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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지 진리(四聖諦)

밴쿠버 조선 news@vanchosun.com 글쓴이의 다른 글 보기

   

최종수정 : 2005-11-05 00:00

종교간의 대화를 위한 불교이야기(10)

이렇게 따뜻한 만남이 이루어진 다음, 부처님은 다섯 수도승을 위해 처음으로 설법을 했는데, 이를 두고 제1차 ‘진리의 바퀴를 굴리심’(轉法輪, dharmacakrapravarta)이라고 한다. 그 가르침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그는 다섯 수도승들에게 우선 지나친 쾌락과 지나친 고행이라는 두 가지 극단을 피하고 ‘중도’(中道)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그 중도의 내용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팔정도’(八正道) 곧 ‘여덟 겹의 바른 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팔정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 바탕이 되는 ‘사제’(四諦) 혹은 ‘사성제’(四聖諦), 곧 ‘네 가지 거룩한 진리’라는 것을 가르쳤다.  ‘사성제’를 간단히 ‘고(苦)·집(集)·멸(滅)·도(道)’라 줄여서 부르기도 한다.

 한 가지 미리 알아두면 좋은 것은 사성제가 의학(醫學) 용어로 이해될 수 있다고 하는 점이다.  첫째 고제와 둘째 집제는 ‘진단(診斷)’에 해당된다.  아프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그 아픔의 원인을 분석하는 것이다.  셋째 멸제와 넷째 도제는 ‘처방(處方)’에 해당된다.  아프지만 걱정하지 말라.  나을 수 있다.  낫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이런저런 지시를 따라 실천하라는 식이다.  이제 네 가지를 하나씩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고제(苦諦): ‘괴로움’(duḥkha)에 관한 진리[諦]이다.  삶이 그대로 괴로움이라는 진리를 터득하라는 것이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일(生老病死)이 괴로움이요, 싫어하는 사람이나 사물을 대해야 하는 괴로움(怨憎會苦), 사랑하는 사람이나 사물과 헤어지는 괴로움(愛別離苦),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求不得苦), 존재 자체의 괴로움(五蘊盛苦)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사고’(四苦) ‘팔고’(八苦)이다.  결국 이런 괴로움은 개인적으로 겪는 육체적이나 심리적 고통뿐 아니라 인간으로서 누구나 겪지 않을 수 없는 불완전함, 불안정함, 제한됨, 모자람, 불만족스러움 같은 ‘인간의 조건’ 자체를 두고 하는 말이라고도 볼 수 있다.

 ‘고’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두카’(duḥkha)라는 낱말은 수레바퀴 축에 기름이 쳐져서 부드럽게 돌아가야 할 곳에 모래가 들어가 삐걱거린다는 뜻이다.  이를 현대어로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까? 학자들 중에는 이 말을 ‘괴로움’(suffering), ‘아픔’(pain), ‘스트레스’(stress), ‘근심’(disress), ‘불만족’(dissatisfaction) 등으로 옮기기도 하고, 심지어는 좀 거창한 말을 써서, ‘비극적 얽힘’(tragic entanglement), ‘끊임없는 좌절’(perpetual frustration), ‘인간으로서의 곤혹’(human predicament) 등으로 풀어 보기도 한다. 

 근래에 1·2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생겨난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자주 쓰는 용어로 불안, 절망, 출구 없음, 구토, 이방인 됨, 집 없음(실향성), 의미 없음, 낙원을 잃음(실낙원), 소외 등등도 우리 삶의 현실적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는 말들이라 할 수 있다. 

 불교가 이렇게 삶을 괴로움이나 고통으로 보았다고 하여 불교를 ‘비관적인’ 종교라 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지만, 이것은 비관적이냐 낙관적이냐 하고 따질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realistic)인 관찰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의사가 환자를 보고 병이 있다고 진단할 경우 우리는 그 의사를 보고 왜 모든 것을 비관적으로만 보느냐고 따질 수가 없다.  사실 거의 모든 종교들은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적 삶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에게 병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고 받아들이는 것이 병을 고치려는 노력의 시발점인 것처럼,  인간의 조건, 혹은 고통에 대한 자각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출발점이자 하나의 특권이다. 

 예수님이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마태복음11:28)했을 때, 여기서 우리는 그가 ‘괴로움’의 진리를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없을까?  여기서 예수님은 “만약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거든...”하는 가정법을 쓰고 있지 않다.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모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는 이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을 직설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엄연한 사실을 직시하고 그 해결책을 얻기 위해 그에게 오라는 말씀아닌가?  

 아무튼 부처님이나 예수님이나, 타조처럼 머리를 모래 속에 쑤셔 박고 현실을 도피하는 데서 안위를 찾으려 할 것이 아니라 독수리처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봄으로 거기서 해방의 길을 모색하는 태도를 가짐이 마땅함을 일깨우는 분들이 아닌가 여겨진다. 집제, 멸제, 도제는 다음에 이야기한다.

soft103@hotmail.com


 



오교수의 속담풀이
오교수의 속담풀이.
  칼럼니스트:오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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