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장소로 사내 다섯이 우르르 들이닥쳤다. 이들은 한국에서 건너온 지 길어야 2주 정도밖에 되지 않는 신선한, 정확히 말하면 생소한 얼굴들이었다.
명함을 주고 받은 후에도 ‘도대체, 정확히 뭐 하는 양반들이지?’하는 궁금증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명함 위에는 각각 ‘쇼앤라이프’ ‘감성교육 디자인 연구소’라고 적혀 있었다. 명함을 들여다 보며 시쳇말로 멍 때리는 표정을 짓고 있는 기자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그룹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을 닮은 듯한 남자가 먼저 입을 연다.
“안녕하세요, 연극 연출하는 권호성이라고 합니다”
‘오래 묵힌 작품’ 밴쿠버에서 첫 관객을 만나다
하지만 연극계로 한정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연출가로서의 그의 이력이 꽤 화려해 보인다. 연극하는 사람을 화려하다는 수식어로 설명한다는 게 좀 어색하지만 말이다.
권호성씨는 지난 97년 뮤지컬 ‘블루 사이공’으로 백상예술대상 작품상을 받았다. 최근에는 ‘윤동주 달을 쏘다’ ‘친정엄마’ ‘화려한 휴가’를 연달아 내놓았다. 그의 공식 직함은 공연기회사 ‘쇼앤라이프’ 대표, 그리고 극단 ‘모시는 사람들’의 상임 연출자다.
바쁘디 바쁜 그가 밴쿠버에 온 이유는 극단 하누리와의 친분 때문이다. 2006년 하누리가 ‘오아시스 세탁소 습격사건’을 무대에 올렸을 당시 권호성씨는 연출을 맡았다. 그리고 약 6년만에 하누리와 함께 또 다른 시작을 준비 중이다. 이번 작품은 ‘오동리 소방서’(작 이영기)다. 밴쿠버에서 초연된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가 있다.
“오동리 소방서는 제가 속해 있는 극단의 히든 카드 같은 작품인데, 하누리 형님들이 다른 작품들을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해서 결국 공개하게 됐습니다. 한국에 돌아가면 이 작품을 상설 무대에 올릴 계획이에요.”
권호성 연출의 말 그대로 ‘오동리 소방서’는 오래 묵힌 작품이다. 극으로 만들어진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선뜻 세상에 내놓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극본이 책상 서랍 한구석에 방치된 것은 아니었다.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아마 열번도 더 넘게 고쳤을 걸요. 손이 참 많이 갔고 그만큼 이 작품에 대한 애정도 큽니다.”
프로와 아마추어로 구분짓는 건 의미 없는 놀이
권호성씨의 이번 밴쿠버행에는 연극계에서 잔뼈가 굵은 배우들도 동행했다. 대학에서 연기를 지도하는 진남수씨와 김정호씨를 비롯, TV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에서 노래 강사로 출연했던 이종박씨의 모습도 보인다. 막내는 김지웅씨로 나이는 서른셋에 불과하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연기의 길만을 생각했던, ‘뼛속부터 배우’다.
바로 이들이 이번 무대의 주인공인 극단 하누리와 호흡을 맞추게 된다. 볼거리가 풍부해지겠지만, 내심 걱정도 된다. 이들은 프로고 하누리의 배우들은 본업이 따로 있는 아마추어 아닌가. 이에 대해 권호성씨의 답변은 이랬다.
“공동작업이 충분히 가능할 거라 생각했어요. ‘오아시스 세탁소 습격사건’을 같이 했기 때문에 하누리 배우들의 연기에 대한 열정이나 실력 같은 것은 제가 잘 알고 있으니까요. 제 고민은 극을 함께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환경 속에서 어떻게 하면 더욱 효과적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지에 있어요.”
권호성씨는 프로나 아마추어로 구분 짓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놀이라고 생각하는 눈치다.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생각하죠. 자기가 하는 일로 생계를 꾸릴 수 있다면 프로고 그 반대면 아마추어라고···. 그런데 말이에요. 그 기준으로 보면 연극배우들 대부분이 아마추어인 셈이에요. 연극을 해서 돈을 남긴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건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거든요. 캐나다에서도, 미국에서도, 영국에서도, 연극배우들은 상당수가 가난하게 살아요. 그렇다고 이들이 배우가, 프로가 아닌 것은 아니잖아요. 프로냐 아마추어냐 하는 논의는 예술의 영역에서는 거의 쓸모가 없죠.”
중요한 것은 연기에 대한 배우들의 태도, 즉 ‘진정성’에 있다. 연극에 대한 갈증이 있고 그것을 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바로 배우다. 생계 유지를 위해 어떤 일을 하든, 그것은 상관 없다.
돈 주고 연극 보는 사람이 최고 관객
이번 작품에 대한 권호성 연출의 기대는 남다르다. 한국에서보다 더욱 순수한 마음으로 연극에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쉽게 얘기해서 하누리가 이익을 남기려고 연극을 하는 건 아니잖아요. 다시 말해 상업적인 이유로 작품이 훼손될 일이 없다는 거죠. 연극 자체에만 푹 빠져들 수 있기 때문에 더 큰 울림으로 극장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동리 소방서’에서 주연은 하누리의 윤명주씨가 맡는다. 현실 세계에서 윤씨의 직업은 일식집 요리사. 하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연극에 연애를 걸어 온, 충분히 단련된 배우다. 드라마 덕분인지 이번 작품의 최대 흥행 카드(?)로 떠오른 이종박씨는 윤씨의 친구로 무대에 선다. 김정호씨는 최고 권력자인 ‘군수’ 역할을, 김지웅씨는 이들 중에서 실제로 나이는 제일 어리지만 군수 머리위에서 유일하게 놀 수 있는 ‘감사님’이시다.
위의 인물들이 ‘오동리 소방서’의 존폐 여부를 놓고 다툼을 벌인다는 게 이번 연극의 주된 이야기다. 연극 관계자는 “그 싸움과 갈등을 경험하면서 관객들은 잊고 지냈던 ‘아날로그의 감성’과 만날 수 있다”고 전한다.
끝으로 연출에게 물었다. 어떤 관객이 이번 연극을 보았으면 하는지.
“음,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될까요? 제 경험만 놓고 보면 자기 돈 주고 연극 보시는 분들이 제일 편해요. 이런 관객들은 ‘본전 생각’에서라도 하나도 빠짐 없이 연극을 즐기려고 하거든요.”
연극 ‘오동리 소방서’는 25일 목요일 버나비 쉐보트 아트센터에서 처음으로 그 문을 연다.
문용준 기자 myj@vanchosun.com
공연 정보
날짜 및 시간 : 10월 25일(목) 오후 7시 30분
10월 26일(금), 27일(토) 오후 4시 30분, 오후 7시 30분.
장소: 쉐보트 아트 센터 (버나비 디어레이크 위치. Shadbolt Centre for the Arts)
문의: 604-552-2828, 778-887-1312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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