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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길 화백

문용준 기자 myj@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2-09-21 11:32

“화가의 붓끝에서 이민생활 45년, 그 역사를 보다”

칠순이 된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났지만, 붓을 들고 하얀 도화지 앞에 서 있을 때면 그는 어느새 소년이 된다. 처음 그림에 연애를 걸던 시절이 생각나고 가슴은 쿵쾅쿵쾅 뛴다. 그 설레임을 간직한 채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나갈 생각이다. 밴쿠버의 대표 한인작가인 유형길 화백의 독백이다.

노년의 화가를 그의 집에서 만났다. 그는 “밴쿠버가 40년 쯤 전에는 말이지...”라고 시작되는 얘기를 해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한인이기도 하다.




 




주인을 닮은 그의 집 ‘작품 박물관’이 되다
화가의 집 뒷 정원에 꾸려진 텃밭에서는 고추와 가지 등이 건강한 빛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구석에 이 집의 ‘이름표’가 씩씩하게 서 있었다. 푯말 위에는 ‘유형길 작품 박물관’이라고 적혀 있다.

자식과도 같은 작품들을 언제나 지켜보고 세인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게 화가의 오랜 소원이었다. 소망을 들어 준 준 곳이 바로 집이었다.

“이 집을 구입한 지 30년도 훨씬 더 됐습니다. 이사 다니는 게 귀찮아서 그랬는지 한집에서만 오래 살게 됐네요.”

집의 역사만큼이나 유 화백의 이민사(史)도 깊다. 그가 아내 최숙자씨 그리고 돌이 갓 지난 아이와 함께 밴쿠버에 정착한 것은 지난 68년의 일이다. 한인 이민 행렬의 거의 맨 앞에  서 있었던 셈이다. 그 시대에 이민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화가의 답변은 단순했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보다 자유로운 환경에서 내가 원하는 그림을 말이죠.”

그는 유복한 집에서 자랐다. 보릿고개라는 단어가 나왔을 만큼 궁핍하기만 했던 그 시절에도 집안은 풍요로웠다. 아버지는 무역을 주력으로 하는 대기업의 수장이었고, 3남인 그가 가업을 물려받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저는 애당초 기업 경영에는 큰 관심이 없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그림 그리는 것이 가장 행복했거든요.”

이북 출신의 아버지는 한없이 엄했다. ‘환쟁이’가 되려는 아들을 틈만 나면 나무랐다.

“아버지는 제가 연세대학교 상과에 입학하기를 바라셨습니다. 당시 연대는 무시험제도라 입학이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어요.”

대학 입학 시즌을 앞두고 아버지는 해외 출장길에 올랐다. 아들에게 다짐 하나를 단단히 받아놓은 채.

“형길이 니, 연대 상대 꼭 지원하는기다!”


66년 처음으로 캐나다 이민을 꿈꾸다
입학원서를 손에 들고 몇날 며칠을 고민하던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맞서기로 결심했다. 그가 찾아간 곳은 연대가 아니라 서울대 미대였다. 결과는 합격, 그것도 실기 부문 수석이었다.

“아버지 뜻을 따르지 않았는데도 수석이어서 그랬는지 별로 큰 탈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대신 단서 하나를 다셨지요. 미술은 대학 다니는 동안에만 하고 졸업 후에는 회사를 이어받으라는···.”

졸업과 동시에 화가로의 꿈은 잠시 접어야 했다. 그는 양복을 깔끔히 차려 입고 회사로 출근했고, 일주일 내내 일해야 했다. 말 그대로 ‘월화수목금금금’이었던 셈이다.

“일이 힘들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어요. 대신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저를 많이 힘들게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 허락없이 친척에게 금전적 도움을 주었다는 이유로 그는 자기 걸음으로 회사를 나오게 된다.

“친구 도움으로 서울의 배명 고등학교에서 미술 강사로 일할 수 있었어요. 그러던 중에 캐나다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아직도 기억이 선명하다. 화가들이 주로 모인다는 서울의 한 다방이었다. 그곳에서 한 친구가 캐나다 이민 신청서를 갖고 있는 것을 우연히 알아채게 됐다. 다짜고짜 그것을 달라고 친구를 보채기 시작했다. 신청서 하나쯤이야 대사관에 가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당시만 해도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신청서 자체가 그만큼 귀했다.

66년 이민을 신청했고 2년 뒤인 68년에 밴쿠버 땅을 밟게 된다.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일을 먼저 챙겨야 했다
캐나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당시, 한없이 싱싱했을 이 청춘에겐 화가로서의 뚜렷한 꿈이 있었다. 하지만 부모의 그늘을 벗어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가난과 생계 문제에 대한 고민이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외화 반입이 자유롭지 못했다. 수중에는 수백 달러 정도가 전부였다.

하고 싶은 일은 그림이었지만 그는 가족을 위해 해야 할 일을 먼저 챙겨야 했다. 간판을 만들고 하역장에서 노동을 하고 한때는 광산에도 나갔다.

베트남 전쟁이 터졌고 캐나다는 군수물자를 대느라 나름 특수를 누릴 수 있었다. 그 시기에 그는 광산에서 일했고 조금씩 돈을 만지게 된다. 이민 초기에는 지금 사람들이 대놓고 부러워할만한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었다.

“71년이었을 거예요. 변변한 일자리가 없었을 때였는데 교회 목사님이 절더러 학교에 가서 영어를 배우라고 하더군요.”

아버지 무역회사에서 오랫동안 일해서인지 영어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시간을 투자해 영어학교에 나갔다.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영어학교에 출석만 하면 나라에서 생계보조비를 지급했기 때문이다. 그는 세 사람이 먹고 살아도 남을 만큼의 돈이 생겼다고 회상한다. 밴쿠버가 천당 아래 999당이라는 얘기가 처음 흘러나온 것은 아마 그때였을지도 모른다.



그림만 그리는 단조로운 삶, 그래서 건강하다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면서도 그의 가슴 한켠에는 늘 그림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노동하는 틈틈이 붓을 잡아보았지만 목마름이 완전히 해소되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그림과 연을 이어가고 싶었다.

“86년에 처음으로 제 비즈니스를 시작했어요. 워터프론트역 건물 내에 화랑을 겸한 카페를 열었습니다.”

86년에는 밴쿠버 엑스포가 있었다. 그리고 워터프론트역에 스카이트레인과 지금의 시버스(Sea bus)가 처음 등장했다. 덕분에 유동인구가 부쩍 늘었고 가게는 번창했다.

“캐나다철도회사가 건물주였는데, 그들이 제 그림을 좋게 봐주었어요. 그래서 임대료의 절반만 내도록 배려해 주었지요.”

가게에 자신이 그린 그림을 전시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는 좋았다. 그렇게 일과 그림을 병행하다 65세가 되던 해부터는 오로지 꿈에만 전념하게 된다.

노년에 접어들었지만 화가로서 그의 열정은 돋보이고 입지 또한 탄탄하다. 68년부터 지금까지 연 개인전만 50회에 이른다. 단체전에는 100여 차례 참여했다. 반기문 UN총장도 그의 작품을 주목한 바 있다.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고 또 건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제가 사랑하는 일을 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먹고, 자고, 그림만 그리며 저는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그는 자신의 행복을 좀 더 많은 사람과 공유하기를 원한다. 이제는 ‘유형길 작품 박물관’이 된 그의 집에서 말이다. 작품 감상을 원하는 사람은 전화로 미리 연락을 취해야 한다. 전화는 토요일에만 받는다. (604)433-0107
문용준 기자 myj@v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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