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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비린내 나는 전장의 기억, 나는 전쟁을 반대합니다”

문용준 기자 myj@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2-06-08 11:03

6·25 참전유공자회 김일수 회장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로 시작되는 노래에 맞춰 고무줄놀이를 즐겼던 세대, 혹은 플라스틱 바가지를 철모마냥 눌러 쓰고 친구들과 람보 흉내에 흠뻑 빠졌던 사람들에게 전쟁은 그 속살을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1950년 6월 25일 시작되어 3년간 계속됐던 한국전쟁. 같은 핏줄을 타고난 이들의 싸움은 처절했다. 한국인 사망자는 1백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며, 이중 85%가 민간인이다. 백과사전을 계속 들춰보면, 캐나다를 포함한 전체 참전국 전사자 숫자가 2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와 있다. 하지만 이 숫자를 접하고도 전쟁의 참혹함을 고스란히 엿보기 힘들다. 오히려 전후세대들에겐  자신의 동성애 친구를 살해하고, 그 시신의 일부를 이곳저곳에 소포로 부친 살인마의 뉴스가 수백만명이 희생된 전쟁보다 더욱 끔찍하고 현실감 있게 다가올지 모른다.

또 다시 6월이 되었다. 미디어들은 습관적으로 한국전쟁에 눈을 맞추고 있다. 기자 또한 전쟁의 한복판에 서 있었던, 그리고 지금은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나이가 되어 버린 노병을 만났다. 그에게 전쟁에 대해서 물었다.

“전쟁? 그거 아주 몹쓸 거야. 다시는 한반도에 그런 일이 있어선 안돼.”

김일수 대한민국 6·25참전 유공자회 캐나다 서부지회 회장과의 대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휴전상태에 들어간 지 60년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 세월도 전쟁의 비참했던 기억을 씻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듯 보였다.

“썩기 시작한 시신들 틈에서 아버지를 찾아 헤맸다”

김일수 회장은 38선 접경지대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창 꽃냄새 풍겨야 할 19세 나이에 그는 전쟁과 직면했다.

“처음엔 가족과 함께 피난을 떠났지요. 수원 어디쯤 갔을 거야. 그곳에서 북한군을 만났고, 다시 고향인 황해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고향은 이미 예전의 고향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그는 아버지를 잃었다.

“북한군이 200명 넘는 사람들을 굴 속에 밀어 넣은 뒤 무차별 난사했어요. 맞아, 양민 학살이었어. 그 중에 내 아버지도 계셨지요.”

야만적인 총성이 멈추고 며칠 뒤, 그는 시체더미에서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썩기 시작한 시신 틈 속에서 몇몇은 숨을 쉬고 있었다. 살아남았다는 것이 더욱 끔찍하게 느껴진, 그런 순간일 수도 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어. 어머니가 치아를 확인하고 나서야 아버지인지 겨우 알아볼 수 있었지·. 시체 썩어가는 냄새가 얼마나 고약한지 말로 설명해 줘도 모를 겁니다. 그 냄새 때문에 천으로 코와 입을 막았는데, 그 모습을 보고 동네 어르신이 나를 호되게 야단쳤던 게 기억나네. 아버지 시신 찾겠다는 놈이 냄새 하나 못 견뎌한다고 말야.”

아버지를 잃은 후에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KLO(Korean Liaison Office : 주한 첩보연락처. 일명 켈로 부대) 소속 학도의용대에 들어갔다.

“내가 전쟁에 참여한 이유는 단순해요. 고향에 하루라도 빨리 가고 싶다는 그 마음 뿐이었죠. 나는 군사훈련을 받는 중이었고, 고향에는 어머니와 동생들이 남아 있었거든.”

하지만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는 여든을 훌쩍 넘긴 노병이 되었다.

“목숨 걸고 싸웠지만, 인정받지 못한 켈로부대원”
일반인들에게 켈로부대는 잊혀진, 아니 좀더 정확히 얘기하면 알려지지 않았다. 애초부터 켈로부대는 ‘음지’에서 시작됐다.

“적진에 침투해 요인을 납치하거나 아군을 구출하는 일, 적의 작전을 도청하는 일···. 이게 켈로부대의 주업무였어. 나는 켈로부대 소속 유격부대원이었습니다.”

비밀부대였다. 계급도 군번도 없었다. 처음에는 대한민국 정부조차 이들의 실체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첩보활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길 꺼렸기 때문이다. 적지에서 목숨을 담보로 싸운 이들 중 상당수가 어떤 보상도 받을 수 없었다. 보답은커녕 때로는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켈로부대원으로 3년간 전장을 지켰던 사람이 법적으로는 병역 회피자로 분류된 경우도 있었어요. 병적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었지. 휴전 후 다시 이등병으로 군대에 끌려간 사람도 있었어요. 얼마나 억울했겠어.”

노병의 기억을 되짚어 가다 보면 그 억울함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부대원들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 역시 22세 나이게 죽음과 마주하게 된다.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전열에서 낙오된 적이 있었어요. 남북한간 총격이 오갔는데, 순간 왼손을 쓸 수 없다는 걸 느낄 수 있었지. 총상을 입은 거야. 그 전투에서 동료 8명을 잃었어요.”

응급치료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총알이 관통한 왼쪽 팔에서 피가 끊임없이 흘러나왔지만, 지혈이 되지 않았다. 그는 실탄 7발이 담긴 권총과 수류탄 2개를 챙기고 나머지 소지품은 땅에 묻었다. 포로가 되면 그대로 자결하겠다고 생각했다. 피를 얼마나 흘렸던 걸까. 그는 정신을 잃었다.

“이대로 죽는 걸까. 정말 죽는 걸까···. 생각만 해도 너무 억울했어. 그때 인민군에 의해 목숨을 잃은 아버지가 떠올랐어요. 아버지에게 부탁드렸어. 제발 살려 달라고, 이대로 여기에서 죽을 수는 없다고.”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래, 아버지가 ‘너 죽지 않는다’고 그렇게 얘기했던 것 같다. 그는 일어나 몸을 움직였다. 심한 갈증은 논바닥에 고여 있던 물로 해결했다. 그러다 한 농가에 거주하던 노부부의 도움으로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그때 그 노부부가 했던 얘기를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린 무식해서 인민군이니, 국군이니 또 전쟁이니 무엇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젊은이가 총에 맞아 죽게 됐으니 우선 안으로 들어 와 요기나 해라.’

 




“내 상처 어루만져 준 곳은 캐나다”
그에겐 피비린내로 기억되는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멈췄다. 그는 부대에 남기로 했다. 그리고 15년간 장교로 복무한 뒤 전역했다.

“무역회사에서 일했어요. 그 후에는 나만의 회사를 운영했고, 꽤 잘 됐지. 그러다 캐나다 이민을 결심하게 된 거야.”

그가 캐나다 이민을 결심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다.

“딸이 둘 있는데, 그 얘들이 독일에서 유학 생활을 했거든. 유학 마치고 한국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지 우선 그게 염려됐어요. 당시 아내가 기침을 자주 해서, 공기 좋은 곳에서 함께 살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었고···.”

또 다른 이유는 가슴 아리다. 고향에 두고 온 어머니, 그리고 동생들과 연락을 취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대한민국에선 북한에 자연스럽게 편지를 보낼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캐나다로 이민 온 거였어요. 가까스로 고향과 연락이 닿았고, 동생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었습니다. 말할 나위없이 기뻤지.”

그의 기쁨 이면에는 남과 북으로 나누어 대치하고 있는 한반도의 현실, 그래서 가족과 생이별하고 평생 고향땅을 밟을 수 없다는 서글픔도 묻어 있다. 그는 캐나다 정부가 그 서글픔을 어느 정도 어루만져 주었다고 생각한다.

“캐나다를 위해 싸운 것도 아닌데, 그저 대한민국 내 조국을 위해 목숨을 던진 것 뿐인데, 캐나다 정부에서 나를 유공자로 인정해 주고 그에 맞는 대접을 해 주고 있습니다. 저로서는 감격스러운 일이지요.”

반면 친정인 조국에 대해서는 다소 야속한 마음이 있다.

“국적이 바뀌었다고 해도 유공자들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예우는 해줘야 한다고 봐요. 한국정부가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유공자라는 명찰만 달아줬을 뿐이지, 실질적인 혜택은 찾아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섭섭하긴 해도, 조국을 생각하는 그의 마음은 여전히 뜨겁다. 그가 다시 전쟁에 대해 얘기한다.

“조국이 잘 되어야 타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존중받을 수 있는 겁니다. 조국의 안보는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도 해요. 그렇기 때문에 한반도에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됩니다. 다시는, 절대로.”
문용준 기자 myj@v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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