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들의 디자이너 미켈레 데 루키
톨로메오(Tolomeo)는 현대 디자인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조명 기구로 꼽힌다. 1987년 출시 이후 매년 약 50만개,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2000만개 이상 판매된 것으로 추산된다. 업계에서는 톨로메오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복제(카 피)된 조명 기구일 것이라고 말한다. 뉴욕 현대미술관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파리 퐁피두 센터, 독일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 등 주요 미술관에서 영구 소장하고 있는 디자인 아이콘이기도 하다.
전 세계의 책상과 거실·침실·주방을 밝히는 톨 로메오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이 톨로 메오를 디자인한 주인공이 미켈레데 루키(De Lucchi·75)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이탈리아 파도바 출신인 데 루키는 1980년대 전설적인 디자인 그룹 ‘멤피스(Memphis)’의 창립 멤버로 활동하며 디자인계에 혁명적 변화를 일으켰다. 40년 넘게 제품 디자인·건축·인테리어· 순수 예술 등 장르를 넘나드는 활동으로 ‘디자이 너들의 디자이너’라 불리는 세계적 거장이다.
데 루키가 지난 3월 주한 이탈리아 대사관·이탈리아 무역공사·이탈리아 문화원이 공동 주최한 ‘이탈리아 디자인의 날’ 행사에 ‘디자인 앰배서더’로 초대돼 서울을 찾았다. 그의 한국 방문에 맞춰 서울 논현동 ‘더쇼룸’에서는 데 루키의 실험적 디자인 브랜드 ‘프로두치오네 프리바타 (Produzione Privata)’의 가구와 오브제를 선보이는 전시와 함께 그가 자신의 디자인 철학을 공유하는 강연이 열렸다. 더쇼룸에서 만난 데 루키는 “디자인은 단순히 물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환경을 설계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 미켈레 데 루키가 디자인한 '톨로레오 조명'./아르테미데
낚시에서 힌트 얻은 디자인 아이콘
―톨로메오 램프가 이 정도로 성공하리라 예상했나요?
“아니요, 전혀요. 흥미로운 건 상업적 성공을 고려해 디자인한 제품들은 그리 성공하지 못했지 만, 나 스스로 필요해서 디자인한 제품들은 상업적으로도 성공했다는 거예요.”
―톨로메오를 본인이 필요해 만들었단 건가요.
“그렇습니다. 디자인 작업할 때 필요한 램프를 스케치해서 친구이자 아르테미데(이탈리아 조명 브랜드) 창업자인 에르네스토 지스몬디 (Gismondi)에게 보여줬더니 당장 팀을 꾸려서 프로토타입(시제품)을 만들었지요. 1987년 출시했습니다. 조명 기구가 한 해 1000개 팔리면 대박이라고 하는데, 톨로메오는 하루 1000개씩 팔려나갔죠.”
―어떤 램프가 필요했나요.
“저는 연필로 종이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 로 작업합니다. 손의 움직임을 방해하거나 종이에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도록 작업에 따라 램프의 방향과 각도·높이를 한 손으로 쉽게 조정 할 수 있고, 원하는 지점에 고정할 수 있는 램프를 찾고 있었습니다.”
―낚싯대에서 영감을 얻어 톨로메오를 디자인 했다고요.
“낚시를 하지는 않지만 낚시하는 모습을 보는 건 좋아했어요. 낚시꾼이 고기 잡는 모습이 떠올랐어요. 바늘에 고기가 걸리자 줄이 팽팽하게 잡아당겨지면서 휘어진 낚싯대가 움직이지 않는 모습요. ‘유레카(Eureka·알아냈다는 뜻의 그리스어 감탄사)’의 순간이었지요.” 데 루키는 와이어 텐션(wire tension)과 스프링을 활용해 원하는 곳에 램프를 정확하게 고정하고 빛을 비출 수 있으면서도 손쉽게 각도와 위치를 바꿀 수 있는 램프를 디자인했다. 톨로 메오는 고대 그리스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 (Ptolemaeos)의 이탈리아식 이름. 톨로메오를 생산하는 아르테미데 창업자 지스몬디가 ‘어둠을 밝히고 세상을 비추는 도구’라는 상징성을 부여하기 위해 붙였다. 별을 연구하던 고대 천문학자의 이름이 현대인의 책상을 밝히는 아이콘이 된 셈이다.
―꾸준히 사랑받는 제품의 디자인은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성공하는 디자인의 레시피를 알았다면, 잘 팔리는 제품을 더 많이 디자인했겠죠. 톨로메오의 경우는 복잡한 공학적 설계를 갖췄지만 알루미늄 몸체와 와이어만 겉으로 드러나는 심플한 디자인이 사무실 책상은 물론 주방·거실·침실· 욕실 등 어디에 놓아도 어울리기에 큰 사랑을 받아왔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달 10일) 강연에서 “소비자는 합리성만으로 구매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뇌는 합리와 감성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고, 우리는 양쪽을 끊임없이 점프합니다. 디자인은 합리와 감성을 잇는 다리입니다. 디자이너는 인간의 이중성을 존중해야 합니다. 소비자는 제품을 사용할 때의 감성에 기반해 선택합니다. 디자인의 궁극적인 목표는 효율과 미적 추구의 결합입니다.”

▲ 미켈레 데 루키가 서울 논현동 더쇼룸에 전시된 '비손테'에 걸터앉았다. 데 루키가 자신의 개인 공방 '프로두치오네 프리바타'를 통해 선보이는 비손테는 스툴이지만 여러 개를 겹쳐 옷걸이로 활용할 수 있다. 더쇼룸은 프리바타의 국내 판매와 전시 독점권을 가진 공식 파트너이다./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수염 기르기가 나의 첫 디자인 프로젝트”
데 루키의 트레이드마크는 턱을 뒤덮은 길고 풍성한 수염이다. 그는 웃으면서 “성인이 되고 나서 기르기 시작한 수염이 나의 첫 디자인 프 로젝트”라고 말했다.
―수염은 왜 길렀나요. “쌍둥이 형제와 달라 보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 둘은 완전히 똑같이 생겼죠. 어머니조차 잘 구별하지 못했고, 그저 ‘쌍둥이’라고 불렀어요. ‘쌍둥이, 이리와’ ‘쌍둥이, 공부해’…. 늘 이런 식 이었죠(웃음). 성인이 될 때까지 제 이름을 듣지 못했습니다. 고향인 파도바 는 이탈리아에서 유명한 대학 도시입니다. 그럼에도 파도바를 떠나 피렌체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건 나를 찾고 싶어서였어요. 쌍둥이 형제는 파도 바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해 과학자가 됐습니다.”
―수염이 디자인 프로젝트라는 건 어떤 의미인지.
“디자인이란 다름을 만들고, 고유성을 창조하는 일입니다. 무언가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죠. 남과 차별화된 존재로 특정하는 것은 나 자신을 디자인 하는 것입니다. 수염을 기르겠다는 결심뿐이 아니죠. 입을 옷이나 쓸 안경을 선택하는 것도 나를 디자인하는 겁니 다. 어떤 친구를 사귈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내리는 모든 결정 은 내 인생을 디자인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결국 모두 디자이너입니다.”
―건축을 전공한 이유는.
“저희 집안은 토목공학이 일종의 가업입니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삼촌도 모두 엔지니어였죠. 가족은 저도 엔지니어가 되길 기대했지만, 공학은 너무 기술적이라 싫었어요. 어려서부터 예술을 공부하고 싶었어요. 조각가가 되고 싶었죠. 건축은 공학과 예술의 적절한 타협이었습니다.”
―건축을 전공했지만 제품 디자인에서 독보적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밀라노로 갔어요. 밀라노는 디자인이 막 꽃을 피우기 시작한 변혁의 시기였습니다. 많은 건축가가 오브제(제품)를 디자인했어요.”
―건축과 디자인은 다르지 않나요.
“고대 로마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건축의 3대 요소로 기능·구조·아름다움을 꼽았죠. 이는 오브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건물도 아주 멀리서 보면 하나의 오브제입니다. 멤피스 그룹(Memphis Group)에서도 오브제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멤피스 그룹은 데 루키를 이해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다. 1980년 데 루 키의 친구이자 이탈리아 디자인 거장 에토레 소트사스의 아파트에서 탄생한 전위적인 디자인 운동으로, 당시 디자 인계를 지배하던 모더니즘의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교리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세계 디자인계 질서를 흔들었다. 사물이 단지 기능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과 대화하고 감성을 자극해야 한다고 믿었다. 모더니즘의 무채 색과 미니멀리즘 대신 강렬한 원색과 비대칭적인 구조, 기하학적 패턴을 과감하게 도입했다. 귀한 원목이나 가죽 대신 싸구려 취급받던 플라스틱 라미네이트를 적극 활용하며 ‘좋은 취향’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렸다.
1983년 데 루키가 디자인한 ‘퍼스트 체어(First Chair)’는 멤피스의 철학을 가장 대중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원형 디스크 등받이와 단순한 프레임은 마치 조형물 같은 느낌을 준다. 파격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함과 친근함을 불어넣어 난해할 수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디자인을 대중이 사 랑하게 만드는 데 한몫했다. 패션 디자이너 고(故) 칼 라거펠트는 퍼스트 체어를 비롯해 멤피스의 가구들로 자신의 집을 가득 채울 만큼 열렬한 팬이었고, 1980~1990년대 TV쇼·뮤직비디오· 그래픽 디자인 전반에서 멤피스 특유의 패턴과 색감을 쉽게 볼 수 있다. 최근 레트로 열풍과 함께 멤피스 스타일 은 다시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 미켈레 데 루키가 디자인한 '퍼스틏어'./멤피스
디자인의 본질은 ‘다름’ 만들기
모든 것이 디지털화·가상화하는 시대지만, 데 루키는 여전히 직접 깎은 연필로 종이에 디자인 아이디어를 스케치한다. 프로토타입은 목재를 전기톱으로 잘라 만든다. 데 루키는 “손은 인간의 정신에 가장 가까운 도구”라고 했다. “내 손이 움직일 때 내 마음도 함께 움직입니다. 컴퓨터는 답을 주지만, 연필은 질문을 던집니다.”
―연필을 직접 깎는 이유는.
“연필을 깎는 동안 작업을 멈추고 생각하게 됩니다. 요즘은 칼을 지니고 비행기를 탈 수 없어서 해외 나갈 땐 펜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스튜디오와 집에서는 꼭 연필을 깎아서 씁니다.”
―전기톱으로 나무를 잘라 모델을 만듭니다.
“손으로 작업하다 보면 컴퓨터로 할 때와는 달리 매번 결과물이 조금씩 다릅니다. 예상치 못한 실수나 오차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세렌디피티(뜻밖의 행운이나 발견)를 얻기도 하죠. 다름을 만드는 과정이야말로 디자인의 본질입니다. 디지털 도구는 패턴을 계산하고 복제할 수는 있지만, 불완전함과 기억 의 아름다움을 결코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실수와 오차야말로 사물에 영혼을 불어넣는 통로가 됩니다.”
―AI와 디지털 기술이 창조의 영역을 침범하는 시대입니다.
“AI는 대단합니다. 하지만 AI는 인간이 생산한, 이미 존재하는 데이터를 사용할 뿐입니다. AI 시대에 창의성은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창의성은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요소가 될 것입니다. AI·디지털 시대에 지식 습득은 더 이상 장벽이 아닙니다. 지식을 왜 알아야 하는지,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알려주는 창의성 교육이 젊은 세대에게 필요합니다.”
―디자인과 건축이 시대정신을 반영해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디자이너와 건축가는 개인적인 바람을 담는 것을 넘어 당대의 이슈를 다루고 고민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사회와 대화를 나눠야 합니다. 지구 온난화는 우리 시대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피렌체에서 건축을 공부할 때 생태학과 지속 가능성은 전혀 논의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파괴적인 기후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20년 전과 같이 생활하고, 디자인하고, 지을 수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됩니다.”
―“디자인은 단순히 물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환경을 설계하는 일”이라고 자주 말했습니다.
“하루 중 우리가 의자에 앉아 있는 시간은 일부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시간 동안 의자는 공간의 일부로 존재하며 우리에게 말을 겁니다. 디자인의 본질은 도구로서 기능을 수행하는 짧은 순간이 아니라, 그 물건이 공간에 놓여 있을 때 만들어내는 분위기에 있습 니다. 좋은 디자인은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인간에게 긍정적 자극을 주고, 공간 전체를 밝고 낙관적인 에너지로 채우는 ‘환경’이 돼야 합니다. 인간의 행동 중 80%는 무의식에 의해 결정됩니다. 디자인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편안함과 즐거움을 줘야 합니다.”

▲ 조지아 수도 트빌리시 '평화의 다리'. 건축물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빛 조각품처럼 기능하며 도시의 상징이 됐다./AMDL Circle
―한국의 디자인을 평가한다면.
“산업적 속도와 효율로 선도국들을 뒤쫓는 시대를 넘어섰다고 봅니다. 자동차·전자제품 등 첨단 기술 디자인은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동시에 공예 등 전통 기술도 여전히 간직하고 있지요. 미래와 과거의 기술이 어떻게 서로 협력하며 창의력을 발휘할지 기대됩니다.”
―한국 디자인은 앞으로 어떻게 발전해 나가야 할까요.
“한국 디자이너들이 기능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질적 유산을 정의하기를 바랍니다. 빠르게 고령화하는 사회와 지구 온난화에 대처하는 감성적·사회적 요구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조언한다면.
“멈추지 말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움직이세요. 실패와 실수를 두려워 마세요. 호기심을 잃지 마세요. 미래를 바라보되 과거에서 배우기를 꺼리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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