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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신협은행을 이끌어 온 노장 은퇴하다

권민수 기자 m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3-05-31 16:22

밴쿠버 신협은행 차동철 행장
밴쿠버신협은행 차동철 행장이 5월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후임은 석광익 전무다. 기자에게 차 행장의 은퇴는 일선에서 물러나는 이민 1세대라는 상징성이 보였다. 은퇴 웨이브의 첫 주자는 아니다. 1세 중 거의 마지막 은퇴자다.

그동안 차 행장은 신협은행을 무명의 탄생부터 캐나다 100대 신용조합 중 하나로 이끌 었다. 

1988년 한인에게 '한인신용협동조합'이란 이름으로 차 행장이 책상 하나 놓고 시작한 후, 한 세대가 지난 지금 신협은행은 5개 지점 50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다. 차 행장이 꼼꼼히 챙겨온 은행의 재무재표를 보면 80만달러에 못 미쳤던 자산은 지난해 2억달러를 넘었다.

차 행장과 지난 29일 인터뷰를 했다. 40년 넘게 캐나다에서 살아온 이민 1세대 중 한 명이라는 점에서 살아온 인생을, 지난 25년 동안 꾸준히 기능을 유지하고 성장 중인 한인 회사나 단체가 많지 않다는 점에서 경영 노하우를 물어봤다.
권민수 기자 ms@vanchosun.com


<▲ 밴쿠버 신협은행 차동철 행장 >


-신협은행은 어떻게 시작됐습니까?

"1970년대 토론토 신용조합을 만들어가지고 활성화시키고 81년 여름까지 했을 거에요. 그 소문이 밴쿠버까지 왔던 거에요. 제가 밴쿠버에 와서 서양 사람 크레딧 유니온(신용조합)에서 일했어요. 거기서 급하다고 해서 일하는데 제가 (한인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한인회의 김세환씨란 분도 있었고, 몇몇 분이 밴쿠버 한인 사회에서도 신용조합을 만들자, 그런 의견이 나왔어요. 또 천주교에서도 의견이 있었는데 그렇게 되면... 교회를 벗어나지 못해서. 신교나 다른 섹터에서는 참가를 안할꺼 아니에요? 좁은 한인사회에서... 발전에 제한이 있다고 제가 반대했고, 한인 사회를 대상으로 만들기로 했습니다.

그때 한인 단체를 찾아다니며 신용조합에 관해 설명했습니다.  그때 경험한 흔한 오해가 신협이 한국에서 흔히 보는 고리채 장사다. 그렇게 오해를 해요. 그게 신용조합이 아니다. 몇 곳을 다니며 설명했습니다."


-차행장님께서는 신용조합에 대해 어떻게 전문가가 되셨습니까?

"내가 신용조합에 학생시절(서울대)부터 관여했어요. 50년대. 그리고 중앙청에서 공무원을 하다가 캐나다에 유학와서 제가 신용조합에 관해 공부를 했어요. 캐나다국제협조처. 시다(CIDA)라고 그래요. 거기서 장학금을 받고 68년도에 나와서 2년간 노바스코샤 세인트 벡스 유니버시티에서 공부를 하고 한국에서 다시 공무원 생활을 했지요. "


-더 예전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이민 오게 된 동기는 어떻게 되십니까?

"캐나다에서 학교를 끝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갔어요. 서른 세살까지 중앙청에서 서기관으로 공무원하다가 72년에 다시 토론토로 이민을 왔습니다.

원래는 이민 올 생각을 추호도 안 했었는데. 한국 정세와 내 출신지가 맞물려서 그것 때문에, 자꾸 지역 때문에, 그것이 싫어서 왔어요. 캐나다에 있다 한국에 가니까 대기발령을 줘요. 다시 보직 발령을 내는데 보건사회부에서 이민과로 냈어요. 당시 중앙관서에서 민원처리하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정책·기획기관인데, 민원보러 거기 가는 것은 싫었어요.

이민과로 갔더니 중앙정보부에서 압력을 넣어서 이민가는사람들 소양교육 강의를 하래요. 저는 주로 이민 정착을 어떻게 하느냐를 이야기하는 업무를 봤어요. 그렇게 일을 하다보니 이민생활이 바닥인생부터 시작하게 된다는 것을 잘 알았죠. 내가 캐나다에서 보고 갔던 것도 있고...그래서 이민을 생각하니 내가 그 처지가 되려하니 굉장히 싫었는데, 한국에서 살기도 싫어졌습니다."

오래 전 얘기다. 차 행장은 자유당 말기 때 공무원이 돼 생활을 했다. 대학을 4.19 혁명이 일어났던 60년 3월에 졸업했다. 62년 5.19군사혁명을 맞이했다.

그는 당시에 나이든 사람들이 물러나야 젊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아 깨끗해질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얼마 후 대학을 갓 졸업한 이들도 금방 같이 썩는 모습을 보며 회의를 느꼈다고 인터뷰 후반부에 덧붙였다. 


-이민은 일에 대한 회의가 원인입니까?

"지방색을 가렸어요. 보건 사회부에 그 때, 서울대학 출신이 5명도 안됐어요. 문리대 출신이면 대개 영어를 합니다. 그래서 영어도 한다고 해서 유학도 보내주고 그랬는데, 와서 보니 경상도 TK패들이 판을 치는데 밀려나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어요.

사표를 냈더니, 당신은 유학도 다녀왔고 장래 간부로 양성하려고 하는데 어디로 도망하려고 그러냐는 겁니다. 사표 수리도 안 된데요. 그럼 왜 이 모양이냔 말이지. 컴플레인했는데 기다려 보래요. 30대 초반에 피가 펄펄 끓는데 말이에요. 밤낮 일 시키고, 지금은 영어 잘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 때는 별로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영어쓰는 곳에는 국제회의다 뭐다 다녔는데, 승진할 때는 빠트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싫어지는 거야."


-그래서 토론토로 72년에 이민을 결정하신 것이군요.

"석달마다 한 번씩 캐나다 이민관을 만났는데, 바람을 넣었어요. 일본 캐나다 공관에서 서울로 출장을 나오고는 했는데, 그 사람이 '캐나다 안가겠는가? 다 해주겠다'는 거에요."


-이민관 눈에 인재로 보였나 봅니다.

"처음에는 그 이민관이 한국에 캐나다 대사관을 개설하는데 자기 밑으로 와서 일하면 어떻겠느냐고 하더군요. 그 때 가난해도 대한민국 공무원으로 당신과 대등하게 만나 파트너로 일하는 것이 좋지. 월급 조금 더 받는다고 당신 밑으로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이민와서 이제 캐나다에 산지 42년이 됐습니다"


-토론토에 와서 바로 일자리가 있었습니까?

"노(No.) 내가 찾아가야 했지요. 토론토에서 교육부를 찾아가 내 교육을 공증까지 받았어요. 그리고 일자리 소개하는 곳을 찾아갔지요.

그 담당자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당시에는 노동계급, 즉 아워리 레이트(Hourly rate ·시간급)를 받는 사람들하고 프로페셔널한 직업을 알선하는 곳이 따로 있었어요. 제가 찾아간 곳은 프로페셔널 직업을 알아봐 주는 곳이었는데, 하는 말이 '캐나다 살아봐서 당신도 알지 않느냐. 여기도 다 커넥션, 끼리끼리 다하는 것이다'라는 거야. 금방 무슨 소리인지 알아차렸어요.  나보고 알아서 찾아가야지 무엇을 해줄 수 있겠느냐는 뜻이었던 거죠. 법이 있어서 직업소개 공무원이 있어서 하는 척하는 것 뿐이지 무엇해줄 수 없다는 뜻으로 딱 알아차렸어요.

그 사람 보기 전에 서울대 대학졸업장을 들고 가서 캐나다에서 어떻게 받아줄 것이냐 했더니 써줍디다. 캐나다 대졸자와 '동등하게 인정한다(Equivalent Recognition)'는데 소용이 없어요. 그것은 그것이고... 어딜 가든 그렇잖아요? 인간관계라는 것이죠. 자 예를 들어봐요. 똑같은 학교를 나온 지원자와 조카가 있으면 조카를 먼저 쓰지 남을 쓰겠어요? 인지상정이에요. 그것을 불편스럽게 생각하면 이 나라에서 살 수가 없어요."

이 대목은 요즘 이민자나 혹은 대학 졸업을 앞둔 세대가 알았으면 하는 부분이었다. 


-인지상정이 처음에는 장벽이 됐겠습니다.

"인지상정을 보고, 여기도, 인간 사회는 비슷하구나 느꼈습니다. 아... 그래서 내가 내 스스로 일자리를 만들어야 바람직하다. 지금도 주장하는 겁니다. 우리가 스스로 협력해서 회사를 만들고 일자리를 만들어야지. 캐나다보고 일자리를 안만든다고 불평해서는 안된다. 그 생각이 조금 다듬어진 부분도 있지만 생각의 핵심(core)은 여전해요. "


-지금 그 생각을 실현한 것이 신협은행이군요.

"네. 바로 그거에요. 일관해서 그것입니다. 남한테 기대지 말자, 스스로 서서 다른 문화권과 동등하고 당당하게 협력하는 대상이 되자"


-캐나다에 와서 처음 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맨 처음 잡(Job)을 잡은 것이 자동차 부품 도매하는 회사의 어카운팅 오피서, 회계과죠. 나는 거기서 많이 배웠어요. 2년 정도 했을 거에요. 캐나다 사회도 많이 배우고, 그 안에서 은행업무를 보면서 흐름을 배웠지요. 

그런데 '장사를 해야 돈을 벌지'하고 우리 집사람이 자꾸 조르길래, 찾아봤더니 연중무휴 24시간 여는 고속도로 옆에 주유소가 있어요. 그때는 지금처럼 셀프서비스가 없어서 점원들이 주유를 하고 돈을 받는데, 돈을 가지고 도망가는 것이 골치 아픈 일이었어요. 그런 주유소를 관리해달라고 회사에서 맡겨서 매니저로 일을 시작했어요.

그 때 한국 사람을 많이 고용했어요. 영어 짧지 와서 돈벌이를 해야해서 저를 막 찾아왔어요. 지금은 없어졌지만 TD-1양식이란게 있어요. 고용할 때 원천징수를 위해 쓰는 서류인데, 나중에 세어보니 300개나 되더라구요. 그 주유소에서 처음에는 1년 한다는 것이 4년 조금넘게 일했습니다. 당시 제가 월 5000달러씩 벌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거칠고, 사람도 거칠고, 도둑놈도 많고 해서 토론토 공항 옆에서 렌터카 사업도 벌렸는데 하나도 돈을 못벌었어요. 경험도 짧았고 자금이 좀 적었고, 파산은 안 했지만, 손해를 많이보고... 한쪽에서 돈벌고 한쪽으로는 쓰고 해서 나중에는 돈이 남지 않더라고요"


-80년대까지 그렇게 생활하셨습니까?

"70년대 후반까지 그렇게 일하고, 신용조합을 만들자는 의견이 있길래, 제 자리로 돌아가야겠구나해서 78년에 토론토 블루어(한인 중심지 중 한 곳)에 들어와 신용조합을 만들었어요 여직원 한 명과 돌아다니면서, 한인 가게들을 찾아다녔지요. 남의 돈을 쓰는 은행과 달리 신용조합은 회원이 되어 한 회원이 돈을 입금하면, 다른 회원이 빌려 쓰고 그렇게 상부상조 정신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조장했습니다."


-신용조합을 제자리로 느낀 배경이 있습니까? 

"그런 DNA가 있었나 봅니다. 학생 때는 이스라엘의 모샵(Moshav), 들어본 적 있어요? 그것을 연구했고. 돈을 벌기보다는...항상 상생(相生)을 생각했어요. 다른 사람들도 그랬겠지만, 상생은 주변 사람들에 음식을 나눠주던 어머니의 모습에서 시작되지 않았나 싶어요. 잘사는 집은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잔치 하면 같이 나눠 먹고 하는 모습. 어려운 일이 있으면 힘을 모아서 대응하는 우리 전통의 향약이나 두레도 있지 않아요?

그런 것들이 금융 섹터에서 제도적으로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 신용 조합이다. 난 그렇게 봐요. 그리고 좀 더 젊은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것이 그런 상생입니다." 

모샵 또는 모샤브는 1921년부터 시작된 집단 농업 형식의 농업공동체를 말한다. 이스라엘의 집단 농장 원형인 키부츠(kibbutz)는 사회주의적 배경으로 공동생산과 공동 분배 중심인데 반해 모샵은 공동생산은 하지만 소득의 개인 분배를 우선시 한다. -편집자주


-상생 유지가 쉬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가장 필요한 사항이 뭔고하니. 그 누구한테든지 공정(fair)해야 하고, 투명(transparent)하고 정직(honest)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래야 사회가 발전합니다. 이것을 망각하면 안되요. 한인 사회도 꼭  지켰으면하는데, 모르겠어요. 다음 세대에도 지켜질런지."

차 행장은 공정, 투명, 정직을 말하면서 앞에 '반드시 그래야 한다(should be)'고 강조했다. 서양의 개인주의에 쉽게 물들기 보다는 우리 전통 중에 서로 나누는 문화 같은 좋은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 밴쿠버 시내 킹스웨이에 신협은행 본점 간판을 달고 있다. 사진제공=신협은행>


-한인 사회에 신용조합은 무엇을 나누었습니까?

"예를 들어 C3라고 있지요. 연아 마틴 상원의원이 만든 2세 봉사단체. 중학교 교사였던 김연아씨가 찾아왔을 때 3년간 지원을 해주겠다고 약속했어요.

처음에는 몇 천 달러의 예산을 전액 지원, 두번 째해에는 반으로 줄이고 다른 곳에서 받아라, 세번째 해에는 마지막으로 지원하겠다고 그것으로 딱 끊었어요. 처음에는 설 수 있게 해주고 그 다음에서 알아서 서도록 지원을 줄인 겁니다. 그 후에는 C3가 잘 활동하고 있지요.

그 때 인연 때문인지 몰라도 연아가 제게 훈장을 준 것인지는 모르겠어요. (웃음)

우리는 언제든지 한인사회에 좋은 일에 지원할 준비가 돼 있어요. 단 지원 받을 자격을 갖추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지원을 받으면 구성원들이 협력해서 자립하라는 겁니다. 또  공정, 투명, 정직이 보이지 않으면 단 한푼도 주지 않습니다."

차 행장이 건넨 참고자료를 보면 신협은행은 창립 후 첫 3년을 제외하고 순수익 중 많게는 17%에서 적게는 5%를 지역사회에 환원하고 있다. 지난해 지역사회 환원한 금액은 12만9484달러였다. 차 행장은 다이아몬드 쥬빌리 메달을 받았다.


-다시 살아온 얘기로 돌아갔으면 합니다. 밴쿠버는 언제 오셨습니까?

"저희는 함께 이민 온 가족이 없어서 굉장히 외로웠습니다. 친척들에게 한국에서 살 수 있으면 여기와서 밑바닥 생활부터 하지말라고... 오지 못하게 하고 나니. 한국에 전화 한번 하려면 3분에 9달러였어요. 지금처럼 TV나 인터넷이 발달된 시절도 아니고...집 사람이 하는 말이 한국으로 조금이라도 가까이 갔으면 한다.

지나다가 밴쿠버에 들렸는데 이곳은 따뜻하고 살기가 좋아요. 그래서 여기 와서 센트럴원(신용조합 중앙회)에 가면 신부름이라도 하면서 먹고 살겠구나 싶어서 계획을 세우고 1년에 걸쳐서 조금씩 조금씩 이사를 추진했습니다. 그 동안 토론토 신용조합을 인수 인계하고 밴쿠버로 왔지요. 안 받아줘도 노동일을 해서라도 살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모험가 정신도 있으셨나 봅니다.

"모험가 정신이 없었으면 밴쿠버 못왔지요. 신용조합을 88년에 처음 창립하고 3년간 월급이 없었습니다. 있을 수가 없었어요. 우리 집 사람이 3년간 생선공장 다니고, 나도 이것 저것 해서 용돈 벌어서 버텼어요. 많은 사람들이 이 일은 잘 몰라요. 그러나 자료를 보면 첫 3년간은 월급 가져갈 돈도 신용조합에 없었어요. 없어요 수입이. 도둑질 할 수도 없잖습니까?"

신용조합의 첫 3년간 재무재표를 보면 1988년 영업순수익이 0달러, -2만4530달러, -1만3588달러로 이어진다. 대비되는 수치를 보자. 신협은행으로 이름을 바꾼 현재 영업 순수익이 가장 높았던 해는 229만8427달러를 번 2007년이다. 

밴쿠버에서 신협은행 창립은 차 행장의 공이다. 신협은행이 설립되려면 25명으로부터 4000달러를 저축하겠다는 약정서를 받아 사업계획서와 함께 제출해야 하는데, 이 서명을 받기도 힘들었다고. 친한 친구도 당장 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닌 '약정'에 서명 안하는 것을 보고 서운한 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냥 친구일 뿐 잊고 산다고 했다. 


-밴쿠버에서 처음 시작은 BC한인실업인협회에서 책상 하나를 놓고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토론토와 마찬가지로 여자 직원 1명이 사무실을 지키고, 저는 한인 업체들을 다니면서 조합원을 모집했습니다. 미세스리 라고 직원 1호인 분이 주판으로 계산하고, 사업기획서를 타이핑해서 풀로 붙여서 만든 것이 시작입니다."


-지금은 5개 지점 직원 50명입니다. 운영하면서 뛰어오른 도약의 시점이 있었습니까?

"특별히 뛰어오른 시점은 없었습니다. 은행은 푹 올랐다가 내려가서는 안되요. 안정적(steady)  단계적(gradual) 성장이 중요합니다. 매일 조금씩 꾸준히 나아가야 합니다. 지금도 제가 모니터링 합니다. 내일모레 끝내면서도 어떻게 돌아가나.

우리는 한 발자국씩 나아왔습니다. 물론 발자국의 크기가 작을 때도 있고 클 때도 있습니다. 그래프를 그려보면 후퇴하지 않고 성장해왔어요. 저는 후퇴를 하지 말자를 항상 주장합니다. 만약 후퇴를 하면, 후퇴의 원인을 분석해서 그것을 고쳤어요.

조직이 성장(evolve)하려면 항상 분석을 해봐야 해요. 젊은 사람도 분석에는 나를 따라오기 어려울 거라 자신합니다.

분석은 이런 기준으로 합니다. 생산성(productivity)이 제대로 돼 있는가? 또한 가치. 조합원이 우리 은행을 차 타고 찾아올만한 가치가 유지되고 있는가, 그 다음에 시대를 따라잡아야 한다. 시대는 저 앞에 가고 있는데 그것을 최소한 맞추거나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시대를 따라잡기 위해 BC주에서 거의 초기에 30분내에 체크북을 만들어주는 서비스를 도입했습니다. 이전에는 일주일, 열흘 걸리는 일이었는데 비용을 많이 들여 도입해 조합원의 편의를 제공했습니다. 지금은 젊은 사람들을 계속 이용하도록 스마트폰으로 체크 입금이 가능하게 만들 예정입니다. 적어도 시대를 따라가야지 뒤처져서는 안됩니다. "


-신협은행이 보유한 성장의 노하우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왔을 때, 가급적이면 시중 은행에서 못느끼는 편의를 주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5000달러나 1만달러 대출이 급히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시중 은행에서는 잘 안 줍니다. 우리에게 오면 처음에는 체크하는 것이 많습니다만, 두 번째는 전화로 다 끝낼 수 있게 처리해 줍니다.

자동차론도 아침에 차를 보고 결정해서 오면 오후에 결정해서 다음 날 픽업할 수 있게 해주라고 합니다. 조금 우리가 급히 서둘면 되는 겁니다. 또 만약 자격이되면 시원시원하게 바로 깨끗하게 예스라고 답하고, 안되면 분명하게 얘기해주는 서비스 퀄리티를 유지하라고 항상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인에게는 마지막 기댈 수 있는 곳(last resort)이 되자는 운영방침이 주효했지요. 가게가 어려울 때 도움 받은 업체들이 적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성장 노하우는 단 한 가지는 아닙니다. "

또 다른 비결이 있다면 '좋은 대출'이다. 체납 수준이 시중은행의 반도 안되는 수준이다. 일반적으로 대부분 한인은 신용이 좋은 편이다. 물론 은행의 관리도 체납을 줄이는 요소다. 문제가 있어보이면 엄격하게 관리한다고.


-이제 은퇴하십니다. 본인을 이끌어온 경구가 있습니까?

"내 작은 노력으로 많은 사람이 도움을 받는다면 참 좋겠다. 그것이 제 인생관이었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겠다거나 치부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습니다. 적절한 대우를 받으면 그것으로 만족했습니다. 제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비쳤다면 그것으로 좋습니다."

25년간 신협은행 창업의 모험부터 견고한 수성을 이끌어온 차 행장의 인생관은 소박하나 뿌리가 깊다. 홍익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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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나비 노스로드(North Rd.) 한인 상가에 빠리아저씨가 산다. 올해로 5년째 이곳에서 빵집을 운영하고 있는 임종주씨(62)가 바로 빠리아저씨다.빠리아저씨 빵집에서는 매일 새벽 4시가 되면 빵...
문용준 기자의 차 한 잔 합시다-3 “운동이 보약, 피클볼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운동은 이름난 보약이다. 이미 그 약효를 경험한 사람들의 증언만 봐도 그렇다. 운동으로 땀을 흠뻑 흘리고 나면 묵은 때를 벗겨낸 듯한 개운함을 느낄 수 있다고, 트랙 위의 사람들은 막힘...
문용준 기자의 차 한 잔 합시다-2 바이올린 연주자 겸 동요 작곡가 박혜정씨
순탄대로만 걸어왔다는 고백은 흔치 않다. 세간의 부러움을 사는 누군가의 삶 속에서도 크고 작은 걸림돌을 찾아보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성공했다는 혹은 그런대로 잘...
20대 청년사업가 김진기 정진트레이드 대표
학창시절 겁 없이 뛰어든 인형 판매. 호기심에 처음 시작한 일이 10여년이 지나면서 어엿한 직업이 됐다. 정진트레이드(JungJin Trade) 김진기(29) 대표. 김 대표는 올해로 벌써 13년째...
요들송의 대가, 김홍철
써리에 위치한 성 김대건 천주교회 부설 대건문화센터는 “문화센터”라고 불리기에 전혀 민망하지 않은 장소다. 그 이유는 이 곳이 진행 중인 혹은 진행할 예정인 프로그램만 슬쩍 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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