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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계 이민자 갈등 해결한 방법은...”

이광호 기자 kevin@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3-03-29 15:12

석세스 재단 매기 입 이사장 인터뷰
“중국계 이민자 사회도 여러 갈등이 있었죠. 사람 사이에서 문제가 발생했고 해결책도 그 사람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찾았습니다.”

1970년대 중국계 신규 이민자들의 자구책(自救策)으로 시작된 석세스(SUCCESS). 40년의 세월이 흘러 제 이름대로 성공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캐나다의 대표적인 이민자정착지원기관이다.

석세스 재단 매기 입(Ip) 이사장은 초창기 단체 설립 배경과 어려움, 그리고 갈등이 봉합된 과정을 설명하며 ‘사람이 모든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되짚었다.

“1970년대 초, 캐나다의 이민정책이 국가별 할당제에서 점수제로 바뀌면서 이민 행렬의 원천이 유럽계에서 아시아로 바뀌었습니다. 특히 홍콩에서 온 이민자가 부쩍 늘었죠. 해마다 2만~3만명씩 캐나다에 도착했을 정도니까요.”

캐나다 내 중국계는 이미 150년의 이민 역사로 이민자 4세, 5세가 사회에 진출하던 시점이다. 밴쿠버 일원에는 6만명의 중국계 이민자가 살고 있었다.


석세스 재단 매기 입(ip) 이사장. 1970년 이민와 1973년 석세스 창립 당시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30여년간 교원 생활을 했으며 2009년부터 석세스 재단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젊은 새내기 이민자들 모여 자원봉사로 시작”

세월이 흘러 어느덧 ‘구세대 이민자’가 된 입 이사장은 ‘새 이민자’ 시절을 이야기했다. “오타와로 유학 왔다가 자유로운 캐나다의 환경에 반해 정착을 결심했어요. 한국도 비슷하죠? 친척들, 눈치, 관계… 홍콩에서 그렇게 살다가 벗어나니 아주 좋았어요. 다행히 그 당시는 자격만 되면 서류 신청한 자리에서 영주권을 내주던 때였어요.”

패기와 열정이 넘치는 젊은 이민자 부부에게 새로운 땅에서의 정착은 순조로웠을까.
“저를 포함해 많은 사람이 새 땅에 정착하려고 왔지만 실제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었어요. 요즈음 이민자들과 비슷한 원인이었죠. 정착 정보가 전혀 없었으니까요. 게다가 구세대 이민자와 인적 교류도 없어 어디서 뭘 배워야 할지 막막했어요. 그들의 자녀는 이미 캐나다 사회에 동화돼 차이나타운을 떠난 상태였고요. 정부도 언어와 환경이 아주 다른 상태에서 자국민이 된 이들을 어떻게 지원해야 할지 방향도 잡지 못한 상태였어요. 당연히 관련 정책이 있을 리 없었죠.”

그나마 영어가 좀 통하는 젊은이들이 팔을 걷어붙였다.
“변호사, 회계사 등 전문직에 종사하는 젊고 새로 온 이민자들끼리 자원봉사 모임을 조직했어요. 이들의 도움을 받는 새 이민자들도 급격히 늘었고요. 모임이 지속되다 보니 이민 초기 정착뿐 아니라 가정 문제 등 다양한 고민거리를 들고 온 사람들이 많았어요. 밴쿠버 내 다른 기관에서 상담받으라고 권했지만 도저히 메꿀 수 없는 차이가 존재했어요. 누굴 탓할 일이 아닌 것이, 캐나다와 새 이민자 서로 너무 몰랐던 거죠.”

모임을 시작했던 이들은 다시 머리를 맞댔다.
“자원봉사 수준으로는 몰려드는 사람들을 전부 상담하기 불가능했어요. 새 이민자들도 재산을 모으거나 자녀가 좋은 교육을 받을 기회가 갖춰지지 않으면 다시 홍콩으로 돌아갈 태세였고요. 자금력이 있던 새 이민자들 덕에 한창 차이나타운이 부흥했는데 그 열기가 꺼질 위기에 처한 거죠. 결국 정부에 본격적으로 지원을 신청했어요. 새 이민자가 캐나다 사회에 적응하는 것뿐 아니라 정부도 이민자 사회에 더 가까이 다가서는 노력을 하라고 주장했죠. 그때 석세스 상징이 만들어졌어요. 로고를 보면 다리가 위·아래로 놓여있죠? 하나는 이민자가 캐나다 사회로, 또 다른 하나는 캐나다 사회가 이민자들에게로 다가서자는 의미인 거죠.”


석세스는 주류 사회와 이민자 사회가 서로에게 다가가자는 의미로 로고에 다리 두 개를 형상화해 넣었다고 설명했다.


정부에서는 한시적으로 기금을 주었다. 입 이사장은 고민 없이 신 나게 일했던 시기로 당시를 회상했다.
“든든했죠. 연방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충분한 돈이 나왔으니까요. 사명감도 있었고 보람도 있었어요. 초창기부터 사회복지사를 채용해 전문적으로 서비스했어요. 데면데면하던 구세대 이민자들도 큰 지원은 없었지만 대체로 부정적이지는 않았어요. 그들이 초청해 이민 온 친척들도 우리 도움을 받았거든요.”

체계적으로 위기 해결방안 찾아

위기는 그다음 찾아왔다.
“정부가 약속했던 3년이 지났습니다. 연장을 신청했지만 더 이상의 지원은 없다는 태도가 단호했죠. 마지막 4개월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압박감으로 일을 못할 지경이었어요. 임대료, 인건비, 진행비 등 도저히 우리끼리는 해결할 수 없었어요.”

셀 수 없는 토론이 열렸다. 기금 모음행사를 열기로 결정 났다. 다행히 많은 이민자가 도움을 주었다. 당시 한 자리당 10달러의 식사비도 순순히 지갑에서 꺼냈다. 큰 파도를 넘자 순풍이 불었다. 정부에서 다시 정착기금을 마련해주겠다는 연락이 왔다.

본격적으로 기구의 안정을 도모할 시기가 됐다. 결정해야 할 사항들이 넘쳤다. 회의가 잦아졌고 갈등도 필연적으로 불거졌다.
“어느 하나 쉽게 넘어가는 일이 없었죠. 건물을 사야 하나 임대해야 하나, 누구를 어떻게 고용할 것인가, 어떤 정착 프로그램을 새로 만들고 없애야 할지 등등…. 결국 원칙을 정했습니다. 존재 이유를 생각하고 욕심을 버리자는 것이었죠. ‘새 이민자 정착을 돕는 석세스가 가장 잘될 경우를 상상해보자. 다른 곳에서도 정착 지원이 잘 이뤄져 누구도 우리를 찾지 않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문을 닫는다고 생각하자.’ 이렇게 설득했습니다.
다른 단체와 중복되는 일도 하지 않기로 했어요. 예를 들어 이미 중국문화센터(Chinese Cultural Centre)가 하고 있는 차세대 중국어 교육이나 전통문화 계승 프로그램은 배제해 뒷말이 나올 소지를 의도적으로 없앴어요.”

갈등을 없애기 위해 구조적인 노력도 병행했다.
“임원직을 6년 이상 연속적으로 할 수 없도록 못 박았어요. 나중에 다시 들어오더라도 기한이 되면 일단 임원직을 내려놓도록 했죠. 회장보다 임원회 결정에 더 무게를 두었고요. 권한이 집중되면 안 되니까요. 회장은 회의를 진행하는 역할만 하도록 했고 모든 결정은 다수결로 정했어요.”

“오히려 요즈음이 더 갈등”

메트로 밴쿠버의 중국계 인구가 50만명에 육박하는 지금, 입 이사장은 차라리 지금이 더 갈등 요소가 많다고 생각한다. 40년 전에도 구세대 이민자들과 신세대 이민자들 사이에 어색함이 있었지만 이들은 대체로 같은 광동 지역 출신이었기 때문에 말과 정서가 통했다. 70년대 초 이민자가 몰려들 때도 철도 노동자 출신의 구세대 이민자들은 ‘돈을 싸가지고 온 홍콩 출신 새내기’들에 감정적인 대응을 하기보다 이들 덕분에 지역사회 경기가 활성화된다며 ‘윈-윈’이라고 실용적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최근 본토에서 오는 이민자는 국적만 같을 뿐이지 차이가 크다. 캐나다 사회와 어울리려는 노력도 보이지 않는다. 중국계를 벗어나 모든 새 이민자를 보듬는다는 석세스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이광호 기자 kevin@v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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