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한 해가 저물어 간다. 한 해의 끝자락에 서서 금년 한 해 있었던 일들과 신세진 모든 이들의 얼굴을 차례로 떠올려본다. 그리고 ‘산다는 것’은 결국 살아온 만큼 다른 이들에게 지불해야 할 대가가 큰 것임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하물며 주위 사람들로부터 받은 신세와 사랑은 그렇다 치더라도 오늘 하루와 내일과 또 내년 한 해를 한번 더 허락(?)하시는 그 분께 나는 과연 무엇을 드려야 할까?
그야말로 생때같은 자식을 먼저 보내고 찢어지는 듯한 아픔 속에서 김현승 시인은 ‘눈물’이라는 시를 써서 그 분께 바쳤다.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 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 뿐.
한 번쯤은 자식을 데려간 납득 못할 신의 섭리를 원망할 법도 하건만, 그는 쏟아지는 ‘눈물’의 진정한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고 그것을 고귀한 헌신의 제물로 드리고 있는 것이다. 인간적인 슬픔의 정점(頂點)에서 어떻게 이런 감사를 드릴수가 있을까? 그는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주시다’로 시를 맺으며 찰라적인 인생의 허무함을 영원의 차원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소설가 박완서씨는 의대 본과 4학년에 재학중이던 외아들을 교통사고로 잃고, 한 달 여를 식음을 전폐한 채로 바닥을 뒹굴며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이 시를 통해서 슬픔을 극복하고 먼저 간 아들을 위해 바치는 산문집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이 세모(歲暮)의 시간에, 그러면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생각해본다. 부모로부터 성(姓)과 혈액형을 물려받았으니, 그것을 최후까지 잘 간직하다가 돌려 드려야하나? 혹은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을 주셨으니, 분에 넘치도록 행복한 가운데서도 그러나 때로는 힘겹게 지켜온 가장의 자리를 훈장처럼 보여 드려야할까? 아니면, 세상 살면서 문단(文壇) 말석이나마 한자리 차지하고 비좁게 앉았으니 그나마를 자랑이라 보여드려야 할까?
이 생각 저 생각,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연상과 사념들의 종착지는 어렵사리 ‘모국어’로 귀결된다. 내 뼈와 살과 피 가운데에는 분명 모국어라는 조혈 세포가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내 이름과 내 나라의 이름도,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의 이름도, 그리고 언젠가 그 분을 뵙게 되는 날, 그 분께 드리는 인사와 기도까지도 나는 모국어로 드릴 수밖에 없기에…
한 해가 정말 강물처럼 흘러간다. 그러나 흘러가는 저 프레이저 강물은 우리를 보고 흘러간다고 이야기하는 듯 하다. 진정 우리는 흘러 흘러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한 해 한 해 우리는 흐르고 흘러서 결국에는 끝닿는 어딘가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 날이 오면 내가 가장 나아종까지 간직했던 우리말을 가지고 그 분께 아름다운 시와
헌사를 선물해드리는 가슴 벅찬 상상을 해 보며 2017년, 또 한 해를 종이배 띄우듯 어디론가로 멀리 띄워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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