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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 한국방송

밴쿠버 조선 news@vanchosun.com 글쓴이의 다른 글 보기

   

최종수정 : 2009-08-08 00:00

인도네시아에 사는 인구 6만 명의 소수 민족인 <찌아찌아>족이 표기문자로 한글을 택했다고 합니다. 이 민족은 말은 있지만 그 것을 적을 글이 없던 차에 한글을 쓰기로 했다는군요. 세종대왕께서 말은 있으되 글이 없는 우리 민족의 안타까움을 두루 살펴 한글을 만드신 지 600여 년 후에 그 글을 쓰는 또 다른 민족이 생긴 것이니 이 어찌 아니 기쁘겠습니까. 특히나 머나먼 타국 땅에 살면서 그 놈의 원수 같은 영어 때문에 당한 곤란과 무시를 생각하면 치가 떨릴 지경인데, 이 번 소식은 그야말로 저에게는 월드컵 우승보다 값진 것이었습니다.

저는 한글이야말로 세계 문화 유산을 꼽자면 첫 자리에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자 자체를 계획하여 만들어냈다는 사실도 그렇고(대부분의 문자는 오랜 세월 동안 조금씩 쌓여온 것이지요) 그 만들어낸 문자가 거의 완벽할 지경으로 과학적이면서 체계적이라는 것 또한 그렇습니다.

언어란 의사소통의 도구일 뿐 아니라 생각과 느낌을 담는 그릇으로서 어떤 말을 쓰느냐가 많은 것을 좌우합니다. 우리 민족이 5000년 동안 민족적 동질성을 지켜온 것도 같은 말을 써왔기 때문이지요. 언젠가 통일 되고 나면 풀어야 할 과제가 한 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그 중에 중요한 하나가 말과 글을 정리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 만큼 남쪽과 북쪽에서 쓰는 말이 많이 달라졌고 또 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우리 자신들이 이렇게 소중한 우리 말과 글을 너무 업수이 여긴다는 것입니다. 대학에서 학생들 가르치면서 숙제를 받아보면 맞춤법 제대로 아는 학생이 드물 정도입니다. 게다가 왠 되지도 않는 영어는 그리 갖다 부치는지 참으로 알 수가 없는 노릇입니다. 그런데 더욱 한심한 것은 모범이 되어야 할 방송에서 조차 모범은커녕 엉뚱한 짓 하기 일쑤라는 것입니다.

특히나 요즈음, 이른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 참으로 가관입니다. 잘 나가는 사회자 중 하나의 우리말은 참고 듣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일단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가 정말 힘듭니다. 그 친구의 말 중 알아듣는 비율이 내 한심한 영어 실력으로 캐나다 방송 알아듣는 비율보다 그리 높지 않으니, 내 귀가 문제가 있거나 그 친구 말이 문제가 있거나 분명 둘 중에 하나입니다. 이 것은 그 사회자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그런 사회자를 쓰는 방송국의 문제이기도 하고, 더 크게는 그 사회자의 한국말을 문제 삼지 않고 재미있게 보는 시청자의 잘못이기도 합니다.

저 같은 사람을 위해서인지 요즈음 방송마다 쓸데 없는 자막이 넘쳐납니다. 자막이란 말로 다하지 못하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있는 것인데 마치 청각장애자를 위한 방송인양 말하는 것을 그대로 자막처리하기도 합니다.

방송에서 제대로 된 우리말을 쓰는 일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이 방송일진데 그 방송에서 잘못된 우리 말을 쓴다면 우리 말이 망가지고 헝클어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그 것은 예능 오락 프로그램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재미있다는 핑계로 참으로 말들을 아무렇게나 생각 없이 뱉어냅니다. 결국 그 것을 아이들이 다 보고 배우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한 이렇게 무언가 문제를 말하면 귀 담아 들으려 하지 않고 고지식하고 고리타분한 이야기로 우습게 받아들입니다. 자유분방한 것과 지킬 것을 지키는 일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마치 권위와 권위주의가 전혀 다른 말인 것처럼 말이지요. 우리 방송은 한 편으로는 아직 일본식 잔재를 벗어나지 못한 채 정말 고루하고 진부한 규범들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한 편, 또 한 쪽으로는 정작 지켜야 할 것들은 그저 재미있다는 명제 아래 모든 것을 묻어 버리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말과 글은 우리의 생각과 느낌을 담는 그릇이고 그 그릇이 어떤 모양이냐에 따라 우리의 행동이 달라지고 그 것들이 모이고 모여 사회가 달라집니다. 다시 한번 우리 말과 글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생각해보는 기회가 있었으면 합니다.



사는 일, 그리고 방송 혹은 영화
글쓴이 배인수는 1959년 서울생으로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하고
교육방송 피디(PD)협회장을 역임했다.
2001년 미국 Chapman University Film School MFA 과정을 마쳤고
서울예술대학 겸임교수를 지냈다
  칼럼니스트: 배인수 | Tel:604-430-2992 | Email: bainsoo@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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