법에 구애 받지 않는 판결을 하던 형평법 법원은 점차 그 나름대로의 법률과 판례를 만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름만 다른 또 하나의 법이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이법이 형평법이 된 것입니다. 

 

1875년 형평법 법원은 일반 법원과 합쳐지게 되었고 코먼로와 형평법의 구분도 없어졌지만 형평법 법원에서 발전된 독특한 형태의 법 개념들은 아직도 영미법 안에 흥미롭게 남아있습니다.

 

 


*법적 책임면제고지: 이 글은 법률 조언이 아니며 저자는 이 글에 대한 일체의 법적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법률 조언이 필요하신 분은 변호사를 찾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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