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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서 의사로 살아온 이야기

문용준 기자 myj@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5-08-14 13:44

“월등해져라, 평등은 그 다음 요구하는 것”
문용준 기자의 차 한 잔 합시다 18-신두호 박사


이민 사회에서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선은 모호할 수밖에 없다. 저마다의 시각에 따라 주류 혹은 비주류의 범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행복은 계량화되기 어렵다는 점에서 주류와 비주류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낯선 캐나다 사회에 안착하려는 새 이민자의 노력은, 그것이 소위 주류사회 편입을 위한 갈망이든 아니든 간에 충분히 존중받을 만하다. 그리고 주류 입성의 순간이 “자신을 100% 연소시킨 댓가로 기존 토착민들만이 점유하던 권리를 새롭게 누리게 됐을 때”로 정의될 수 있다면, 한인사회에도 분명 좋은 본보기들을 찾아볼 수 있다.  지난 약 반세기 동안 캐나다의 의사로 살아온 신두호 박사(72세·사진)가 그 중 한 명이다.








“물어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1968년, 한국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인턴직으로 6개월을 살아왔을 때였다. 청년 신두호는 서둘러 짐을 싸야 했다. 온가족의 캐나다 이민이 결정됐기 때문이다. 당시의 통념만 놓고 보자면 “신씨 집안”의 이민행은 의사로서 한국에서 누릴 수 있는 기득권을 버리는 것과 다름 없었다. 신두호씨 뿐 아니라 그의 아버지 역시 의사였다. 납득하기 어려운 그 이민의 이유를 신두호씨는 이렇게 기억했다.

“1960년대만 해도 전쟁 후유증이 만연했던 것으로 기억해요. 한국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은 자는 그 과정을 전부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요. 저희 부모 세대에겐 전쟁에 대한 공포가 더욱 컸을 거에요. 그래서 제 부친이 이민을 계획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쟁의 위협 없는 안전한 곳에서 자녀를 키우고 싶다는, 그런 마음이 있었겠지요.”

전쟁의 위협 없는 나라는, 하지만 밝은 미래까지 섣불리 보장해주지 않았다. 이민 후 온타리오주에서 수련의 생활을 시작하게 됐지만, 그게 다였다. 그의 당시 심경을 고스란히 옮기자면 수영도 할 줄 모르는 자신을 누군가 태평양 바다 한가운데에 빠뜨린 것 같았다. 물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몫이었다.


이민 초기,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야겠다는 본능이 그때의 나를 지켜줬다고 생각해요. 6년 반 동안 임상병리과 인턴으로 또 레지던트로 일했는데, 그 시간을 혹독하게 보낸 것이 결과적으로 내겐 큰 도움이 됐습니다.

무엇이 가장 힘들었습니까?
영어나 캐나다 문화 그리고 의학 지식까지, 모든 것이 어렵고 서툴렀죠. 실제 한국에서의 의학 공부는 무용지물에 가까웠어요. 환자를 어떻게 대해햐 할지, 이런 것에 대한 교육이나 실습은 거의 받지 못한 채 캐나다로 왔으니까 말이죠.

난관을 극복한 건 물론 노력이었겠지요.
병원에서 먹고 자며 마치 고시공부하듯이 모든 일에 매달렸어요. 질병과 관련해 한 가지 주제가 주어지면, 그 병의 원천까지 끝까지 알아야겠다는 게 그때의 내 태도였어요. 자연히 그 병과 관련된 책과 저널들을 모조리 찾아 읽었습니다.

잠 잘 틈도 없었겠군요.
노력은 상대적인 거라고 생각해요.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는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니까요. 이민 초기를 돌이켜보면, 내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데 내게 할당된 시간 거의 모두를 투자했던 것 같습니다. 잠은 하루 서너 시간 정도 잤어요. 매일 한두 시까지 의학 서적을 파고 아침에는 브리핑에 참석하다 보니 어느 순간 한국어가 되려 어색해지더군요.

그 과정이 물론 쉽지는 않았겠지요.
모르는 것을, 그래서 누군가에게 물어보는 것을 나는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았어요. 의학이든 영어든 모르는 것이 생기면 주변 동료들에게 그때그때마다 질문을 던졌지요. 질문에 대한 답을 내 것으로 소화하면서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거에요. 



“네트워크는 상대의 자산을 내 자산으로 만드는 마법이다”

6년 반 동안의 노력, 이제 슬슬 열매를 수확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먼저 전문의 취득 과정이 궁금합니다.
전문의가 되기 위해선 별도의 시험에 통과해야 하는데, 합격률은 통상 70% 수준이에요. 그런데 내가 전문의 시험을 치르던 시절엔 펠로우십 시험이란 게 따로 있었어요. 전국의 전문의를 대상으로 한 시험으로, 응시자 중 5% 미만만이 펠로우십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 시험에 제가 1등으로 붙었습니다.

전국 수석이라, 대단한데요. 여기저기서 스카웃 제의를 많이 받았겠군요.
아니요. 그렇지 않았어요. 시험은 9월에 봤고, 결과는 12월에 발표됐는데 그때까지 난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지 못했어요. 동료 백인 의사들은 시험 결과가 채 나오기도 전에 이 대학 저 대학에 전부 채용됐는데 말이죠. 

억울했을 것 같습니다.
글쎄, 난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차별을 받지 않는다는 게 더 이상하다고 생각했죠. 영어가 완벽하지 않은 동양인니까, 그게 사실이니까…. 게다가 이곳 병원사회에도 알게 모르게 서로간에 차별이 많이 있습니다. 어찌됐건 터줏대감, 다시 말해 기존 기득권층과의 경쟁에서 내가 돋보이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월등한 실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 이게 전부입니다. 차별에 주눅들지 말고, 차별받았다고 신세한탄도 하지 말고, 이를 극복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느 선까지 가야 차별을 극복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나를 놓치면 손해다, 상대방이 이런 생각을 갖도록 해야 해요. 예를 들어 볼께요. 만년필 두 개가 있다고 칩시다. 어느 것을 고르겠어요? 선택하는 사람 입장에선 겉모습, 그러니까 보기에 좋은 것이 좋은 것 아니겠어요? 그게 당연한 거죠. 하지만 두 만년필의 질이 완전히 다르다고, 이를테면 하나는 1년을 쓸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일주일도 채 못 쓴다고, 그렇게 가정해 보세요. 결국 1년을 버틸 수 있는 만년필이 선택될 겁니다. 일주일짜리를 선택한 사람은 손해가 막심할 테니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차별은 이민자인 우리가 극복해야 할 대상이에요. 그것을 극복하게 되면 기회는 분명히 찾아 옵니다. 월등해져야 합니다. 평등은 바로 그 다음에 요구하는 거에요.

신박사에게는 기회가 어떤 식으로 찾아왔습니까?
병원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할 때였어요. 교수진부터 인턴까지 모두가 함께한 자리였어요. 그때 교수 중 한 명이 내가 일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깜짝 놀라더군요. 

당연히 그랬겠지요. 펠로우십 전국 수석이었으니까.
그 교수가 저에 대한 레퍼런스를 전국의 의과 주임 교수 모두에게 돌렸어요. 그랬더니 여기저기서 연락이 오기 시작하더군요. 밴쿠버의 로열컴럼비안과 세인트폴 종합병원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네트워크의 힘이었군요.
그렇지요. 네트워크는 마법과도 같은 거에요. 상대방의 자산을, 상대방의 지식을 내 것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는 거니까. 네트워크를 관리하고 활용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주어진 일종의 숙제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밴쿠버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한데요.
2월 말에 밴쿠버에서 인터뷰를 했는데, 내가 있었던 토론토와는 날씨가 완전히 달랐어요. 토론토는 한겨울인데 밴쿠버엔 벚꽃까지 활짝 필 정도로 온화했죠. 그래서 밴쿠버에서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어요. 1975년 7월 1일, 밴쿠버에서의 삶이 시작됐습니다.

이후 2008년까지 써리메모리얼병원의 임상병리과 과장으로 재직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들어간 곳은 병원이 아니라 소수의 의사들로 구성된 일종의 그룹이었어요. 우리 그룹이 BC주내 열세 개 종합병원의 임상병리과를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BC검시청과도 부검 관련 계약이 되어 있고, BC바이로라는 검사실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그룹의 말하자면 일종의 주주에요.

토착민들, 정확히 얘기하면 밴쿠버 사회 기득권층과 어깨를 함께 하게 됐다는 얘긴데, 한인사회에까지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있었습니까? (신두호 박사는 평통 회장으로서 오랜 시간 활동한 바 있다.)
이민자가 한국을 염두에 두는 것은 당연한 일이에요. 이민 2세들은 한국과의 연결고리가 약해지기 마련인데, 어떠한 형태로든 모국을 가까이 할 필요가 있어요. 한국이 잘돼야 우리도 좋아지지만, 이민자가 강해지면 한국도 강해진다는 사실도 알았으면 합니다. 이것이 이민 2세들에게 내가 전달해 주고 싶은 이야기에요.
문용준 기자 myj@vanchso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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