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현지 시각) 미국 일리노이주 캘버리 묘지에선 엄숙하고 성스러운 안장식(solemn and sacred burial ceremony)이 열렸다. 6·25 때 전사한(be killed in action) 미군 병사 유해를 69년 만에 같은 날 같은 전투에서 전사한(perish the same day in the same battle) 쌍둥이 형제 곁에 묻어주는(bury him next to his twin brother) 자리였다.

먼저 안장돼 있던 조지 크렙스 일병(private first class)과 이날 그의 곁에 묻힌 존 상병(corporal). 1950년 7월 11일 조치원 인근 전투에서 전사했을 당시 이 쌍둥이의 나이는 19세였다. 누가 형인지 모른다. 고아(orphan)로 자랐기 때문이다. 1930년 12월 11일 생일이 같다는 사실만 안다. 어떤 연유에선지(for some reason or other) 다른 형제자매(sibling) 5명과 함께 고아원에 맡겨졌다(be left in an orphanage).

유독 우애가 돈독했던(share a close bond) 쌍둥이는 함께 자원입대했다(volunteer for military service). 일본에 배치됐다. 같은 중대 소속이었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at the outbreak of the Korean War) 미 육군 24사단 21연대 3대대 L중대로 나란히 전출돼 전쟁터로 가게(go into the battlefield) 됐다.

엄청난 숫자의 보병(massive number of infantry)을 이끌고 조치원 쪽으로 남하하는 북한군 탱크 33대 저지 작전에 투입됐다. 하지만 대전차 무기 부족으로(due to a lack of anti-tank weapons) 4대밖에 파괴하지 못했다. 북한군이 양쪽을 포위하며 반격을 가해왔다(envelop both flanks and strike back). 수적 열세를 무릅쓰고(despite being outnumbered) 6시간 넘게 교전을 벌였으나 다수의 사상자가 생기면서(suffer heavy casualties) 후퇴를 하게 됐다.

그런데 존 상병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저기 위쪽에 있다. 내가 가서 구해오겠다"는 고함이 들렸다. 조지 일병이었다. 다른 병사들이 만류할(detain him by the sleeve) 사이도 없이 전투 현장으로 되돌아갔다. 이후 쌍둥이 중 어느 쪽도 볼 수 없었다.

조지의 시신은 수습돼 고향으로 운구됐지만, 존은 전투 중 실종 명단에 올려졌다(be listed as missing in action). 1951년 2월 조치원 인근에서 5구의 유해가 발굴돼 2구는 신원이 확인됐지만(be identified), 3구는 확인 불가능해(be unidentifiable) 호놀룰루 국립기념묘지 무명용사 묘(Tomb of the Unknown Soldier)에 묻혀 있었다. 그중 1구가 지난해 12월 치아와 흉부 방사선 및 인류학적 비교 분석(dental, anthropological and chest radiograph comparison analysis)을 통해 존으로 확인돼 69년 만에 고향 땅속에서 쌍둥이이자 전우(fellow soldier)였던 조지와 재회하게 된 것이다.

6·25 때 실종된 미군은 8156명, 이 중 494명의 신원만이 확인된 상태다. 얼마나 더 많은 애달픈 사연(heartrending story)이 아직도 이 땅에 묻혀 있는지 모른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5/20/201905200299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