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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더미 속 기적 만든 한국… 우리 희생은 가치 있었다”

최성호 기자 sh@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3-12-06 09:55

캐나다 6·25 참전용사 워렌 바이넬씨
1952년 5월 흔들리는 군함 안. 기계를 좋아하던 스물두 살 청년은 정비복 대신 군복을 입고 있었다. 고향을 떠나면서 마음에 자리하기 시작했던 긴장감은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커지고 있었다. 일본에 정박해 며칠을 머물던 군함은 다시 바다를 가르며 이름조차 낯선 나라 '한국'을 향하는 중이었다.
 
부산항에 내리자마자 그가 속했던 부대는 서둘러 북쪽으로 이동했다. 중부 전선을 중심으로 공산군과 대치하고 있던 유엔군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부대를 따라 북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던 그의 눈에 들어온 한국이라는 나라의 모습은 만연한 황폐함 그 자체였다.
 
◇ 회색빛의 나라 ‘코리아’
“내 기억 속에 한국은 온통 회색빛이었다. 북쪽으로 이동하며 스쳐 지난 마을들은 모두 폐허로 변해 있었다. 거리에서는 인기척조차 느낄 수 없었다. 검게 그을리거나 재로 변해버린 집들만 남아 있었다. ‘저곳도 누군가 살던 집일 텐데…’라고 생각하니 끔찍하기만 했다. 전쟁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에는 황폐한 상흔만 또렷이 남아 있었다.”
 
스물두 살 청년 시절 한국과의 첫 만남을 이야기하는 그는 백발이 성성한 80대 노병의 모습이었다. 워렌 바이넬(Byrnell·사진)씨는 1952년 5월부터 1953년 6월까지 캐나다 육군 RCEME(Royal Canadian Electrical and Mechanical Engineers) 소속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 1952년 5월부터 1953년 6월까지 캐나다 육군 RCEME 소속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워렌 바이넬씨. >

정비병이었던 그의 주 임무는 군차량을 관리하고 수리하는 일이었지만 공구보다 총을 손에 쥘 때가 많았다. 당시 휴전 이야기가 오가는 시기였지만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접전이 끈임없이 벌어지던 상황이다.
 
“언덕 하나를 놓고 하루에도 몇 번씩 전투상황이 벌어졌다. 상황이 종료된 뒤에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모든 군인들은 항상 긴장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 나에게는 짧은 휴식시간 동안 배급되던 미지근한 일본 맥주가 잠시 현실을 잊게 해주는 유일한 도피처였다."(당시 유엔군에 제공되는 식품과 물품은 일본으로부터 공급되어 온 것이었다)
 
미지근한 맥주와 함께 전쟁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된 것은 전우애였다. 보직 특성상 같은 고향 출신은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영국, 네덜란드 등 다양한 국가에서 모인 이들은 휴식시간이면 자신만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서로 위로했다. 전우 가운데는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도 있었고, 어디서 배워왔는지 모를 ‘아리랑’을 부르며 분위기를 돋우려는 이도 있었다. 그렇게 13개월이라는 기간이 지났다.
 
“복무를 마치고 캐나다로 돌아온 것은 1953년 6월이었다. 미국 시애틀에 먼저 도착한 뒤 캐나다 국경을 넘어 고향 땅을 밟았는데, 생존 용사들을 한국전 참전 영웅으로 환대해줬던 기억이 난다. 항구에서의 환대는 물론이고 버스로 시애틀에서 밴쿠버로 향하는 동안 경찰이 호위해 줄 정도였으니까.”
 
밴쿠버에 돌아온 그는 전기 기술자로 새로운 직장을 얻었다. 그리고 전쟁의 참혹했던 기억은 묻어두고 평범한 가장의 모습으로 60년이라는 긴 시간을 묵묵히 걸었다. 

◇ “잊혀진 전쟁이라고? 잊지 말아야 할 전쟁”
6·25전쟁은 캐나다에도 상처를 남겼다. 캐나다에서 미국과 영국 다음으로 많은 2만6000여명이 참전했다. 전쟁으로 산화한 참전용사만 516명이다. 그럼에도 캐나다에서 오랫동안 6·25가 '잊혀진 전쟁'으로 불려 왔다. 

이에 대해 워렌씨는 "6·25전쟁은 '잊혀진 전쟁'이 아닌 '잊지 말아야 할 전쟁'이다. 전쟁의 잔혹했던 참상과 전사자를 생각하면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전쟁이다. 한국 땅에서의 숭고한 희생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는 점도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는 캐나다 6·25참전용사회(KVA) 메이플리지(69지회) 회장으로 봉사하며, 6·25전쟁 알리기에 동참하고 있다. 잊혀 가고 있다는 안타까운 생각에 직접 강연에 서기도 했다. 인근 지역 학교에서 '6·25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들려줄 수 없겠느냐'는 식의 요청이 오면 거절한 적이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전쟁의 모습을 학생들과 공유하고, 전쟁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세워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근 학교에서 연락이오면 빠지지 않고 찾아 학생들을 대상으로 전쟁의 참혹함과 캐나다군의 희생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 무에서 유를 창조한 한국… "희생의 가치를 느끼게 해줬다”
워렌씨는 참전 후 6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2013년 4월,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딸과 함께 한국을 찾았다. 그가 봉투를 꺼내 들어 내민 사진 한 장에는 서울 시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아파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무슨 사진인지 설명해달라’고 하자 그는 한국에 방문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국에 방문했을 때, 고층 빌딩들이 들어선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1개밖에 없던 한강 다리는 이제 31개나 된다고 하더라. 거기에 또 다리를 짓는다는데…. 60년이라는 기간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겠지만 이렇게 많이 변해 있을 줄은 몰랐다. 전쟁으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던 나라였다. 지금은 10대 경제 대국이라고 들었다. 한국의 발전된 모습에서 우리들의 희생이 값진 것이었음을 느꼈다.”


<▲  워렌 바이넬씨가 지난 4월 한국 방문 사진을 꺼내 보여주고 있다.  >

이번에는 사진을 여러장 꺼내 보이더니, 한 장씩 어딘지 설명했다. 판문점, 현충원, 부산 UN 유엔 기념 공원 등 이번 한국 방문을 통해 둘러본 곳을 한참 이야기하고, 한국 정부에 대한 감사 인사를 전했다. 
 
"거리에서 6~7살로 보이는 아이들이 '감사합니다'하고 인사를 했는데, 그때 가슴이 뭉클했다. 일정 동안 정부가 보여준 각별한 관심에도 감명받았다. 나뿐 아니라 캐나다 참전용사 모두가 이런 한국 정부의 노력에 감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꼭 하고 싶었다. 그리고 한국전쟁에서 산화한 모든 이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한반도에 통일이 오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최성호 기자 sh@v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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