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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관학파의 공 사상(2)

밴쿠버 조선 news@vanchosun.com 글쓴이의 다른 글 보기

   

최종수정 : 2006-05-01 00:00

둘째, 공을 '궁극 실재로서의 공'이라는 관점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보는 대로의 사물이 궁극적으로 공하다면, 사물의 진정한 본 모습은 어떠한가? ‘사물의 진정한 모습'을 불교 용어로 법성(法性), 실상(實相), 진여(眞如) 등이라 하는데, 도대체 이런 사물의 참모습, 참으로 그러함(Suchness), 실상은 무엇인가? 나가르주나는 우리가 가진 일체의 견해를 버려야 그 실상이 보인다고 했다. 우리의 일상적 견해는 부분적이고 일방적이며 왜곡되고 부정확하다. 사물의 실상을 보여 주기는커녕 오히려 실상을 보는 데 치명적 장애가 된다. 따라서 이런 견해를 말끔히 비워야 한다. 잘못된 견해를 기초로 우리가 형성한 궁극 실재에 대한 일체의 이론, 교설, 개념, 관념, 범주, 체계, 주의, 주장, 독단 등은 전혀 타당성이 없고, 오히려 우리를 오도하고 제약할 뿐이다. 잘못된 견해에 붙들려 있는 한 궁극 실재의 참모습을 꿰뚫어 볼 수 없다. 궁극적인 것은 인간적인 견해가 들어가지 않는 빔(空) 그 자체라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잘못된 견해'라는 말도 사실은 성립되지 않는다. 모든 견해는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궁극 실재를 두고 크다고 해도 틀리고 작다고 해도 틀린다.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다고 해도 틀리고,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다고 해도 맞지 않다. 그 유명한 '사구부정(四句否定, catu?ko?i)’이다.  궁극 실재는 궁극 실재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어느 범주에도 들어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언설(言說)을 이(離)하다’느니,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니 하는 표현은 바로 이런 경지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처럼 사물의 본성은 우리의 생각과 말로는 상상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초월적인 것이다. 거기에는 우리의 일상적인 생각과 말 중에 적용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빈 것', '공(空)’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그렇다고 공이 아무것도 없이 텅 빈 헛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 절대적 실재의 모습은 존재하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기에, 또 보통 존재라고 할 수 없기에, 비존재요 '공'이다.

나가르주나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프라상가' 논법을 사용했다. 서양 논리학에서 'reductio ad absurdum(歸謬法)’이라고 하는 방법이다. 이는 상대가 어떤 명제를 제시하면, 내가 대안을 제시해서 상대의 명제를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명제 안에 숨어 있는 내적 모순이나 오류를 밝혀 상대의 명제가 성립할 수 없는 '엉터리(absurdity)’라는 것이 드러나게 하는 방법이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공이 '궁극 실재'라고 해서 모든 사물과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어떤 것(a thing, a being)’이라고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공도 역시 공(空亦復空, emptiness of Emptiness)”임을 알라고 한다. 나가르주나는 공은 마치 약과 같아서 병을 고쳤으면 몸에서 빠져나가야 한다고 했다. 병을 고쳤는데도 약이 뱃속에 그래도 남아 있으면 그것이 도리어 병이 된다는 것이다. 공은 사물을 실체적인 존재로 보려는 우리의 고질적인 병을 고쳐서 사물을 진정 있는 그대로(things as they really are) 보게 하는 데 근본 목적이 있다. 따라서 "공에 대한 특정 견해에 달라붙는 사람은 고칠 길이 없다."고 선언했다.

'반야지'의 산스크리트어 원문은 'prajnap?ramit?'이다. 문자적으로는 '저쪽으로 건너감의 지혜', '초월적 지혜'로 번역할 수 있다. 풀어 보면, 현상세계를 꿰뚫어서 그 너머에 있는 실상의 세계를 보는 지혜, 이 괴로운 생사의 세계를 건너 자유로운 열반의 세계에 닿게 하는 나룻배와 같은 지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한문으로도 '지도(智度)’나 '도피안(度彼岸)’이라고 번역한다. 이런 반야지를 가지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 결국 "생사(samsara)라는 현상세계와 열반(nirv??a)이라는 궁극 모습 사이에 구별이 없음"도 볼 수 있다. 무명(無明)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생사로 보이고, 깨달은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열반이다. 나아가 반야지로 세상을 보는 사람은 모든 것이 공이라는 것을 알고 생사나 열반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절대 자유를 누린다.



오교수의 속담풀이
오교수의 속담풀이.
  칼럼니스트:오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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