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그린 그림' 프로젝트36번째 캔버스 설치 현장 가보니…]
한국 DMZ·뉴욕·히로시마·보드가야 등 성지·분쟁 지역 등에 빈 캔버스…
2년 뒤 수거하면 자연 흔적만 남을 것… 우주에도 캔버스 설치하고 싶어
오후의 햇살을 받은 느릅나무 가지가 흰 캔버스에 그림자를 드리우자, 연두색 애벌레 한 마리가 캔버스 위를 느릿하게 기어갔다. "얘가 가장 먼저 그림을 그리네." 사진가 김아타(55)가 중얼거렸다.
18일 오후 강원도 홍천군 동면 덕치리 수타사 계곡. 계곡 어귀에 가로 3m, 세로 1.6m짜리 캔버스가 섰다. 이 캔버스는 2년 후인 2013년 8월 18일에 철거된다. 김아타가 지난 2009년부터 진행 중인 프로젝트 '자연이 그린 그림(The Project―Drawing of Nature)'의 36번째 캔버스 설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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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캔버스는 삼라만상(森羅萬象)을 여과 없이 받아들일 거다.”18일 오후 강원도 홍천 수타사 계곡 어귀에 가로 3m, 세로 1.6m짜리 캔버스를 설치한 김아타. /홍천=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자연이 그린 그림'은 전 세계의 성지·분쟁지역 등에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캔버스를 설치했다가 2년 후 수거하는 프로젝트다. 캔버스에는 자연이 남긴 흔적만이 기록된다. 미국 뉴욕, 중국 베이징과 허난성, 일본 도쿄와 히로시마, 인도 보드가야와 갠지스 강변, 한국 DMZ 향로봉 등 전 세계 30여곳에 캔버스가 이미 서 있다.
김아타는 프로젝트가 끝나면 캔버스에 옻칠을 해 전시한다. 작업 과정을 찍은 사진과 동영상은 일종의 '자료'일 뿐 프로젝트 '작품'은 캔버스다. "사람들이 '너는 사진가인데 왜 이런 작업을 하느냐'고 묻는다. 나는 '대체 이것이 사진과 뭐가 다르냐'고 답했다. 사진은 세상을 가장 사실적으로 반영하는 예술이고, 이 작업은 사진보다 더 사실적으로 세상을 반영한다." 그는 2004년 뉴욕·프라하·베를린·파리 등의 도시를 사진 한 컷당 오전 9시부터 8시간 동안 노출을 줘 찍은 '8시간 시리즈'를 선보였다. 이번 프로젝트는 카메라 대신 캔버스로, 노출 시간 2년을 준 사진을 찍는 셈이다.
이국(異國)의 영토에 캔버스를 설치하는 작업은 녹록지 않았다. 지난해 7월 노자(老子)의 고향인 중국 허난성(河南省)에 캔버스를 설치할 때는 지역의 노자사상연구회장이 "캔버스에 어떻게 중국의 사상을 담아 세상에 알리겠다는 건가?" 하고 물었다. 김아타는 휴지에 고량주를 묻혀 노자사상연구회장의 코앞에서 살랑살랑 흔들었다. "순간 그가 공손히 인사하더군요. 그 이후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됐어요." 설치한 캔버스를 관리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가난한 이가 많은 허난성에서는 캔버스나 지지대를 양(羊)을 덮어주는 담요나 땔감으로 사용할 우려가 컸어요. 고민 중이었는데 한 어르신이 '그 앞에 향로를 놓아두면 될 거 아니냐'고 말했어요. 향로를 놓아뒀더니 진짜로 캔버스 설치 장소가 지역의 성소(聖所)가 됐죠."
캔버스에 남은 흔적은 장소의 정체성을 반영한다.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에 설치한 캔버스엔 신기하게도 향불로 구멍을 낸 것처럼, 히로시마의 캔버스엔 눈물이 흐른 듯한 자국이 남았어요. 사실 캔버스에 정말 '향불'이나 '눈물' 자국이 남았다기보다는 보드가야·히로시마라는 말을 듣는 순간 우리 인식 속의 '석가모니'와 '원폭'이 작용한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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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7월 인도 보드가야 캔버스 설치 장면. /김아타 제공
'자연이 그린 그림'은 김아타가 2003년부터 2009년까지 진행한 '인달라 시리즈'의 연장선상에 있다. '인달라 시리즈'는 같은 도시나 같은 작가의 작품을 1만 컷 이상 찍은 디지털 이미지를 층층이 포갠 작품. "뉴욕 곳곳을 찍은 사진 1만 컷을 포갰더니 회색 면만이 남았죠.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 회색 면에는 사실 엄청난 이야기가 들어 있는 거잖아요. 이젠 빈 캔버스에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담아보자는 생각이 들었지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랄까."
김아타는 폴란드 아우슈비츠,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이집트 나일 강변 등에도 캔버스 설치를 추진 중이다. "할 수만 있다면 우주에도 캔버스를 설치하고 싶다. 하얀 캔버스는 광활한 우주의 크기와는 비교할 수 없이 작지만 그 가치와 상징성은 무한하다."
☞김아타는 누구
사진을 독학한 김아타는 창원대 기계공학과 졸업 후 본격적으로 사진가의 길로 들어섰다. 2006년엔 뉴욕 국제사진센터(ICP)에서 아시아 작가 최초로 개인전을 가졌다.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 아트 컬렉션, 휴스턴 미술관,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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