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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한국 사람들의 정과 초가집이 그리워요”

한혜성 기자 helen@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1-08-26 14:29

[이사람] 친한파 미국인 시드니 애킨스(Sidney Atkins)
지난해 취재차 방문했던  밴쿠버 한인 문화 행사에서 큰 카메라를 들고 챙이 달린 갈색 모자를 쓴 한 백인이 능숙한 한국말로 말을 걸어왔다. 미국 워싱턴주 벨링햄에 거주하는 시드니 애킨스(Atkins)씨라고 했다. 시애틀이나 밴쿠버의 한인 문화 행사라면 거의 빠지지않고 구경을 온다고 웃어보였다. 기자의 한국 이름을 대니 낡은 포켓수첩에 한국어와 한문을 적으며 “이거 맞나요?”라고 되물었다. 왠만한 한국인보다 훨씬 단정한 글씨체였다.  

한류열풍으로 친한파 외국인이 크게 늘어난 요즘이지만, 이처럼 60대에 접어든 백인이 한국말을 잘하는건 뭔가 사연이 있을 것 같았다. 들어보니 70~80년대에 한국을 여러번 관광했다고 했다. 한국의 전통문화와 한국어를 특히 좋아한다는 시드니씨. 그가 목격했던 70∙80년대 한국은 어땠을까? 이야기를 들어봤다.


<▲ 1982년 남대문 시장에서 옷을 수선하고 있는 상인. 사진제공=시드니 애킨스(Sidney Atkins)>


아시아 관련 일을 하고 있는건가?
현재 프리랜서로 번역일을 하고 있다. 일본에 있는 대학교나 연구소, 또는 개인을 위해 일본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이 주업무다. 번역 내용은 대부분 아시아의 지리학, 인문학, 도시학과 관계되어 있다. 예를 들면 서울 등 아시아 주요 도시의 노숙자 실태를 연구한 논문같은 것을 자주 번역한다. 대부분  한국, 홍콩, 대만, 인도네시아, 몽골 등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해서 젊은 시절에 했던 여행이 많이 도움이 되고 있다.

또 다른 일은 사진 촬영과 그래픽 디자인이다. 지역사회나 벨링햄의 엔지오(NGO) 그룹을 위해 사진을 찍거나 다큐멘터리 등을 만든다. 지역 음악가를 위한 앨범 디자인, 포스터 제작도 한다.

한국말을 꽤 잘한다. 어디서 배웠나.
일본어나 영어만큼은 아니다. 1960년대 중반에 뉴욕 콜롬비아 대학교를 다녔다. 졸업은 못했지만, 아시아연구학과(Asian Studies)를 2년 다니는 동안 일본어와 한국어를 배웠다. 당시, 학교에서 일본어와 중국어 배우기 열풍은 대단했지만 한국어 수업에는 수강생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도 한국어에 끌렸다. 개리 레드야드(Ledyard) 교수님으로부터 한국어를 배운 것이 참 행운이었다. 이 분은 지금도 한국학을 연구하는 외국인 교수로써 세계적 명성이 높은 분이다.

언어를 배우는 가장 좋아하는 방법은 그 언어를 하는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웃음) 콜롬비아 대학교에서 한국어 회화수업을 가르치던 분이 한국여성이었는데, 아주 한국적으로 단아하고 아름다운 분이어서 열심히 배웠던 기억이 난다.   

학교 졸업을 못했던 특별한 이유가 있나?
졸업은 다른 학교에서 했다. 콜롬비아 대학교를 도중에 나온건 군대 때문이었다. 대학교에 다닐 당시, 난 미국군 소속이었다. 3학년으로 올라갈 때쯤 군대에서 캘리포니아 몬테레이에 있는 군소속 언어 학교에 날 보내 한국어를 더 공부하게 했다. 기관총, 지뢰, 잠수함, 전파탐지기 같은 군대 관련 용어를 특히 많이 배웠다. 재밌는건 군대는 나에게 한국어 교육을 실컷 시켜놓고 한국에 보내진 않았다는 점이다. (웃음)

군대를 제대하고 아이러니하게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히피적 방랑가가 됐다. 북미 곳곳을  돌아다니며 음악도 하고, 많은 사람들도 만나며 마음껏 살았다. 그러다가 아이다호주에 정착하고 아이다호 주립 대학교에 진학해 기존 전공을 바꿔 지리학으로 학사 졸업을 했다. 1979년, 그러니까 32세의 나이였다. 석사학위는 장학금을 받고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지리학과 아시아연구학을 복수 전공했다. 그로부터 2년 후, 일본 주정부가 교토 대학교에서 지리학과 관련해 개별 연구할 수 있는 기회와 장학금을 줬다. 교토에서 3년간 연구한 뒤엔 일본의 한 여자 대학교의 교수로 채용됐다. 그런 연유로 일본에서 14년을 더 살았다.

한국은 언제 처음 방문했나.
제일 처음 방문한건 1978년이다. 한국어를 배우며 그렇게나 가고싶었던 한국이었기 때문에 정말 좋았었다. 그 이후엔 총 몇 번을 방문했는지는 세다가 잊어버렸다. (웃음) 확실히 12번은 넘고 20번은 못된다. 2~3달을 머문 적도 있고, 짧게 3~4일만 있던 적도 있다. 일본에서 공부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던 80년대에 특히 한국에 자주 들렸다. 태국이나 인도네시아를 가는 길에도 항상 한국을 경유했다.
마지막으로 한국을 방문한 건 1988년 서울 올림픽 때였다. 그 이후엔 한국을 다녀온 친구들의 이야기나 영화, 책 등을 보며 한국의 변화를 관심을 갖고 지켜봐왔다. 요즘은 당시와 정말 많이 달라진 것 같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내가 봤던 서울이 맞는지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웃음)


<▲ 시드니씨가 처음 한국을 방문한 1978년 경복궁. 학생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 사진제공=시드니 애킨스(Sidney Atkins)>


지금이랑 비교하면 한국은 한참 달랐겠다.
부국은 아니었지만 아주 빠르게 성장하는 나라였다. 사람들이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내며 긍정적으로 힘차게  생활했던 것을 기억한다.  개인적으로는 미국이나 일본보다 음식, 옷, 교통이 굉장히 쌌기 때문에 여행을 여유롭게 할 수 있었다. 서울은 그 때도 굉장히 붐비는 도시였고, 시골에서 서울로 상경하는 사람도 매일 밀려들었던 걸 기억한다. 다행히 한국어를 조금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친절하게 대해줬다. 외국이  궁금한 한국인들로부터 질문을 참 많이 받았다. 한국인이 해외여행을 하기 쉽지 않았던 때 아닌가.

한국에 갔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지칠줄 모르는 에너지와 열정, 사람들의 큰 포부, 한국여성의 단아함, 공기에 퍼지는 김치와 연탄의 냄새, 서울과 부산의 엄청난 인파, 남대문∙동대문∙부산 자갈치 시장같은 붐비는 곳, 오래된 농촌 마을과 세련된 서울의 차이, 색색깔의 고궁과 절, 그리고 20세기 초 한국의 안타깝고 슬픈 역사에 대한 기억이다. 80년대에는  민중운동(데모)을 자주 목격했다. 그 때 많이 맡았던 최루탄 냄새가 아직도 코 끝에 알싸하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
늦은 10월, 혼자 설악산 여행을 갔는데 호텔에서 2명의 젊은이를 만났다. 그들이 먼저 나에게 산에 함께 올라가지 않겠냐고 제의해서 흔쾌히 수락했다. 그들의 캠핑 장비와 음식을 가지고 하루 온종일 산을 올라 어두워졌을 무렵 캠핑장에 도착했다. 낮엔 날씨가 좋았는데 저녁엔 체감 온도가 영하같았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캠핑 경험이 없었는지, 젊은이들은 슬리핑백도 없이 얇은 담요 하나만 준비했었다. 너무 추워서 우리는 서로를 껴안고 밤을 지새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재밌는 추억이다.

한국에서 70∙80년대에 찍은 사진을 보니 시골에도 많이 다녔던 것 같다.
강원도와 경상북도를 혼자 여행한 적이 있다. 하회마을에 방문했을 때가 기억난다. 당시엔 포장도로가 없어 대중교통이 동네까지 못 들어왔다. 버스정류장에서부터 2킬로미터 정도 걸었던 것 같다.  힘들게 하회마을까지 간 이유는 어떤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일본에서 한 한국 학생을 가르쳤는데, “한국에 가면 하회마을에 가서 우리 고모를 꼭 찾아봐라"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오래걸리긴 했지만,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 할머니를 찾긴 찾았다. 할머니는 외국인을 처음 본다고 했고, 조카가 일본에 있는지도 확실해하지 않았다. 낯선 사람이 찾아왔는데도, 할머니는 오래된  한옥집 마당에 심어져있던 감나무에서 감을 따서 건네주고 따스이 날 맞아줬다.

그 날 저녁엔 한 동네 주민이 마을 끝에 있던 방2개짜리 작은 초가집에 묵게해줬다. 물도 전기도 없는 집이였고, 작은 철양동이에서 물을 받아와 씻어야 할 정도로 가난한 집이었다. 식사도 소박했다. 그래도 따뜻한 한국인의 정을 느낄 수 있어 푸근한 밤이었다. 더 가슴이 따뜻해졌던건 그 사람이 다음 날 내게 쥐어준 작은 선물 때문이었다. 속옷과 양말이었다. 신년선물이나 생일선물로 받았던 것 같았다. 포장지도 벗기지 않은 채로 있었다. 호의와 감동 때문에 한동안 말도 못할 정도였다. 


<▲ 이제는 보기 힘든 소달구지. 1978년 촬영한 충청북도의 한 농촌마을. 사진제공=시드니 애킨스(Sidney Atkins)>



한국의 장점과 단점을 꼽으라면.
한식, 특히 비빔밥과 된장찌개를 좋아한다. 한국 전통 건축과 에너지와 우아함이 독특한 방법으로 표현되는 전통춤도 좋고, 한복과 민예의 고운 선과 색도 좋다. 물론 한국어도 아주 좋아한다. 서양사람들이 배우기 아주 힘든 언어지만 아름다운 언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읽고 말하기를 즐긴다. 한국문화의 ‘정’도 사랑한다. 아, 젊은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지만 뽕짝과 트로트도 즐겨 듣는다. 조용필씨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같은…

흡연∙음주 인구는 좀 줄었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 술과 담배를 즐기지 않기 때문에 별로 호감은 안간다. 정치적인 관점에서 보면 부자와 힘있는 사람들을 위한 법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법과 충돌되는 점도 이해하기 힘들다.

요즘에는 명예와 부(富)에 집착하는 일부 사람들, 성형외과수술로 환상에 불과한 완벽한 외모에 환호하는 사람들도 글쎄… 한국사람들은 원래 잘생기고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왜 얼굴과 피부톤, 헤어컬러를 바꿔 서양사람처럼 되려는지 모르겠다. 요즘 TV에 나오는 한국 젊은이들은 ‘진짜 한국인’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상당히 슬프다.

예전에 나눈 한 대화에서, 미국 인구조사서에 스스로를 '아시아인-미국인(Asian-American)'으로 표시한다고 했다.
일본에서 20년 가까이 살다 미국으로 돌아오니, 내가 마치 이방인 같았다. 일본이나 한국에서 내가 특별히 ‘아시아인’이 되려고 노력한 적은 없다. 그런데 미국으로 돌아와서 보니 나의 생각과 행동이 얼마나 아시아화 되어있는지 알게됐다.

나는 종종 머릿속에서 영어와 한국어, 일본어를 섞어 생각한다. 한국어로 꿈을 꿀 때도 있다(웃음).  즐겨 먹는 음식도 아시아 음식이고, 한국∙일본 드라마나 영화도 자주 본다. 그런 면에서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난 아시아인이자 미국인이라고 생각했다. 비율로 따지면 아시아 60대 미국 40정도?

물론 미국정부가 묻는 ‘인종적 배경’에 대한 대답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 것도 올바르지 않은 질문이다. 어떤 한국인이 3대에 걸쳐 미국에 살았고, 미국 문화와 언어가 더 익숙하다면 어떻게 대답해야하나. 외모나 핏 속에 한국인의 피가 섞여있다는 이유로 ‘아시아인’일까? 혼혈인 경우엔 또 어떤가.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순 없지만 아시아에서 오래 살았고, 그 곳의 언어를 할 줄 아는 나는 스스로를 ‘아시아인-미국인’이라고 생각한다.


<▲ 1984년 부산 자갈치 시장. 애킨스씨는 그 때도 사람들로 붐볐던 곳으로 기억했다. 사진제공=시드니 애킨스(Sidney Atkins)>

<▲ 1984년 부산 남포동 시장. 바나나가 잔뜩 담긴 리어카가 재밌다. 사진제공=시드니 애킨스(Sidney Atkins)>


캐나다 환경운동의 상징인 데이비드 스즈키씨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고 들었다.
일본 교토에 17년 정도 사는 동안 나는 일본의 환경보호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 활동했다. 자연을 보호하고 환경 파괴를 막자는 운동이었다. 1991년쯤 환경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이 커지고 있을 때, 몇몇 친구들과 함께 교토에서 국제 컨퍼런스를 개최했다. 세계의 언론과 환경단체를 초대했던 큰 행사였다.

캐나다에선 데이비드 스즈키 박사를 강연가로 초청했다. 당시에도 인기높은   TV프로그램을 진행했던  인물이었다. 일본인이었는데도 그는 캐나다에서 자라 간단한 일본말 밖에 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교토에 머무르는 동안 내가 스즈키씨의 가이드와 통역을 맡았다. 백인이 일본인의 일본어 통역을 맡은 것이다. (웃음)

교토 대학교에서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은 교수를 소개시켜주기도 했고, 일 외적으로는 ‘진짜 일본 음식’을 알려줬다.  내 큰 형도 스즈끼 박사와 비슷한 학업적 배경과 직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특히 얘기가 잘 통했다.


<▲ 한국에서 만난 젊은이들과 찍은 사진. 애킨스씨는 왼쪽에서 두번째. 사진제공=시드니 애킨스(Sidney Atkins)>



언젠가 한국에 다시 가고싶나?
지금은 일이 바빠 여유가 없지만 정말 다시 가고싶다. 짧게가 아니라 오랫동안... 얼마나 한국이 변했는지 매체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목격하고, 요즘 사람들 생각은 예전과 어떻게 다른지 대화도 나누고 싶다. 나는 아직도 환경과 전통문화 보존 문제에 관심이 높다. 한국에 가면 예전에 갈 기회가 없었던 제주도와 울릉도, 농촌마을과 국립공원에 가볼거고 전통 춤과 공연을 많이 보고 싶다.

밴쿠버의 한인 문화 행사를 많이 봤다고 했다. 밴쿠버 한인사회는 어떤 곳이라는 인상을 받았나.
밴쿠버 한인들은 교육 수준이 높고, 재정적으로도 꽤 여유로워 보인다. 그리고 소담스런 북미의 삶에 매력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밴쿠버 한인사회 역사는 북미 다른 지역의 한인사회나 중국, 일본 교민사회보다 짧기 때문에, 예전같은 인종차별은 경험하지 못한 듯 하다. 오래된 교민사회는 보수적인 백인층 때문에 심한 인종차별을 겪었지 않았나.

또, 밴쿠버에는 한국과 캐나다를 오가는 한인들이 많다. 그래서인지 상당수는 아직도 캐나다에 살고있으면서도 한국인처럼 생각하고 생활한다. 그런 면에선 아시아와 북미에서 절반씩 살았던 나와 배경이 비슷한 것같다. 그들의 자녀나 손주들은 캐나다화될까? 잘 모르겠지만, 앞으로 흥미롭게 관찰해보려한다.  

한혜성 기자 Helen@vanchosun.com/사진제공=시드니 애킨스(Sidney Atk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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