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하는 일 많지만 내 직업은 단 하나 '배우'

문용준 기자 myj@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3-02-22 09:47

밴쿠버에서 연기자를 꿈꾸다, 임고운

‘임고운’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소울프러덕션이 지난 해 11월 무대에 올린 연극 ‘라이어’를 통해서다. 이 연극에서 그녀는 남몰래 두집 살림을 하느라 이런저런 거짓말을 늘어 놓아야 하는 한 남자의 안주인으로 등장했다. 정확히 얘기하면 안주인들 중 한 명이었다.

3개월 정도 지난 후 임고운씨와 무대 밖에서 마주쳤다. 이번에는 은행이었다. 임고운씨는 그곳에서 텔러로 일하고 있었다. 배우와 은행원, 언뜻 어울리지 않는 두 직업을 동시에 소화하고 있다는 사실이 살짝 신기했고, 그래서 인터뷰가 시작됐다. 굳이 강남스타일식으로 얘기하자면, 커피 한잔의 여유를 품격 있게 즐길 줄 아는 여자와의 반전 있는 만남을 기대하면서.




 




하는 일 많지만 내 직업은 단 하나 ‘연기자’
‘반전 있는 여자’는 바빴다. 전국에서 가장 붐빈다는 집 근처 커피전문점에서 새벽에서 정오까지의 시간을 헌납하고, 2시부터는 은행으로 출근했다. 주말이라고 해서 여유로운 시간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저런 아르바이트 때문이다. 1989년생이라는데, 해왔던 일들만 쭉 열거하면 이력서 나이를 스무살 정도는 더 올려도 괜찮을 것 같다. 어찌됐건 그 많은 직업들 중 ‘대표 선수’를 꼽아보라는 질문에 임고운씨는 고민하는 시늉 하나 없이 “나는 배우에요”라고 답한다.

“거창하게 들릴 지 모르겠지만, 제가 하는 모든 일들이 연기를 위해서에요. 배우라는 직업만으로 생계를 해결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그리 쉽지가 않거든요. 영화든 아니면 연극이든 배우가 설 수 있는 공간이 많이 줄었어요.”

무대에 서는 것이 취미 정도일 줄 알았는데, 그런 생각 자체가 그녀에게는 결례였다. 얼마 전 그녀는 은행 일도 그만뒀다. 1년 계약으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더 할 수도 있었다. 그래도 미련 같은 것은 크게 없었다. 연기에 몰입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불링에 시달렸던 10대 시절, 상처는 지웠지만…
연기와의 연애는 춤을 좋아했던, 나름 ‘끼 있는 시절’을 보냈던 고등학생 때 시작된 듯 싶다. 그런데 그 시간들이 온통 행복했던 것은 아니다. 지금은 그 상처들을 억지로라도 지워 버렸지만, 10대의 그녀는 이른바 ‘왕따’ 문제로  무척 힘들어 했다. 누군가 집단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냥 잠자코 넘어가질 못했는데, 그게 왕따가 된 이유의 전부였다.

“무서웠죠. 상급생들의 협박 때문에 전학까지 가야 했으니까요.”

어느 날 갑자기 학교 자체가 싫어졌다. 단순히 불링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둘러댈 그럴듯한 구실이 없었다. 그냥 싫었다.

“학교를 아예 안 갔죠. 그래서 자퇴 처리가 됐다고 생각했어요. 12학년 중반까지는 성적이 상위권을 유지했는데, 그 때문인지 우여곡절 끝에 졸업은 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마음은 쉽게 잡히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간절함이 항상 따라 다녔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었다. 아르바이트를 했고 비행기표 하나 살 정도의 돈을 마련하게 됐다. 

“무작정 한국으로 갔어요. 그때 수중에는 50달러가 전부였는데, 주저하지 않았어요.”

영어강사로 일하면서 그녀는 틈만 나면 대학로 연극무대를 찾았다. 그곳에 올려지는 작품을 하나하나 음미하면서 배우의 길을 본격적으로 동경하기 시작했다. 캐나다로 돌아온 이후 그녀는 밴쿠버필름스쿨에 입학해서, 1년 6개월 동안 연기를 공부했다.


꿈만 꾼다 해도 당당해질 수 있는 이유
그녀에게 배우로서의 성과에 대해 물었다. 대답은 거창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학생들이 연출한 단편영화에 출연하거나 연극무대에 오른 것, 아직까지는 이게 거의 전부다. 그런데도 어떤 조급함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 자신의 가치를 지키며 오래오래 연기하고 싶다는 마음 뿐이에요. 그러다 보면 저한테도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해요.”

몇몇 어른들은 꿈보다는 현실에 더 충실해야 한다고 조언하지만, 그녀의 의지는 견고하기만 하다. 그 의지가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새벽부터 커피를 만들고, 주말에도 이런저런 아르바이트에 매달리는 임고운씨에게는 꿈을 꿀 자격이 충분히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문용준 기자 myj@vanchosun.com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문용준 기자의 차 한 잔 합시다-11 밴쿠버에서 사제 서품 받은 구장한 신부
한때 그는 세상의 기준에 맞는 성공을 원했다. 빠른 속도로 저축 잔고를 늘리고 싶었고, 은퇴 후에는 세계 곳곳을 한적하게 여행하는 삶을 꿈꿨다. 그는 이 목표대로 충실히 살아왔다....
"지금도 몸이 떨려..." 연평도 포격의 영웅, 해병대 정상헌씨
2010년 11월 23일. 조용하고 한적하던 대한민국 서해의 작은 섬 연평도에 포탄이 떨어졌다. 갑작스런 북한의 포격으로 군인은 물론이고 민간인 사상자까지 발생한 처참한 사건이었다....
문용준 기자의 차 한 잔 합시다 10, 6·25참전유공자회, 박영길옹
전쟁의 참혹함을 기억하는 건 그의 몸이었다. 60년도 더 지난 일인데 그는 그 때의 혈투를 떠올리면 여전히 구역질이 난다고 했다. 세월도 그의 상처를 온전히 보듬지 못한 것이다. 전쟁...
문용준 기자의 차 한 잔 합시다-9 김지한·수 김 부부
이민의 목적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람마다 다양할 것이다. 하지만 그 내용은 대개 “다름”과 “싶음”으로 간단하게 정리되곤 한다. “각박함을 벗어나 뭔가 다른 삶을 살고...
"돈은 잃어도 친구는 못 잃어" 고교 동창과 17년째 동업, 고승범씨
랭리의 유명 아이스크림 전문업체 배스킨라빈스(Baskin Robbins). 프레이저 하이웨이(Fraser Hwy.)를 지나가면 특유의 화사한 분홍색 간판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이 가게가 관심을 끄는 더...
모두미술인협회 고요한·김희정 화가 부부
문용준 기자의 차 한 잔 합시다-8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내 마음 속 세계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화폭에 옮기고 싶었다. 그래서 이민을 결심했다. 낯선 땅에서라면 작품 활동에 더욱...
모텔운영 9년차 베테랑의 여유가 묻어나는 이중헌씨
1999년 밴쿠버로 이민 온 이중헌(58)씨는 특이한 이력을 가진 사업가다. 20년 가까이 컴퓨터 엔지니어로 일했던 이씨는 바쁜 일상에 가족과 사이가 멀어지자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문용준 기자의 차 한 잔 합시다-7
몇몇 이민자들에게 있어 캐나다는 때론 외사랑의 대상이다. 자신의 애타는 마음을 제대로 보여준 적이 없어서다. 이처럼 침묵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민자가 캐나다와 연애할 가능성은...
"서커스할 때 살아있음 느껴요"
짙은 어둠 속에서 작지만 단단한 체격의 청년이 저글링 연습에 한창이다.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간간이 보이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유독 눈에 띈다. 태양의 서커스...
문용준 기자의 차 한 잔 합시다-6 늘산 박병준
2015년은 그에게 밴쿠버에 정착한 지 정확히 만 40년이 되는 해다. 그 세월과 함께 어느새 팔순을 앞두게 된 그는 예전과 지금의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고 무덤덤하게 고백한다. 우선...
에버그린컵 18세 이하 男단식 우승
미래의 테니스 황제를 꿈꾸는 한인 유망주가 화제가 되고 있다. 주인공은 버나비 알파고등학교(Alpha Secondary School) 9학년에 재학 중인 앤드류 오(한국명 오승환·15)군. 오군은 지난 15일부터...
“내게 주어진 시간은 모두 내 것이다” 문용준 기자의 차 한 잔 합시다-5
몇몇 처세술 책들의 주장처럼 성공을 위한 공식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람마다 성공에 대한 정의가 제각각인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 친구 딸이...
웨스트젯 인턴 사원 이동근씨
밴쿠버 국제공항에서 항공권을 발권하는 고객들을 도와주는 말끔한 차림의 한국인 남성이 눈길을 끈다. 주인공은 웨스트젯(WestJet) 인턴 사원 이동근(26)씨. 이씨의 부드러운 말투와 친절한...
문용준 기자의 차 한 잔 합시다-4 한국전통예술원 한창현 원장
고된 길인 줄 뻔히 알면서도 행군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연극 무대만을 동경하는 무명의 배우, 팔리지 않을 시집에 애착을 보이는 시인, 쾨쾨한 냄새가 배어있는 작업실과 연애...
친절한 미소가 아름다운 바틀디포 김병수씨
버나비 메트로타운 인근 바틀디포(Bottle Depot) 가게. 가게 안을 들어서자 특유의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더러운 빈병들 사이에서 시종일관 웃으며 구슬땀을 흘리는 이가 눈에 띤다....
외국인도 인정한 빵맛, 빠리아저씨 임종주씨
버나비 노스로드(North Rd.) 한인 상가에 빠리아저씨가 산다. 올해로 5년째 이곳에서 빵집을 운영하고 있는 임종주씨(62)가 바로 빠리아저씨다.빠리아저씨 빵집에서는 매일 새벽 4시가 되면 빵...
문용준 기자의 차 한 잔 합시다-3 “운동이 보약, 피클볼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운동은 이름난 보약이다. 이미 그 약효를 경험한 사람들의 증언만 봐도 그렇다. 운동으로 땀을 흠뻑 흘리고 나면 묵은 때를 벗겨낸 듯한 개운함을 느낄 수 있다고, 트랙 위의 사람들은 막힘...
문용준 기자의 차 한 잔 합시다-2 바이올린 연주자 겸 동요 작곡가 박혜정씨
순탄대로만 걸어왔다는 고백은 흔치 않다. 세간의 부러움을 사는 누군가의 삶 속에서도 크고 작은 걸림돌을 찾아보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성공했다는 혹은 그런대로 잘...
20대 청년사업가 김진기 정진트레이드 대표
학창시절 겁 없이 뛰어든 인형 판매. 호기심에 처음 시작한 일이 10여년이 지나면서 어엿한 직업이 됐다. 정진트레이드(JungJin Trade) 김진기(29) 대표. 김 대표는 올해로 벌써 13년째...
요들송의 대가, 김홍철
써리에 위치한 성 김대건 천주교회 부설 대건문화센터는 “문화센터”라고 불리기에 전혀 민망하지 않은 장소다. 그 이유는 이 곳이 진행 중인 혹은 진행할 예정인 프로그램만 슬쩍 봐도...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