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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네 번째 이야기 – 네 이웃을 사랑하라

이정운 변호사 piercejlee@hotmail.com 글쓴이의 다른 글 보기

   

최종수정 : 2011-03-25 17:47

1928년 8월 26일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한가한 일요일 저녁, 페이즐리(Paisley)라는 지역을 여행하던 도너휴(Donoghue) 여사는 갈증을 식힐 겸 친구와 함께 한 카페에 들렸습니다. 도너휴 여사의 친구는 아이스크림과 “진저비어”라는 청량음료를 주문하였습니다.

병에 들어 있는 진저비어를 잔에 따라 마시던 도너휴 여사는 병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무언가를 보게 됩니다. 부패한 달팽이 조각이었습니다. 진저비어병이 진한 불투명 갈색이어서 잔에 따르기 전까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부패한 달팽이가 들어간 진저비어를 마신 도너휴 여사는 이 사건 때문에 정신적 충격, 복통 그리고 식중독 증세를 호소하였고 결국 이 진저비어를 제조한 스티븐슨 (Stevenson) 씨를 고소하기에 이릅니다. 손해배상 청구 금액은 500파운드였습니다.

어찌 보면 경미한 사건으로 시작된 이 소송은 오늘날 영미 손해배상법(Tort Law)의 기초가 되는 유명한 판례를 남겼습니다.

당시 도너휴 여사가 스티븐슨 씨를 상대로 손해 배상을 받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손해 배상의 법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계약법상 손해배상을 청구하려면 원고와 피고 사이에 계약관계를 증명해야 하는데 도너휴 여사와 스티븐슨 씨 사이에는 아무런 계약관계도 없었습니다. 스티븐슨 씨와 카페 주인 사이에는 계약관계가 있었고 카페 주인과 진저비어를 주문한 도너휴 여사의 친구 사이에도 계약관계는 존재했지만, 막상 도너휴 여사는 직접 진저비어를 구매하지 않았으므로 그 누구와도 계약을 맺었다고 볼 수 없었습니다.

또 다른 손해배상의 근거는 불량상품에 대한 생산자의 책임 (Product Liability) 을 묻는 것이었으나 그때까지 영국에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생산자가 제품을 구매한 사람이 아닌 제삼자에게 불량 제품 때문에 발생한 손해를 보상한 판례는 드물었습니다. 간혹 생산자가 총기와 같이 위험한 제품에 결함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거짓으로 숨기고 판매했을 때 소비자가 아닌 제삼자의 손해를 배상하도록 한 판례는 있었지만 진저비어는 총기와 같이 위험한 제품으로 볼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어려운 법적 문제에 직결한 영국 대법원(House of Lords)의 엣킨(Atkin)대법관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구절을 인용하며 해법을 제시했습니다. 엣킨 대법관에 따르면 이 구절은 법적으로 “네 이웃을 해하지 마라.”라는 의미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합리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주의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웃”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요? 이 질문에 엣킨 대법관은 이웃이란 자신에 행위에 너무나 직접적이며 밀접한 영향을 받기 때문에 그 행위를 하기 전에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하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고 하였습니다.

엣킨 대법관의 판결을 따르면 스티븐슨 씨는 자신이 제조한 진저비어를 마시는 이웃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안전한 음료수를 만들 책임이 있었던 것이지요.

이웃을 사랑하라.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마라. 유치원생도 알 것 같은 덕목이 법적 근거를 가지게 되기까지 이렇게 어려운 과정을 거쳤습니다.

*법적 책임면제고지: 이 글은 법률 조언이 아니며 저자는 이 글에 대한 일체의 법적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법률 조언이 필요하신 분은 변호사를 찾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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