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가 여전히 서툴기만 한 이유는? ‘공부를 하지 않아서’라는 가장 간단하고 명확한 ‘진실’을 앞에 두고도, 영어 때문에 생긴 생채기가 부담스럽기만 한 사람들은 애써 다른 답을 찾기 일쑤다. 몸에 좋다는 보양식이나 영양제는 꼬박꼬박 챙겨먹으면서, 정작 건강해지는 습관은 제쳐두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건강해지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금연이나 운동이라면, 영어 울렁증의 명약은 공부다. 그렇다고 책만 무작정 파고 든다고 해서 영어가 늘까? 한인회에서 영어 강의를 하고 있는 스티브 한씨가 답한다. “아니, 아니, 아니되오!”


영어는 잘 짜여진 공식이 아니라 ‘언어’일 뿐
스티브 한씨의 이력은 좀 독특하다.  한 가지 직업으로는 그를 설명하기가 좀 애매하기 때문이다.
“맥매스터 대학에서 건축공학을 공부했어요. 그 후 전공을 살려 건축회사에 취직했는데, 어느 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한국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월드컵 열기가 한반도 남쪽을 뜨겁게 달구던 2002년 때의 일이다. 그가 찾아간 곳은 한 어학원이었다. 영어강사로서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가르치는 일이 너무 즐거웠어요. 지금은 한인회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데, 돈을 벌겠다는 생각보다는 가르치는 즐거움을 놓고 싶지 않아서에요.”

그는 단순히 ‘교포 강사’ 수준에 만족하지 않았다. 대학 강단에 서기도 하고, KBS와 SBS 라디오에서 영어 코너를 진행하기도 했다. 지난 해 밴쿠버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소위 ‘잘 나가는’ 강사들과 어깨를 견주었던 셈이다.

“10년 정도 영어 강사로 일하다 보니, 왜 한국 사람들의 회화실력이 더디게 느는 지 알겠더군요.”

스티브씨가 보기에 어휘 수준이나 문장을 해독해 내는 능력은 손색이 없다. 그런데 정작 필요한 커뮤니케이션 기술은 한참 떨어진다. 그에게 물었다. 왜 그러는 걸까요?

“영어를 ‘원리’ 위주로 습득해서 그래요. 영어도 수학처럼 어떤 공식이 존재한다고 배우다 보니, 회화 할 때도 그 공식, 그러니까 문법만 염두에 두게 됐지요. 이런 상황에서는 말다운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영어는 원리가 아니라 언어라는 생각에서 접근해야 해요. 한마디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라는 거죠.”

스티브씨가 보기에 영어의 기본은 ‘발음’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정확히 발음하지 못한다면, 한국식 영어발음에 익숙한 몇몇 원어민 영어강사를 제외하면 누구도 상대방이 말하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학습자들이 표현 하나 외우는 데는 정력을 쏟아부으면서도 발음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발음을 홀대하는 게 저로서는 참 놀라운 일이에요. 원할한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원어민 발음에 가깝게, 그러니까 흉내 정도는 낼 수 있어야 하거든요.”

스티브씨의 설명을 계속 들어보자.

“우리는 사과(apple)를 ‘애플’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발음하지만, 솔직히 앞뒤 맥락이 없다면 이 단어를 이해할 원어민은 많지 않을 겁니다. 애플은 실제로는 ‘애뽀’에 가깝습니다. 오른쪽(right)은 라이트가 아니라 ‘롸잍’이에요. 이게 원래 발음이고 이걸 흉내 낼 수 있어야 말하기, 듣기 실력을 동시에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어 좀 한다는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얘기가 있다. 회화 실력을 키우려면 원어민 앞에서 ‘민망한 경험’을 수시로 해야 한다는 것. ‘애플’이라는 쉬운 말도 상대방이 못 알아 듣는 다는 것을 깨달아야  발음의 중요성을 그제서야 체감하게 된다.


‘스몰 토크’로 영어 울렁증을 정복하다
영어 울렁증이 생기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완벽한 영어’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일단 주어가 있어야 하고, 세련된 동사를 구해야 하고···. 아, 그렇지 ‘시제일치!’ 이것도 잊지 말아야지. 이렇게 저렇게 해서 나름 완벽한 문장을 조합했다고 자부하고 있는데, 상대방의 답은 뭔가 허전하고 성의 없어 보일 때가 종종 있다.

“그냥 일상 대화를 나눌 때, 주어 같은 건 생략할 때가 많아요. 언어의 본래 목적, 그러니까 의사소통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기 때문이지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머릿속에서 이런 말, 저런 말을 만들지 말고 그냥 입 밖으로 ‘핵심 단어’만 내뱉으란 얘기에요.”

이를테면 오늘 내가 오퍼 하나를 받았다라는 얘기를 하고 싶을 때, ‘나’(I)나 ‘받았다’(receive)는 단어를 나열할 생각하지 말란 뜻이다.

“Offer today!라고만 얘기해도 상대방에게 자신이 말하려는 바를 훌륭히 전달할 수 있어요.”

아니, 이 사람. 지금 ‘이태원 영어’를 구사하라는 건가?

“저는 차라리 이태원 영어라도 구사하는 사람이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서의 언어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믿어요.”

그의 말을 ‘엉터리 영어’를 해도 괜찮다는 말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원어민조차도 간단한 단어 몇 개로 의사를 주고받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스티브씨가 생각하는 ‘영어도사’는 북미 문화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 문화 중에서 영어학습자가 눈여겨 볼 것이 바로 ‘스몰 토크’(Small Talk)다.

“북미 사람들은 수퍼마켓이나 공원 등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과 대화하는 걸 즐겨 합니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도 거리낌 없이 ‘하이’하며 인사하잖아요.”

이 ‘스몰 토크’는 영어 울렁증 치료제이기도 하다. 용기 내서 한 마디 두 마디씩 꺼내놓다 보면, 상대방의 반응에 맞장구 치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 그럼 어떤 얘기로 ‘수다’에 끼어들까? 결론부터 말하면 아는 만큼 할 말도 많아진다. 스티브씨의 경험담에서 힌트를 얻어보자.

“저는 중학교 2학년 때 부모님을 따라 캐나다로 이민 왔어요. 영어를 거의 한마디도 못 하는 상황이라서 힘든 점이 참 많았지요. 친구들도 저랑 잘 놀아주지 않았어요. 말을 걸어도  무슨 뜻인지 몰라 멍한 표정을 짓는 동양인이 좋아 보일 리 없었겠죠.”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친구를 만들고, 영어를 내 언어로 만들 수 있을지 많이 고민했다. 그때 생각난 것이 하키 관련 서적이었다. 선수의 연봉부터 장단점, 팀 정보 등을 수록한 그 책을 스티브씨는 달달 외웠다.

“캐나다 얘들에게 하키는 거의 종교에 가깝다는 걸 알게 됐어요. 쉬는 시간에는 거의 하키 얘기 뿐이었죠. 어느 날 자기네들끼리 하키 얘기를 주고 받는데, 책을 외워서인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쏙쏙 들리더군요. 그 중에 어떤 아이가 궁금해 하는 걸, 제가 바로 답해 준 적이 있어요. 그후부터 저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지더군요. 친구로 인정해 준 거예요.”

‘스몰 토크’로 말문을 트고 싶거나 혹은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싶다면, 적어도 스티브씨가 기울인 노력 정도는 해야 할 것 같다.
문용준 기자 myj@va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