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75년 함께 살아온 노부부가 전해주는 삶의 교훈”

문용준 기자 myj@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1-09-16 14:50

101세 생일 맞은 이자형•이신일 부부

은퇴한 노인들에 대해 몇몇 사람들은 섣부른 판단을 내린다. 노인들은 새로운 만남에 대한 설레임도 미래에 대한 꿈도 없다. 하루하루 단조롭게 시간을 보내는 게 일이며, 텔레비전 앞에서도 딴 생각을 하기 일쑤다. 깊어지는 주름만큼 투정이 늘고, 어떤 이들은 보호를 받야야할 정도로 허약하다. 황혼의 눈부심보다는 왠지 우울한 기운이 먼저 느껴진다.


만약 이자형•이신일 부부를 만날 수 있다면 위에 열거한 일부 사회적 시각이 얼마나 편협하고, 무감각하고, 무례한 지 쉽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75년을 부부로 살아온 이들에게 하루하루는 견뎌내야 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의 큰 축복이다. 책에서 살짝 베낀 얄팍한 지식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지혜도 있다. 세월이 노부부에게 준 선물이다. 그 세월은 이 부부의 유머감각은 건드리지 않았다. 여전히 해맑게 웃고, 내년에는 정원에 새로운 꽃도 심을 생각이다. 옛날 얘기보다는 바로 지금,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시간이 이들에겐 더 중요하다.

 


이자형 할아버지는 오는 24일 101세 생일을 맞는다. 물론 그 옆에는 여덟 살 어린 아내가 함께 할 것이다. 이들 부부에게 살아온 날들에 대해 묻자 할아버지는 손사래부터 친다.


“옛날 얘기가 뭐가 궁금하다고 그래. 지금 이 순간이 제일 중요하지요. 공상 같은 것도 안 하고, 안 좋은 일들은 그날그날 잊어버리고 하니까 잠도 잘 자요. 그러니까 건강하게 하루하루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무리 궁금해 해도 할아버지는 그저 빙긋이 웃을뿐이다. 보다못한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이들 부부의 세월 속에는 대한민국의 아픈 현대사도 담겨 있었다.


“평안북도 신의주가 고향이에요. 남편은 젊은 시절부터 중국 상해와 천진을 돌아다녔어요. 화장품 장사 같은 것을 했지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지만 역사의 흐름은 피해갈 수 없었다. 북한 땅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돌자, 48년 이들 부부는 38선을 넘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1•4 후퇴 때는 제주도까지 내려갔다. 전쟁이 주는 고통과 상처는 표현하기 어렵다.


“사회가 잠잠해져서 다시 부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곳에서는 금은방을 운영했더랬죠.”


이들 부부의 이주 역사는 여기에서 끝이 아니다. 이자형 할아버지는 환갑이 넘은 나이에 브라질 이민을 결정한다.


“브라질에서도 보석가게를 하며 7년 정도 살았지요. 그런데 캐나다에 먼저 이민 가 있던 아들이 저희를 초청했어요.”


1980년 써리에 정착하고 그곳에서 살았다. 물 좋고 공기 좋고 무엇보다 친절한 사람들과 늘 푸른 자연이 마음에 들었다. 사회에 불평불만을 늘어놓지 않는 이들에게 캐나다는 천국이었다고 한다. 어느 사회나 문제점이나 살아가는 걱정이 있겠지만, 보는 시각에 따라 삶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캐나다에서도 노부부는 바지런했다. 할아버지는 100살이 넘는 나이에도 수영을 즐기고 저녁식사 후에는 아내와 함께 조용히 동네를 산책한다. 넓직한 정원을 관리하는 것도 할아버지의 몫이었다. 힘든 일을 할 때도 다른 사람의 손은 거의 빌리지 않았다.


“한 달 전에 아메니다 시니어 하우스에 입주하게 됐어요. 나이가 들면 낙상사고 같은 걸 당하기 쉬운데, 그때 누가 옆에서 도와줘야 하잖아요.”


시니어하우스에서도 이들 부부는 만족의 삶을 살고 있다. 이곳 직원들의 친절함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태도 때문일 것이다.


“사랑이 넘치는 곳입니다. 이곳 직원 중에 이윤경씨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이가 딸보다 더 친절하게 대해 줍니다.”


아메니다 한인 담당 이윤경씨는 자신이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받는다고 말한다.


“이분들처럼 늙을 수 있으면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할아버지는100세가 넘은 연세에도 수영과 산책을 즐기시고, 할머니는 농담도 잘 하세요. 시대감각도 요즘 사람 못지 않습니다. 근검, 절약은 이분들한테는 몸에 밴 습관이고, 음식을 남기는 것도 본 적이 없어요. 항상 드실 수 있는 만큼만 챙기시니까요. 이분들한테서는 욕심 같은 건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부부처럼 늙고 싶다는 바람은 단지 이윤경씨만의 희망사항은 아닐 것이다. 지나간 시간보다는 지금 이 순간을 더 아끼며 살아가는 것. 75년을 함께 살아 온 이자형•이신일 부부가 전해주는 교훈이다.  


문용준 기자 myj@vanchosun.com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8집 내고 북미 무대 진출하는 재즈가수 나윤선
말 그대로 아무것도 모른 채 유학을 떠났고 십 년 만에 성공적인 재즈 뮤지션이 됐다. 주 무대인 프랑스에선 문화예술 공연훈장까지 받았다.세계적인 뮤지션은 세계를 다니며 노래를...
한·카 수교 50주년 전통축제 한마당 기획자, 한창현
모국이 아닌 타지에서 만나는 한국산들은 때론 충분히 낯설다. 코리안이라는 이름을 전면에 걸고 있지만 어떨 때는 국적조차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문화의 영역에서...
“신협의 평생 성장판은 바로 한인사회”
신협은행(Sharons Credit Union 이하 신협)의 새 수장으로 석광익 전무가 선임됐다. 25년 신협 역사 중 두번째 CEO다. 석 전무는 전임 차동철 행장과 신협의 유아기를 함께 지켜본 장본이기도 하다....
“평화를 위한 24시간 행군에 한인사회를 초대합니다”
가이 블랙(Black)씨는 우선 ‘헌신’이란 단어로 소개될 수 있다. 적어도 한국전 참전용사들에게만큼은, 조금은 낯간지러운 이 단어 선택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2003년부터 지금까지,...
밴쿠버 신협은행 차동철 행장
밴쿠버신협은행 차동철 행장이 5월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후임은 석광익 전무다. 기자에게 차 행장의 은퇴는 일선에서 물러나는 이민 1세대라는 상징성이 보였다. 은퇴 웨이브의 첫...
“우리는 모자이크 사회 캐나다의 소중한 퍼즐 조각”
대부분의 이민자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 캐나다를 선택한다. 하지만 원래 계획했던 열매를 얻기까지에는 대개 적지 않은 수업료가 필요하다. 특히 낯선 문화와 언어를 흡수한다는...
‘빛의 친구들’을 만나다
손톱만한 뷰파인더 건너편에 인격적인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진작가에겐 충분히 설레는 일이다. 설령 피사체가 무표정한 사물일지라도, 풀 한포기 혹은 돌멩이 하나에도 적지 않은...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조셉이에요. 당신 이름은 뭔가요?”
만약  지금도 살아 있다면, 우리와 같이 지구의 공기를 나누고 그 위를 쿵쾅거리며 걷고 있다면, 낯선 누군가에게 다가가 거리낌없이 손을 내밀 때 마다, 그는 사소한 행복을 챙기며...
석세스 한인 담당 존 송·베로니카 박
새 이민자들이 마주한 현실의 벽은 생각보다 두텁다. 언어 때문에 주눅이 들고, 또 그 탓에 꿈꿔왔던 직장에는 이력서조차 내밀지 못할 때는 나이 들어 사서 하는 고생의 이유를 당최...
석세스 재단 매기 입 이사장 인터뷰
“중국계 이민자 사회도 여러 갈등이 있었죠. 사람 사이에서 문제가 발생했고 해결책도 그 사람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찾았습니다.”1970년대 중국계 신규 이민자들의 자구책(自救策)으로...
밴쿠버올림픽 이어 피겨선수권대회 시상대 디자인한 밴쿠버 한인 제임스 리
그의 손가락은 가늘고 길었다. 손톱은 짧고 가지런히 정돈됐다. 나무를 다루느라 손이 거칠 것이라는 예상을 처음부터 비켜갔다.지난주 온타리오주에서 열린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임연익 신임 밴쿠버노인회장
제38대 밴쿠버 한인노인회 임연익 회장이 9일 취임했다. 1년의 임기를 시작한 간호장교 출신의 임 신임회장은 “강에 배를 띄우는 심정”이라며 주변의 후원과 협력을 부탁했다.-취임을...
아이샤 꾸리’의 작가 장미란
1995년 12월 24일, 서울 무교동 코오롱 빌딩에 자리 잡은 캐나다 대사관 안. 예술가 자격으로 캐나다 이민을 신청한 한 화가와 그의 아내, 그리고 1년 차이로 태어난 이들의 어린 두 딸이...
밴쿠버에서 연기자를 꿈꾸다, 임고운
‘임고운’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소울프러덕션이 지난 해 11월 무대에 올린 연극 ‘라이어’를 통해서다. 이 연극에서 그녀는 남몰래 두집 살림을 하느라 이런저런 거짓말을 늘어...
“낯선 땅 밴쿠버에 식당을 열기까지… 내게 일어난 일들”
통장의 잔고 수위가 어느 높이쯤 돼야 평균적인 인간들은 평범하게 행복하다 말할 수 있게 될까? 최근 리치몬드에 ‘한옥’이란 한식당을 연 이명순씨가 이 질문에 답한다.반듯한 사장님...
“작품 전시회 6월 26일까지 렌프류 커뮤니티 센터”
유형길 화백의 작품 22점이 렌프류(Renfrew) 파크 커뮤니티 센터에서 전시되고 있다. 그림만을 온전히 감상하기에 커뮤니티 센터가 썩 훌륭한 공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유...
지난 22일 캐나다 다문화장관 추천으로 영국여왕 재위 60년 기념메달(다이아몬드 주빌리 메달)을 수상한 김재붕씨는 27년 생이다. 6.25 때 영연방군으로 출전한 캐나다군과 생사고락을...
“이방인에서 주인으로, 내가 사는 법”
얼마 전 만난 한 노신사는 가끔씩 가슴이 먹먹하다고 한다. 밴쿠버에 정착한 지 수십년이 지났건만, 어쩌다 한번씩 이방인으로서의 소외감 같은 것이 느껴져서다. 이곳에서 태어나 그리고...
“글로벌 리더 되기, 다문화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된다”
‘어떤 자녀로 키울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은 사람의 생김새 만큼이나 다양하다. 숱한 선택들 틈에서 속시원히 정답을 골라내면 좋겠건만, 실은 그게 그리 쉽지 않다. 우리가...
“공연 갈증, 10월 25일부터 3일간 ‘오동리 소방서’에서 풀자”
인터뷰 장소로 사내 다섯이 우르르 들이닥쳤다. 이들은 한국에서 건너온 지 길어야 2주 정도밖에 되지 않는 신선한, 정확히 말하면 생소한 얼굴들이었다.명함을 주고 받은 후에도 ‘도대체...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