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지난 연말

박인애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8-01-29 11:17

박인애 / 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새해가 시작된지도 얼추 한달이 다 되어간다. 아들 내외와 같이 연말 연시를 보내려고 무거운 가방과 가방 만큼이나 부풀대로 부푼 꿈을 제 각기 지닌채 밴쿠버를 떠나 딸 아이가 살고 있는 오타와로 향하였다. 거기서는 구하기 힘들거나 좀더 비싼 한국 식품들, 즉 순대나 오징어, 멸치와 풋고추 등을 챙겨서 꾸역 꾸역 밀어 넣었지만 터질듯한 여행 가방이 조금도 짐스럽지 않았다.

"갖고 계신 옷 중에 가장 따뜻한 옷만 챙겨 오세요." 라는 딸의 충고를 따라 제일 두터운 다운 재킷과 얇게 솜으로 누벼진 바지를 차려입고 약 한 시간 지연된 비행기를 기다리던 딸 내외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남의 나라, 그나마도 각각 다른 도시에  살면서 채워졌던 외로움과 그리
움이 뭉클하고 가슴을 저미며 들어왔다. 거실에는 휘황 찬란하게 장식된 크리스마스트리와,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손녀들이 이리뛰고 저리뛰며 재잘대었다. 커다란 나무 밑에는 아직 풀지않은 선물들이 포장지에 싸인 채 옹기 종기 놓여있어서 우리가 준비한 선물도 같이놓고, 하나하나 각자의 이름이 써진 선물을 풀어보며 흐뭇하게 또는 깔깔대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는 동안 오래 만나지 못했던 가족 간의 따뜻한 정이 서로간에 새록 새록 흘렀다. 

저녁 상 위에  올려진 다양한 샐러드와 오븐에 소스 발라 구은 짙은 갈색의 윤 나는  돼지 갈비로 포식을 한 뒤, 팀을 갈라서 윷 놀이도 하고 어떤 사물을 몸으로 표현하여
그 이름을 알아 맞히는 게임도하면서 따스한 저녁을 만끽했다. 다섯 살인 손녀의 크리스마스 캐롤과 유치원에서 배운 춤 솜씨도 한 몫 하였다. 배가 출출해지자 잘 구어진 오징어를 땅콩과 함께 먹으니 어른들이 마시는 맥주의 거품만큼이나 모두의 기분은 두둥실 떠올라 온 집을 꽉 채웠다. 

다음 날 차 두대에 나뉘어 탄 가족들은 세 시간 정도 걸려서 몬트리올의 다운타운 중심에 야경을 볼 수 있는 전망 좋은 호텔에 짐을 풀었다. 아들 내외는 16 층, 딸 가족과 나는 14 층 객실 두개를 예약해 둔 터였다. 살을 에우는듯한 추위에 몸을 사리며 잘 발달 된 지하도를 도보로 이동하여 그야말로 불야경을 볼 수 있는 레스트랑에서 값나가는 저녁을 거하게 "위하여"도 곁들어 먹었다. 유리창을 통해서 밖을 보니 아름다운 다운타운 전경이 고스란히 보였다. 성당도 교회도 작은 공원을 배경으로 별 세계에 온 것 같았다.

이튿 날 일어나 커튼을 여니 성에가 하얗게 창을 덮고 있었다. 창문이 반달형이라 둘로 갈라져 창을 덮은 성에와 성에 사이에 보인 바깥 교회의 뾰족탑과 높은 빌딩들 그리고 호텔들이 아침 햇살에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아이들은 성에 위에 손 바닥 도장도 찍고 화살표, 동그라미, 인형과 같은 뭔지 모를 많은 기호들과 꽃들까지 손톱으로 그리는 재미에 푹 빠졌다. 이 모습을 보자니 내 어렸을 적
창호지 바른 문 틈새에 박혀있던 두 손바닥만한 크기의 유리위에 덮였던 성에가 갑자기 생각났다. 호호 입김을 불며 둥글고 세모 난 사람 얼굴도 그리고 손가락 모양으로 도장도 찍은 후 할머니께 잘 그렸느냐고 물으면 대답 대신 "손 시럽다. 이리와." 하면서 따뜻한 아랫목에 언 손을 녹여 주셨다.

성에는 기기묘묘한 어느 성채의 모습, 얼어붙은 강과 뒤엉킨 갈대, 말이 달리는 풍경도 연출했다. 성에가 일구어 낸 냇가에는 고기를 그려 넣었고 우뚝우뚝 솟은 성곽의 앞에는 예쁜 공주님이 외출한 모양도 상상하여 그렸다. 그러는 동안 작은 유리 전면은 내 동화속의 세계로 바뀌어 나만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엮어내기 일쑤였다. 이 상상의 놀이는 "밥  먹어라."라는 할머니의 재촉이
있을때까지 계속되었고 밥 먹은 후 다시 본 유리에는 모든 그림이 사라지고 몇가닥 물 줄기만 흐르고 있었다. 그렸던 세계는 눈부신 창조였으나 홀연히 녹아, 상상과 현실의 틈 사이를 오가던 감성으로 내 삶 속에 갈아 앉아서 때때로 나를 찾아오곤 한다.

지난 해의 마지막 날에는 포도주와 맥주 , 쥬스 그리고 물로 채워진 가지각색의 글라스를 들고 열 부터 하나까지 숫자를 거꾸로 카운트다운하며 뉴욕 방송을 따라서 하다가 "와"  소리를 지르며 잔을 높이 쳐들어 새해를 맞이하였다. 사글거리는 눈 웃음과 다그르르 구르는 우렁찬 웃음들이 사방으로 퍼져갔다. 그리고 나서 지난 해는 안녕을 고하며 서서히 어둠속으로 사라져갔다. 우리 뒤 저편으로.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마스크 인생 2023.12.18 (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 (COVID-19) 팬데믹이 2020년 1월 30일부터 시작되었다. 세계 보건 기구(WHO)에서는 3년 4개월 만인 지난 2023년 5월 5일에 팬데믹의 종식을 선언하였다. 이제 COVID-19은 독감과 같은 엔데믹(풍토병)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 COVID-19은 변이를 일으키며 감염을 일으키고 있어, 변이 바이러스에 대한 백신을 계속 개발, 접종하고 있다.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마스크를 의무적으로 착용하게 되었다. 팬데믹 초기에 약국이나...
김현옥
가을의 그림자 2023.12.18 (월)
가을은 차츰 가을다워저 가고 있다세월을 견디어 나가기 위해자연은 버리며 산다가을 바람이 일면남길 것과 버릴 것으로가을 비가 내리면가질 것과 보낼 것으로가을은 점점 가벼워지고 있다.아름다운 가을의 멋과소중했던 가을의 추억까지도아낌없이 떠나보내며가을의 그림자는 점점 익어 만 가는데난아무것도 갖지 못하는 줄 뻔히 알면서늘 청춘인 줄 착각하고늘 건강한 줄 오해하고늘 당연한 줄 생각하며허전하다며, 부족하다며, 비어 있다며뭔가...
나영표
길을 가는 사람들 2023.12.11 (월)
영원에서 와서 영원으로 가는무한의 시간이어라잠시 다녀가는 생명들이오가던 길모퉁이에서 낙엽처럼 모였어라반갑게 즐겁게웃음을 나누고 꿈을 나누고 그 마음 우울할 때는슬픔과 회포를 나누고어느 날그 인연 다 하는 갈림길에 다다르면조용히 손 흔들며추억 한두 개 가슴에 보듬고 가는 길 친구 주고받은 우정에 감사하며서로의 행복을 빌어주며약속하지 못하는 내일의 어느 길목에또 다른 만남을 기대하며우리에겐 좀 더 가야 할 각자의...
안봉자
아버지의 뒷모습 2023.12.11 (월)
 딸아이를 만나러 시애틀에 갔다. 거의 일 년 만이다. 마중 나온 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내 품 안으로 파고든다. 어색하게 끌어안으며 살가운 냄새를 맡는다. 새로 이사한 집을 둘러본다. 이 많은 짐을 혼자 싸고 풀었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찡하다. 홀로 살아도 갖추어야 할 것은 한 가족이 사는 것과 다름이 없다. 아직도 어린애 같이 느껴지는 딸아이가 또 다른 나라에서 직장 다니며, 잘 적응하는 것이 대견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
민정희
벌거숭이 산 2023.12.04 (월)
캐나다 로키에는 세 자매 봉이 다정하게 솟아있습니다. 요정이 살 것 같은 아름다운 산입니다. 세 자매 봉에는 일 년 내내 하얀 눈이 덮여 하늘에 닿을 듯했습니다. 하지만, 지구가 뜨거워지면서 세 자매 봉 꼭대기에는 더 이상 눈이 없습니다. 이제 세 자매 봉은 덩그러니 벌거벗은 바위산이 되어버렸습니다.“아이 추워! 언니들!”막내는 포근하던 눈옷이 벗겨지자 추웠습니다. 두꺼운 눈옷을 입고 있을 때는 춥지 않았습니다. 눈 속은 참 따뜻하고...
이정순
솔방울의 추억 2023.12.04 (월)
카톨릭을 국교로 하는 캐나다의 가장 큰 국경일은 당연히 크리스마스이다.다민족 다문화 국가이기 때문에 종교의 자유에 따른 다양한 종교가 공존해 크리스마스보다만민의 신과 같은 어머니를 기리는 마더스데이가 실질적으로는 더 많은 국민들이 기리는날이기는 하다.한 해를 마무리하며 예수님의 탄생을 기리는 국경일이라 크리스마스 트리 등 많은 조명,장식과 선물, 음식, 종교적 문화가 발전되어 온 글로벌 축일이다.솔방울도 크리스마스 트리와...
이은세
자화상 2023.12.04 (월)
1 비춰보면스스로만 늘 추해 보이는모습이 있었다흰 여백으로 가득 찬언덕 위생명과 목숨이라는 두 인간이겹치듯 어른거렸고시작도 끝도 없는 기호들이표면에 기재되었다가물가물 아지랑이로피어나고 있었다 2 허기진 배물 채우듯냄새도 색깔도 없었다스스로에 대한 경고나결심 따위는 팽개치고오로지 자신에게만한없이 너그러워 보이는 그곳늘노릿한 바나나 향이 배어 있어서두통약을 찾다가결국 엉뚱한 소화제를 찾기도...
하태린
숨죽이고 2023.11.27 (월)
비는 내리고까맣게 어두움이 몰려왔을 때에도 나는불을 캐지 않으리창구멍 어디에도 머리카락 한 올을 보이지 않으리숨소리도 죽이고나는 꼭꼭 숨으리 그가 애타게 나를 찾고 찾아도그래도 나는 미동도 않으리 어느 날 그가 말하면몰랐다고 말하리정말 몰랐다고 말하리 당신도 애타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리더 탈 것 없어 하얗게 재가 되게 그냥 두리눈 헐기며 앙탈도 하리 세월의 옷자락이 너풀거릴 때그때에야 말하리한없이...
강숙려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